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31화 (131/273)

131화 강가보 (2)

산에서 내려와 마을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먹구름이 일부 걷히고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비로 말끔해진 공기와 주변 풍경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주석하와 우설금이 마을을 우회하는 관도로 들어섰을 때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히이이잉-

다닥- 다닥- 다닥-

주석하는 말의 질주 상태와 말 위에 탄 사람을 보고는 안면을 찌푸렸다. 말의 속도가 대단히 빠른 데다 탄 모습이 정상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쥐고 말의 목을 힘껏 껴안은 채 쓰러진 자세는 매우 위태했다.

말은 놀란 듯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탄 사람이 기절한 듯 보였으니 말이 제멋대로 달리고 있음이 확실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 뒤로 쫓아오는 수 필의 말도 목격됐다.

괜히 복잡한 일에 끼어들기 싫었던 주석하는 길가에 멈추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히이이잉-

쫓기던 말이 그들을 무시하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주석하는 말 엉덩이에 꽂힌 화살을 발견했다. 엉덩이에 화살이 꽂혀 있으니 말이 미친 듯 달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 향한 방향은 우설금 쪽이었다.

위험을 느낀 주석하가 그녀를 보호하기도 전에 우설금은 가볍게 몸을 뒤로 물리며 말을 피했다.

히이이잉-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자 말에 탄 사람이 떨어졌다. 말은 떨어진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스쳐 저쪽으로 달아났다.

말을 쫓던 사람들이 낙마한 사람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별로 질이 좋지 않은 놈들 같죠?”

주석하의 평가에 우설금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리를 이룬 사람들의 차림새는 전형적인 흑도인으로 보였다. 검은색과 붉은색 옷을 주로 입은 녀석들의 인상 역시 흉흉했다.

“워- 워-.”

주석하 쪽을 흘낏 본 그들이 다짜고짜 주석하와 우설금 주위를 말을 타고 빙빙 돌며 위협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어르신의 일을 방해하다니!”

우두머리 녀석은 얼굴에 서너 개의 칼자국이 난 뚱뚱한 장한이었다. 녀석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말이 무척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뭔 소리요? 우리는 지나가는 과객이외다.”

“흠, 나그네라? 그런데 왜 하필 이놈이 당신들 앞으로 왔을까?”

우두머리가 주석하 앞에 쓰러진 낙마한 자를 가리켰다.

그들을 포위한 채 말을 타고 빙빙 돌며 빈정거리는 모습이 짜증났으나 주석하는 분노를 삭였다.

“그걸 내가 어찌 압니까?”

“그럼 가르쳐 주지. 그 말이 네 녀석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은 분명히 예전에 친분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게 무슨 소리지?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살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놀리듯 히죽거리면서 끊임없이 우설금을 곁눈질한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바로 직감이 왔다. 우설금의 실체를 알면 저런 짓을 할까…….

주석하는 우설금을 흘낏 살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옆에 서 있기만 했다.

“하여튼 네놈은 수상쩍으니 우리와 함께 가줘야겠다.”

우두머리가 위협하는 순간 곁에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주석하는 될 수 있으면 적당히 넘어가려 했다. 이런 놈들과 시비를 가릴 만큼 여유롭지 않다. 이들이 누구를 추격하든, 괴롭히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이놈들이 제 발로 무덤을 파고 있다. 이게 모두 우설금의 외모 때문이긴 한데…….

“당신들은 누구요?”

“흐흐, 겁이 나느냐? 우리는 천하의 패권을 쥔 북혈각 문하다! 당연히 들어봤겠지?”

주석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두머리가 껄껄대며 웃었다.

“여자 앞이라고 제법 힘주고 싶은가 본데……”

말을 하던 우두머리가 부하에게 눈짓했다.

부하들이 말을 탄 채 검을 내밀어 두 사람의 목을 겨눴다.

그 순간 우설금이 안면을 왕창 찌푸렸다.

휘익-

몇몇 부하들의 장검이 갑자기 요동치며 손에서 벗어났다.

“헉! 이게 무슨!”

녀석들이 입을 쩍 벌리고 놀라는 순간 수 개의 장검이 붕 떠올랐다.

장검은 천천히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빛처럼 앞으로 뻗어 원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다만 칼집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이었다.

푸아악-

“크악!”

비명을 지르며 부하들이 칼에 찔린 채 말에서 떨어졌다.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무공에 경악한 우두머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저놈들을 잡아라!”

남은 부하들이 겁에 질린 채 검을 드는 순간 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검이 제멋대로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방향을 튼 다음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푸푹!

“으아악!”

아무도 검을 피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으으!” 홀로 남게 된 우두머리가 신음을 토하며 급히 말고삐를 돌렸다. 그가 고삐를 잡아채는 순간.

히이이잉-

말이 앞발을 들고 크게 울었다. 어느새 날아간 수십 개의 검이 말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

순식간에 말에서 떨어진 우두머리가 사색이 된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자, 잔인한 년…….”

우설금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어떤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무표정 그 자체였다. 심지어 적에게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우설금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말에 박혔던 검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녀가 손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수십 자루의 검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으아악!” 마치 고슴도치처럼 우두머리의 온몸에 검이 무수히 꽂혔다. 우두머리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바로 숨이 끊어졌다.

얼이 빠진 주석하는 북혈각의 잔당과 우설금을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무서운 여자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 잔인함이 상상을 넘어섰다. 조금 전까지 함께 우산을 썼던 그 여자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어느 것이 우설금의 본 모습일까.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죽일 것까진……. 어쩌면 그가 강호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라면 단지 이들을 훈계하고 돌려보냈을 텐데 우설금은…….

