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강가보 (1)
“이게 무슨 일이에요?”
참다못한 백화령이 끼어들었다.
제갈휘의 음산한 눈빛이 백화령을 노려보았다.
“천중화라 했지? 정파라면 사파인에게 너그러워서는 안 되네. 현 무림에서 정의가 살아있고 명문 정파가 유지되는 이유는 협사들이 목숨을 바쳐 사파인을 제거하기 때문이야. 어젯밤 주석하를 제거하기 위해 정파에는 큰 손실이 발생했네. 무려 정파십존 삼 인이 목숨을 내놓았지.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강호에는 대마두가 등장했을 거네. 그들의 의로운 희생을 간과해서는 안 되네.”백화령은 어이없는 답변에 새파랗게 질렸다. 예전에는 저런 훈시를, 저런 태도를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흑도팔군의 일인인 악군을 둘째 사부로 두면서 그녀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어제 만난 주석하는 대마두가 아니었다.
대체 누가 대마두라고 결정한단 말인가.
“그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그를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도 죽이지 않았을 거예요.”
백화령은 자신의 사부인 화존과 악군의 성품을 잘 안다. 만일 주석하에게 마두가 될 자질이 엿보였다면 그들은 절대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갈휘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누가 감히 만사지존의 의견을 반대한단 말인가.
“자네는 아직 세상 경험이 얕아서 그러네. 마두는 대개 어렸을 때부터 그 싹이 보이지. 사실 싹이랄 것도 없어. 지금 그는 우리 정파의 가장 큰 위협으로 떠올랐네. 당문마저 멸문시킨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이런 식은 너무 비열한…….”
제갈휘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비열하다고? 무려 십존 세 사람의 희생이 있었네. 그 대가는 절대 작지 않아.”
제갈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남궁천과 백화령은 차마 대선배 앞에서 분노를 폭발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화를 죽였다. 남궁서란 또한 창백하게 질려 한숨만 내쉬었다.
그들은 어젯밤 연회장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주석하를 떠올렸다. 새롭게 등장한 청년 영웅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매우 신선했다. 정과 사에 매몰되지 않은 거침없는 발언은 그들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의 무공 또한 젊은 사람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들이 보기에 주석하는 모든 점이 갖추어진 준비된 영웅이었다. 절대 마두가 될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남궁천이 주먹을 쥐고 옆에 선 나무 밑동을 가격했다. 나뭇가지 일부가 부러져나갔다. 남궁천은 주석하와 짧다면 짧지만 적지 않은 만남을 가졌다. 특히 최근에는 선대 구주사은 때부터 양 집안이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친밀감이 더욱 커졌다.
그랬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그것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 함정에 빠져.
“이런 식이라면…… 정파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는 구주사은이었던 조부 제왕검과 흑검문 개파조사인 흑풍검신이 당시에 왜 무림을 떠났는지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남궁천은 젊은 혈기 덕분에 위험 앞에서 주저하거나 소신을 굽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평소 자신이 알던 소신이 그리 대단치 않음을 알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남궁천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주석하가 죽었으니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백 소저, 우리는 돌아가겠습니다.”
“저도…… 가야죠.”
백화령도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작 제갈휘는 호숫가를 거닐며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지금 누리는 무림의 평화는 이런 식의 사전 작업에 의해 얻은 것이라고. 어제 한 사람을 죽이면서 치른 큰 희생이 무림의 미래를 평화롭게 할 거라고.
상념에 사로잡힌 제갈휘는 상춘원이 잠긴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청년과 마주쳤다.
‘이 아이는…… 하북팽가의 후손이었나…….’
그를 알아본 청운괴도 팽두석이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갈휘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부친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네. 다만 하나만은 알아야 할 거네. 살존은 정파의 앞날을 위해 희생했으며 그 가치는 절대 가볍지 않음을 말이네.”
“압니다. 평소 아버지께서도 정파의 앞날을 걱정하셨습니다. 항상 하북팽가는 주어진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 장하구나. 부친의 뜻을 받들어 더욱 정진하게나.”
“명심하겠습니다. 흑도는 우리의 적이니까요.”
팽두석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제 장난기 많았던 소년이 지금은 신중한 청년으로 탈바꿈했다.
제갈휘는 그를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림에는, 아니 정파에는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어젯밤의 일은 비록 희생이 컸으나 그 대가로 향후 수십 년의 안정을 얻을 것이다.
**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점차 먹구름이 짙어졌다. 곧 한바탕 폭우가 퍼부을 듯했다.
“벌써 초여름이네요.”
주석하는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푸른 기운이 가득했다.
남궁세가와 함께 덕양을 떠난 때가 초봄이었는데 벌써 계절이 바뀌었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좋을걸요? 한겨울에 북해에 간다고 생각해봐요. 생각만으로도 전신이 얼어붙지.”
주석하는 주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딱히 계획한 것이 아니건만 가장 더울 시기에 북해를 방문하게 되었으니 행운이었다.
그의 곁에는 우설금이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그녀의 역할은 절대 작지 않다. 그녀의 붉은 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석하는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이번이 집에서 제일 멀리 가보는 거예요. 당신은?”
“……나도 그렇죠.”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의 싸늘한 음성과 달리 어딘지 정감이 어려 있다.
“십만대산은 어때요? 살기 좋나요?”
