129화 상춘원 미로 (4)
“그게 말일세…….”
제갈휘가 밤사이 있었던 사건을 남궁후에게 털어놓았다.
남궁후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순히 외부인이 침투한 사건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밤사이에 무림을 뒤흔들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살존, 비천광존, 만겁묵존 이 셋도 목숨을 잃었네.”
“그래서 주 공자를 죽였단 말인가?”
남궁후의 입에서 분노의 일성이 터져 나왔다.
“주 공자는 신창패존을 죽였고 사천당문을 멸문한 정파의 공적이네. 그는 성장하면 일세의 대마두가 될 거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다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는 점이 아쉬울 뿐.”제갈휘는 담담하게 설득했다. 당연히 남궁후는 믿을 수 없었다. 주석하가 죽었다는 사실도, 주석하가 대마두로 성장하리란 예상도.
“그렇게 함부로 예단해도 되나?”
“예단이라니? 엄연한 현실인 것을. 방금 도망친 침입자도 마찬가지네. 왜 하필이면 그자가 오늘 침입했을까. 모두 주석하를 도우려는 심산이 아니었겠나? 종합해보면 어쩌면 주석하는 마교의 끄나풀인지도 몰라.”제갈휘는 분명하게 주석하를 정의했다. 어차피 진상은 중요하지 않다. 무림맹 군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남궁후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제갈휘를 노려보다가 자하검존에게 동의를 구했다. 곧 그는 더 참담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자하검존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 그에게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갈휘를 응원하는 모습이다.
그제야 남궁후는 현실을 깨달았다. 오늘 발생한 사건은 특별하지 않다. 정파가 정파했을 뿐이다.
과거에는 제갈휘의 이런 처리방식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과 연관되고 보니 비정상이 확실하게 보였다. 밤새 벌어진 사건을 전혀 몰랐던 이유도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를 배제하고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를 배척한 이유는 그가 주석하와 가깝기 때문이었겠지.
돌이켜보면 과거에도 그랬었다. 그때는 자신이 배제되지 않았기에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제갈휘는 정파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공작을 벌였고 그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는 왜 몰랐지?’
남궁후는 뜻밖의 깨달음에 아연실색했다. 이것이 정파의 본 모습이었던가. 이런 식으로 무림의 정의를 지켜왔던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입에서 비릿한 쓴맛이 느껴졌다. 입술을 악무는 바람에 피가 터져 나왔다.
남궁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주석하는 눈을 떴을 때 파란 하늘을 봤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시선을 내리자 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로 제갈세가의 여러 전각까지. 특이하게도 눈에 익었던 상춘원이 보이지 않았다. 물에 잠겼으니 당연한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순간 주석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발견했다.
우설금이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 항상 드리워져 있던 싸늘한 기운이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초조함과 염려만이 가득했다.
“여긴…….”
“깼어요?”
“어떻게…….”
“당신이 미로를 부쉈죠. 그 틈으로 내가 당신을 끌고 밖으로 나온 거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이해했다. 주위에 우설금을 제외한 다른 위험이 전혀 없음을 확인한 주석하는 재빨리 몸 내부를 관조했다.
내공 소모가 극심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다. 우설금이 등을 찌른 순간 솟구쳤던 다섯 기운이 지금은 단전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그 후로도 그 기운이 혈맥을 떠돌아다닌 듯 예상외로 몸이 많이 망가지지 않았다. 죽지 않고 물속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그 다섯 기운 덕분인 듯했다.
“다친 곳 없어요?”
우설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나도 별문제 없어요.”
문제가 없긴 하지만 완전하진 않다. 다시 예전처럼 회복하려면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파십존과 전투를 벌이느라, 미로를 탈출하느라 너무 많은 내력을 소모했다.
우설금과 생사를 함께 하다니! 무려 그녀가 그를 구하다니! 이전과 그녀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가 고맙긴 한데……. 어째 그도 그녀도 감정 표현이 서툴렀다.
주석하는 호수 건너 제갈세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쳐들어가고 싶어요?”
우설금이 그의 내심을 정확하게 찍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서 제갈휘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다. 왜 죽이려 했냐고. 물론 뻔한 답이 되돌아오겠지. 그렇다. 정파는 항상 그랬으니까. 적어도 전생에서는 그러했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에서 정의와 협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각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형태로 재단할 뿐이다. 정파도 사파도 각파의 이익을 위해 일을 도모할 뿐이다. 다른 점은 어떤 식으로 명분을 만드냐일 뿐.
“아뇨.”
주석하는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 제갈휘에게 덤벼봐야 다시 기관진식에 말려 위험만 가중할 뿐이다. 지금처럼 지친 상황에서는 자하검존을 당해낼 방법이 없다. 우설금도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그의 일에 우설금을 굳이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몇 년 더 살려주죠.”
“인심이 후하군요.”
주석하는 옷을 털고 일어났다. 옆에 놓인 흑검소가 그를 반겼다.
우설금도 홍철산을 들고 그를 따라왔다.
“어디로 갈 건가요?”
