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강가보 (3)
한 차례 더 전갈을 넣었으나 태성문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주가 바쁘면 그 아래 직위의 사람이라도 들여다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곳에 들어온 후부터 감감무소식이다.
물론 주석하는 나쁘지 않았다. 객잔에서 묵으나 이곳에서 묵으나 오히려 돈이 들지 않으니 더 좋긴 하다.
피곤했던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방안이 어둑어둑했다. 대충 삼경을 넘어 한밤중인 듯했다.
주석하는 옆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든 우설금을 조용히 살폈다.
창문으로 밝은 달빛이 스며 들어와서 방안을 환하게 비췄다. 달빛에 우설금의 얼굴이 빛났다.
이곳까지 우설금과 함께 다니는 동안 산에서 함께 노숙도 했고 가끔 객잔에서 한방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멀리 떨어져서 잠을 청했기에 이처럼 딱 붙어 누운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볼 일도 없었다.
낮에는…… 아직은 그녀를 빤히 보려면 겁이 나서…….
잠이 든 우설금은 평온해 보였다.
지금은 평소 날리던 싸늘한 한기가 완전히 갈무리 되어 평범한 여인이었다. 아니 그녀의 얼굴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천하절색! 가지런한 속눈썹이 덮고 있는 눈과 그린 듯이 예쁘게 뻗은 눈썹,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이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한쪽으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머리를 질끈 묶은 붉은 머리띠가 묘한 조화를 이뤘다. 이제는 붉은 머리띠를 보면 저절로 그녀가 연상될 정도다.
주석하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우설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피곤했나 보네…….”
우설금이 고수이니 그의 손길을 모르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알아도 상관없나. 이제는 우설금에 대한 두려움이 예전만큼 크지 않으니까.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미끄러졌다. 그녀의 이마와 코와 입술을 살짝 건드려봤다. 여전히 우설금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아!”
주석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석하는 반듯하게 누운 우설금을 눈으로 쓱 훑었다. 붉은 옷에 싸인 그녀의 몸이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이 눈을 자극했다.
잠시나마 그는 그녀와 혼인하면 어떨지 상상했다. 뭐, 나쁘지 않다. 그녀가 냉기를 풀풀 날리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정파도 사파도 원수라고 했었다. 마교가 중원과 원수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집안이 중원과 원수라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가 중원인의 손에 죽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녀의 부모도 마교도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니까.
어쩌면 그녀가 지금처럼 일상적인 감각에 무뎌지고 냉혹한 심성을 지니게 된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마교를 탈퇴한다면, 그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마교에서 벗어난다면 어쩌면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그녀와 혼인하고 백화루 주인이 되어 알콩달콩 살면 만족한 삶이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며 주석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아침에 다시 문주를 면담하겠다는 전갈을 넣었다. 이번에도 무시당하면 포기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무려 하루를 소비하여 노력했으면 충분히 정성을 다한 게 아닐까.
다행히 만나겠다는 연락이 왔고 주석하와 우설금은 함께 커다란 전각으로 향했다.
객청에는 턱수염을 길게 기른 초로의 노인이 문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손님이 들어섰는데도 제 할 일에 몰두한 모습을 보니 기대감이 팍 식었다.
“앉게, 무슨 일인가?”
고개도 들지 않고 노인이 자리를 권했다.
맞은편에 의자가 있어 주석하는 우설금과 나란히 앉았다. 노인이 고개를 들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주석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주님이십니까?”
“아아, 난 문주가 아니라…… 총관일세.”
고개를 들던 태성문 총관이 주석하와 우설금을 보고는 표정이 확 변했다. 엄밀하게는 우설금을 보고 난 뒤였을 것이다. 우설금의 미모가 워낙 눈에 띄다 보니.
“흠흠,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나?”
“전 주석하라는 사람입니다. 문주님을 뵙고 말씀드려야…….”
“괜찮네. 나에게 말하면 문주님께 전달할 테니.”
문주가 아니면 어떤가. 하긴 태성문 문주가 아무나 만나주지는 않을 테니 이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듯했다.
“강가보라고 아십니까?”
“알지. 이웃 마을에 있는 작은 무가일세. 강가보에서 왔나?”
“강가보 강역 총관을 아십니까?”
“강역이라…… 몇 번 보긴 했네만.”
태성문 총관은 대수롭지 않은 듯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그 강역 총관이 어제 살해됐습니다. 흉수는 북혈각이고요. 현재 강가보가 위험하다고 태성문에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열심히 설명하는 주석하와 달리 태성문 총관은 듣는 듯 마는 듯했다.
“강가보도 같은 정파죠?”
“그렇네만.”
“그럼 어서 도우러 가셔야…….”
다급하게 요구하는 주석하를 향해 태성문 총관이 눈을 찌푸렸다. 주석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많이 거슬렸다.
“이보게, 자네 강가보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
갑자기 대답할 말이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성문 총관이 비웃음을 지었다.
“우리 태성문은 이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큰 명문 정파네. 인근의 작은 문파와 무관 등이 우리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 그렇다 보니 도움을 수시로 요청하는 곳이 많아. 강가보도 그런 곳이고. 지금만 해도…… 무려 여섯 곳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강가보는 일곱 번째네.”
“……지금 심각하다고…….”
“북혈각이 그래도 그렇게 나쁜 놈들이 아니야. 이곳에서 먹고 살겠다고 우리 눈치를 본지 오래되었거든. 북혈각 쪽은 우리가 다시 확인해보겠네. 이만하면 우리도 인심 많이 써주는 걸세.”주석하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정파는 정파끼리 똘똘 뭉치지 않았었나? 적어도 덕양에 있는 정파는 그랬던 것 같은데? 나름대로 협의와 정의를 외치며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었는데 이곳 태성문은 영 반응이 달랐다.