“가죠.”

별일 아니라는 듯 우설금이 손을 털며 길을 재촉했다.

무심코 우설금을 따라가려던 주석하는 쫓겨서 낙마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단지 말에서 떨어졌을 뿐이니 아직 죽지 않았을 텐데.

“잠깐만요.”

주석하는 말에서 떨어진 중년의 남자를 확인했다. 과연 숨이 붙어 있었으나 매우 미약했다.

그가 생사를 확인하자 남자가 힘겹게 눈을 뜨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 누구시오?”

“지나가던 나그네요.”

“부, 부탁 좀 합시다……. 나, 나는 강가보 총관 강역이요. 지, 지금 강가보가…… 북혈각 수중에 떨어졌소. 태, 태성문에 도움을 청하러 가던 길인데…… 꼭 태성문에 이 사실을 전해주오…….”태성문? 얼핏 들어본 것 같긴 했다. 구대문파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중원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정파 문파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강가보요?”

“지, 지금 강가보가 위험하오……. 꼭 좀 전해주…….”

말을 반복하던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북혈각의 침입으로 강가보가 위험해지자 총관인 강역이 태성문에 구원을 요청하려고 탈출했다. 북혈각에서는 총관을 추격했고 지금 이곳에서 총관은 목숨을 잃었다.

주석하는 착잡한 표정으로 총관을 가지런히 눕혔다.

도와야 하는가, 아니면 무시해야 하나. 그는 이런 부탁을 무시할 만큼 성품이 나쁘진 않다. 들어준다고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죽으며 남긴 마지막 유언인데…….

주석하는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얼른 떠나자고 재촉하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태성문에 들러야겠어요.”

지금 무시하면 괜히 찝찝할 것 같아 주석하는 목적지를 바꿨다. 그래 봐야 그리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우설금이 옆에 붙어 따라왔다.

“으흠…… 싫은가요?”

“전 상관없어요.”

하긴 우설금이야 이 먼 곳까지 그를 따라서 여행하는 중이니 그가 어디를 가든 따라올 것이다.

방금 벌어진 상황을 다시 정리하면서 주석하는 우설금의 정서와 감정이 일반 사람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물론 예전에도 그렇게 느끼긴 했다. 그녀를 둘러싼 차가운 기운, 남을 압박하는 싸늘한 기세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뿜어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기운이었다.

거기에 약간은 사회성이 결여한 듯한 행동과 수십 명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혹함은 우설금이 자란 환경을 궁금하게 했다. 과연 그녀의 이런 면은 선천적일까 아니면 후천적일까.

“태성문에서 강가보 총관의 부탁을 전하고 가죠.”

그때까지만 해도 소식을 전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

태성문은 그들이 숙박하려던 마을에서 가장 큰 문파였다. 주변 사람에게 길을 물을 필요도 없이 멀찍이 커다란 현판과 높다란 솟을대문이 바로 보였다.

당연히 덕양의 흑검문이나 적혈방보다 훨씬 규모가 큰 수준. 위세로만 보면 구대문파와 맞먹을 듯했다.

“누구냐?”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문지기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문주님께 전할 사항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문주님이 네놈을 만날 만큼 한가한 줄 아느냐?”

개의 가치는 그 주인에게 달렸다더니 그 위세가 매우 당당했다. 개를 보면 그 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여기 정파가 맞기나 한 건가? 그래도 정파는 외부 사람에게 체면치레는 제대로 하지 않나?

“강가보 소식인데요?”

어쩔 수 없이 강가보를 꺼냈다. 강가보와 태성문이 평소 친분이 없었다면 어쩔 수 없고.

그래도 강가보를 들어봤던지 문지기가 움찔했다. 잠시 고민하더니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줬다.

태성문 내부는 여느 방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정문 옆에 쭉 늘어선 객방으로 안내됐다.

“여기에서 기다리시오.”

그들을 한적한 방으로 안내한 문지기가 바로 사라졌다.

주석하는 우설금과 방구들에 앉아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쉴 시간이었기에 답답함은 없었다. 객잔에서 쉬지 않고 이곳에서 쉬니 돈이 굳었다고 좋아해야 할지도.

“여기 어때 보여요?”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이다.

주석하는 한쪽 구석에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피곤할 텐데 누우세요.”

말하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남녀가 나란히 누워있으면 당사자야 그렇다손 쳐도 남들이 봤을 때는 이상하게 보이려나?

정작 우설금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그를 따라 옆에 나란히 누웠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무래도 강가보가 위험에 처한 것 같죠?”

“강가보는 흔한 정파, 북혈각은 흔한 사파. 그런 것 같네요.”

“우 소저는 정파, 사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어요?”

마교는 따지고 보자면 사파다. 지금까지 그녀가 죽였던 가적성이나 남궁세가 사건, 제갈세가에서의 도움, 모두 정파를 향한 것이었으니 그녀의 성향이 대충 짐작되기는 한데.

“양쪽 다…… 죽일 놈들이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주석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교니 너무 당연한 건가.

“……나의 원수예요.”

그녀의 개인사가 튀어나왔다.

“원수요? 어떤?”

우설금이 입을 닫았다.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굳어 있어 주석하는 질문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가 이만큼 가까워진 이유는, 아니 초기에 그녀가 그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뭘까. 그녀를 알게 될 때마다 의문투성이다.

그녀도 평범한 강호인이었다. 오직 가문이나 사문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떠돌아다니는 가장 흔한 강호인의 사연.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성문 이것들은 왜 소식이 없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