몇 걸음 걷지 않아 날아든 우설금의 질문에 주석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긴 했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흑검문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 꼴, 이 상태로? 아니면 어디로 가지? 남궁세가와 다시 만나야 하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석하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흡사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이번 생에는 인생을 스스로 주도하겠다고 다짐해놓고선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제갈세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오지 않았던가. 무려 정파십존이 세 사람이나 동원된 위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뿐.
“마교로 돌아갈 건가요?”
이번에는 반대로 물었다.
우설금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도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인가.
주석하는 잠시 중단했던, 자신의 힘을 찾는 행보를 잇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만나야 할 인물은 독군 하나이지만 아직 빙군의 내력을 완전히 살리지 못했다. 빙군이 그에게 무공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다. 차라리 지금 멀리 여행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이 낫다. 적어도 지금은 그가 죽었다고 제갈휘가 안심할 테니.
그가 사라진 후 제갈휘와 뇌군이 어떤 식으로 무림맹과 흑련을 움직여서 판을 짜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고, 더 강해져서 돌아오면 그들이 얼마나 놀랄지 궁금했다.
“갑자기 갈 곳이 생겼어요.”
“어딘데요?”
“북해.”
우설금의 반응은 없었다. 묵묵히 그의 곁에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갈 곳이 멀고 먼 북해라니. 그녀도 당황스럽겠지. 당연히 주석하는 우설금이 따라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마교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면 천마가 내린 다른 임무를 수행하거나.
그런데…….
“나도 같이 가요.”
“네?”
그녀의 반응에 오히려 주석하가 기함을 터트렸다. 그 먼 곳까지 같이 가자니? 아무리 그들이 무림인이라지만 남녀 단둘이서?
“싫다면…… 멀리서 그냥 따라갈게요. 과거처럼.”
예전에 주석하가 비마표국에서 용병 일을 할 때 우설금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조용히 따라왔었다. 물론 그녀는 그때 만리안석을 추적하고 있었다지만.
주석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따라오고 오지 않고는 내가 어떻게 할 문제가 아니지만…… 정말 같이 가고 싶어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우설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천마가 그를 관찰해보라고 했다고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도 임무라고 하면 분명히 오지 말라고 할 테니까. 그런데 과연 천마의 명령 때문인지 그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오고 말고는 당신 자유니까 그렇다 치고…… 그런데 항상 곁에 두 사람 데리고 다니지 않았나요?”
“흑귀와 백귀?”
“네. 그들은 어디 갔어요?”
“멀찌감치 따라올 거예요.”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설금과 그 둘의 관계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부하가 아닐까 예상하는 정도다. 그런데 그 둘이 감시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내키지 않긴 했다.
“떼놓을 수 있나요?”
“가능은 하지만…….”
난감하다는 표정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려나. 북해가 워낙 먼 곳이니 혼자보다는 둘이 백배 낫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냥 없는 셈 치고 그 이상한 하얀 놈과 검은 놈을 무시하면 된다.
어쨌든 훗날 마교가 중원에 입성할 때를 생각하면 무려 마교의 최정상 지위에 있는 이 여자와 친목을 다져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북해 멀다는 거 알죠? 가다가 돌아가겠다고 울어도 난 책임 못 져요. 그때는 내버려 두고 갈 테니까. 알았어요?”
우설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우설금의 말수가 더 줄어든 느낌이다. 아니 예전에도 그랬었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를 향해 살인적인 냉혹한 기운을 뿜어내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주석하는 빙그레 웃으며 앞장섰다.
우설금은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고 그런 여인과의 동행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다. 비록 여행하는 동안 손 한번 잡아보기 어렵겠지만.
**
제갈휘가 반파된 전각을 둘러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청년들이 다가와서 인사했다.
익숙한 녀석들이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금지옥엽, 그리고 천중산장이라 했던가. 정파의 후기지수이자 향후 무림을 선도할 사람들이다. 정파의 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이다.
“무슨 일인가?”
남궁서란, 백화령의 눈치를 보다가 남궁천이 앞에 나서서 정중히 말을 꺼냈다.
“만사지존 어르신, 어제 연회가 끝난 후 주 공자와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주 공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이상한 분위기와 소문을 듣고 제갈휘의 해명을 요구하러 온 참이었다.
제갈휘는 남궁천을 비롯하여 세 사람의 면면을 살폈다. 이미 창궁무존 남궁후를 통해 이들의 입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정파이면서도 주석하를 응원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절대 아군이 아니었다.
제갈휘는 저쪽의 호수를 가리켰다.
“상춘원에 있을 거네.”
“상춘원은…….”
“물에 잠겼지.”
“대체 그게 무슨…….”
남궁천을 비롯하여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제갈휘는 이들에게 확실히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파는 사파와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연회가 끝난 후 상춘원에서 기관진식이 발동했네. 물론 주 공자에게 경고했지.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어. 그는 대마두의 기질을 버릴 생각이 없었네. 장차 무림의 악이 될 자이니 어쩌겠나? 제거할 수밖에.”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창천일룡이라 했나? 자네가 주석하를 얼마나 알지? 그는 신창패존을 죽였고 당문을 멸문시켰네. 그가 죽인 정파인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지금까지 그가 끼친 해악만으로도 죽음은 당연하네.”남궁천을 비롯한 모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주석하가 죽었다. 지금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니. 어제까지 같이 술을 마셨었는데.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