무심코 말을 꺼냈던 주석하는 실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마교 본산인 십만대산을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장렬하게 죽었으니까. 그곳은 고산이 줄줄이 이어진 황무지였다. 인가도 드문 황량한 그곳에서 무슨 재미로 사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좋진 않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아요.”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나 고향은 이중적인 감성을 준다. 떠나면 그리워하면서도 그곳에 있을 때는 지겨운. 우설금에게 십만대산은, 아니 마교는 어떤 의미일까.
“나중에…… 중원에 나와서 살 생각은 없어요?”
우설금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주석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그 내면에 숨은 쓸쓸함을 얼핏 봤다.
“고향에 부모님이 계세요?”
다시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천애 고아란 말일까. 만일 우설금의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이처럼 예쁘게 자란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상상이 갔다. 동시에 이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살아남은 우설금이 얼마나 부모를 그리워할지도.
끝없이 이어지던 숲이 끝나고 어느 순간 능선에 올라섰다.
눈앞에 광활한 평지가 펼쳐졌다.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주석하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멀리 북쪽을 바라봤다. 저 너머 아직은 보이지 않는 그곳에 북해빙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죠. 인간은 아옹다옹하면서 살고 있지만 대자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더라고요.”우설금도 묵묵히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쪽에 마을 사이로 작은 길이 보이죠? 오늘 우리가 지나갈 길이에요.”
물론 초행길을 제대로 알 리 없건만 단지 북쪽으로 길이 나 있으니 계속 갈 뿐이다.
“오늘은 저기 마을에서 묵고…… 다행히 노숙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민가에 숙박하거나 산속에서 잠자리를 해결했다. 주석하 본인이야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노숙에 이골이 났으나 우설금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우설금은 그런 불편을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세상을 둘러보던 주석하는 다시 걸음을 뗐다.
“자, 또 갈까요?”
몇 걸음 옮겼을까.
후두둑-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었더라니, 역시 비를 피해갈 수는 없다. 초여름 소나기여서 순식간에 빗방울이 굵어졌다.
쏴아아아-
눈앞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숲의 짙푸른 녹음이 흐릿하게 보였다.
주석하의 머리 위로 얇은 호신강기가 어리면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튕겨냈다. 지금까지 이곳에 오는 동안 가끔 비가 내렸고 그때마다 그는 호신강기를 이용해서 비를 피했다.
다만 오늘 내리는 비는 이전과 달리 상당히 양이 많았다. 제갈세가에서 호수에 빠진 이후로 물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주석하의 옆에서는 우설금이 홍철산을 넓게 펴고 비를 피하고 있었다. 붉은 색상의 비단 천에 분홍빛 모란이 수놓인 우산은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저 우산은 때로는 햇빛을 가리고 때로는 비를 막아주었으며 가끔은 그때처럼 살상 무기로 변했다.
주석하는 비를 막는데 아무 쓸모가 없는 자신의 흑검소를 노려봤다.
“젠장…….”
아무래도 흑검소에 살을 붙여 우산으로 바꿔야 하려나?
그의 내심을 눈치챘을까. 우설금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웃음꽃이 핀 그녀의 얼굴은 매우 화사하고 아름다웠으나 정작 흑검소를 노려보는 주석하는 알지 못했다.
“이리로 와요.”
우설금이 홍철산을 옆으로 기울였다.
함께 써도 되는 걸까. 나이가 든 처녀와 청년이 우산 하나를 같이 쓰면 예법에 어긋난다. 물론 예법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긴 하지만 남자인 그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여자인 우설금의 입장은 다르다.
아무래도 한 우산 내에 들어가면 서로 몸을 부대끼게 되니까.
“하지만…….”
주저하를 향해 우설금이 화사한 미소를 보냈다.
마다할 그가 아니다. 주석하는 재빨리 우설금의 옆에 딱 붙으며 홍철산 안으로 들어갔다.
홍철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법 시끄럽다.
투둑- 투두둑-
빗소리가 주석하의 귀에는 마치 아름다운 자연의 음률로 들렸다. 우설금의 향긋한 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지금 이런 세상이 그가 꿈꾸던 삶일까. 사랑하는 연인과 걱정 없이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낸다면. 오랜만에 맛보는 마음의 평화였다.
사랑하는 연인? 우설금이? 그런 마음이 든 순간 주석하는 냉기를 풀풀 날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나쁘지 않다.
우설금이 씌워주는 홍철산 아래에서 걸음을 옮기던 주석하는 미안해졌다. 홍철산도 우설금의 것인데 씌워주는 수고마저 우설금에게 맡기려니.
아무 생각 없이 그는 홍철산의 손잡이를 덥석 쥐었다. 바로 우설금이 쥔 부분이었다.
그의 손이 우설금의 손을 덮었다. 곱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예기치 않은 감각에 주석하는 깜짝 놀라 우설금을 쳐다봤다. 우설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홍철산 손잡이를 함께 잡은 채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리는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귀를 울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우설금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손을 빼냈다. 그녀의 볼에 홍조가 어려 있었다.
‘이 여자에게도 이런 모습이?’
무시무시한 마교의 여인이자 항상 냉기를 뿌리던 그녀였기에 지금 표정은 의외였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주석하는 웃음을 머금은 채 홀로 홍철산을 들었다. 내리는 비가 새로운 시간을 몰고 오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