태성문 총관은 얼른 나가보라며 손을 휘휘 저였다.
우설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갑자기 그녀 주위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내버려 두었다가는 사고 칠 것 같아서 주석하는 재빨리 그녀를 끌고 일어났다.
“갑시다.”
있어 봐야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주석하는 객청을 나왔다. 우설금이 멈칫거리면서 그를 뒤따랐다.
뒤에서 총관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사는 하고 가게. 그게 신상에 도움이 될 거야.”
욕이 치밀어 올랐으나 주석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하룻밤 잘 자고 갑니다.”
**
태성문을 나올 때는 내심 욕하며 바로 북해빙궁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고 나니 죽어가던 강가보 총관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평범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외면하기 쉽지 않다. 물론 그 이유로 지금까지 태성문에 들리기도 했지만.
“하아! 난 왜 이리 오지랖이 넓어서!”
“…….”
“어떻게 하죠?”
역시 괜한 것을 물었나? 우설금은 단지 그를 묵묵히 쳐다볼 뿐이다.
“그냥…… 강가보 상황이나 한번 보고 가요.”
강가보가 멀지 않다고 했으니 큰 손해는 아니다. 북해빙궁으로 직진하는 것도 좋지만 오랜 여행길에 이리저리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석하는 저잣거리를 지나며 이것저것 군것질했다. 일단 배를 채우며 강가보 위치도 물어보고.
당과 두 개를 사서 하나를 우설금에게 넘겼다.
정작 우설금은 당과를 손에 든 채 무표정이다.
어째 이 여자는 식탐도 없나? 주석하는 우설금을 쓱 훑었다. 그녀의 날씬한 몸매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설금이 미소를 보냈다.
나지막한 야산 하나를 넘으면 이웃 마을이 있고 그곳에 강가보가 있다고 했다.
강가보를 확인하면서 북혈각도 물었다. 태성문이 있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강가보는 서쪽에 있는 마을에, 북혈각은 북쪽에 있는 마을에 자리하고 있었다. 북혈각이 이 일대에서 가장 큰 흑도 문파이니 조심하라는 말도 들었다.
예상대로 강가보나 태성문은 민가에서 인심을 얻은 문파였고 북혈각은 대부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대를 약탈하고 패악을 저지르는 행동이 비적 떼와 다름없었다.
“이러니 흑도가 욕을 먹지.”
주석하는 분통을 터트렸다. 사실 정파나 사파나 강호에서 하는 행동은 큰 차이가 없다. 정파는 주로 후원을 받고 사파는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낸다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사파도 주민을 보호한다. 왜냐하면 그게 돈벌이가 되니까.
그런데 나쁜 놈들이 가끔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다. 이런 놈들은 인생 파탄자이자 사악한 살인마이지 사파 또는 흑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그런 놈들 때문에 정상적인 사파가 욕을 먹는다.
북혈각에 얽힌 소문으로 판단하면 그들은 정상적인 사파가 아니었다.
주석하와 우설금이 강가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후였다. 나지막한 산비탈을 끼고 자리한 강가보는 흑검문과 비슷한 분위기여서 주석하는 친밀감을 느꼈다.
정문으로 가려는 주석하를 우설금이 붙잡았다.
조용히 고개를 젓는 표정에서 주석하는 강가보에 변고가 있음을 알아챘다. 강가보 총관이 도망쳐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지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아직 강가보가 정상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었다.
주석하는 강가보의 담벼락을 돌아서 후원 쪽으로 향했다. 건물 내부를 살피면서 주석하는 가볍게 담을 넘었다. 우설금이 뒤를 따라서 강가보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강가보 내부는 정상이 아니었다.
강가보 곳곳에는 어제 보았던 차림새의 북혈각 인물이 진을 치고 있었고 강가보 사람들은 연무장 중앙에 무릎 꿇린 채 묶여 있었다.
“별달리 위험해 보이진 않네요.”
주석하는 건물 곳곳을 살피며 강가보를 점거한 북혈각 인원을 조사했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서른 명가량이 강가보를 활보하고 있었다.
“의외로 조용한데…….”
북혈각에서 강가보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 골치 아프지만 지금 확인한 바로는 연무장에 무릎 꿇려놓았을 뿐 특별하게 위해를 가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지금부터 강가보를 구해볼까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태성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들이 강가보를 구해주면 그것으로 해결된 것 아닌가.
주석하는 우설금과 나란히 강가보 사람들이 결박된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발견한 북혈각 무인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누구냐?”
빡!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주석하와 우설금은 무시하고 강가보 사람들의 결박을 풀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가보 사람들을 구하는 시간보다 북혈각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간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검을 들고 주석하와 우설금을 빙 둘러쌌다.
그렇다고 동요할 두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북혈각에서 뭐라 하든 말든 계속해서 강가보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이것들이 귀가 먹었나? 감히 북혈각이 하는 일에 끼어들어?”
십여 명이 둘러싼 가운데 인질의 묶인 손발을 모두 푼 주석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포위망을 노려봤다.
“대장이 누구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주목받은 사람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 칼자국이 요란하고 몸집이 뚱뚱한 것이 어제 보았던 그 우두머리와 많이 닮았다.
“네놈은…….”
“난 대 북혈각 부각주인 혈풍이다. 넌 누구냐?”
“그건 알 것 없고…… 여기가 강가보지? 여기에서 북혈각 사람이 왜 설치나?”
주석하의 빈정거림에 북혈각 사람들이 일제히 검을 겨눴다.
어제 강가보 총관을 추격하던 자들의 만행을 익히 보았고 지금 강가보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기에 주석하는 결심을 굳혔다.
“다섯을 세겠다! 강가보에서 나가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꼿꼿하게 세우며 포위한 자들을 향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