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33화 (133/273)

133화 귀군 (1)

“하나!”

“미친 새끼.”

포위한 북혈각 사람들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현재 단 두 사람을 잡고자 무려 서른 명이 모였다. 이들이 무림을 뒤흔드는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비록 북혈각이 손꼽히는 방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문파도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태성문과 자웅을 겨루면서 수십 년을 쌓아온 내력이 있다. 단 두 사람에게 벌벌 떨 그런 문파가 아니었다.

“둘!”

“이봐! 힘들게 숫자 세지 말고 그냥 공격해. 겁나냐?”

“푸하하,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지 말입니다.”

부각주 혈풍의 빈정거림에 부하들이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셋!”

“미친놈! 저놈을 쳐라!”

“오줌 지리게 만들까요?”

기다리기 귀찮았던 듯 혈풍이 검으로 주석하를 가리켰다.

주석하는 우설금과 눈빛을 교환했다. 자신이 저들을 처리하는 동안 우설금이 강가보 사람을 보호하라는 뜻이다. 그는 우설금이 어제처럼 피를 묻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더는 숫자를 셀 필요도 없었다.

도망치기는커녕 모두 그를 향해 달려들었으니까. 마치 불을 본 부나방 같은 모습에 주석하는 흑검소를 휘둘렀다.

혼군의 내력이 흑검소에 실리자마자 흑검소에서 검강이 뻗어 나왔다. 비록 호랑이를 잡는 칼로 토끼를 잡는 꼴이었으나 주석하는 개의치 않았다.

번쩍!

흑검소에서 뻗은 검강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한쪽에서 몰려드는 북혈각 사람들을 휩쓸었다.

“으아악!”

검강에는 눈이 없다. 달려드는 자들의 허리를 그대로 양단했다.

허공에 피가 튀고 두 토막 난 사람들의 덩어리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허어억!”

경시하고 달려들던 북혈각 부하에게는 갑자기 내린 날벼락이었다. 한쪽 포위망이 우르르 무너지자 다른 쪽 사람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예상치 못한 장면에 안색이 하얗게 변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넷!”

“으으으!”

북혈각 부하들이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다섯!” 순간 한 사람이 검을 던지고 정신없이 정문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었을까. 순식간에 십여 명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주석하를 포위했던 자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강가보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강가보 사람을 인질로 잡으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검을 들고 뛰어들었던 자들은 더 무시무시한 인물과 마주쳤다.

눈앞에 붉은빛이 번쩍이며 홍철산에서 강기가 뿜어졌다.

“으악!”

홍철산이 꿰뚫어버린 듯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그들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연무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으으!”

혈풍의 안색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생전 이렇게 강한 자를 본 적이 없었다. 북혈각주도 태성문주도 이만한 무위를 선보인 적이 없었다.

그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리가 놀려지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기려고 애썼다.

“네놈은 남아야지.”

주석하의 무형지기가 혈풍의 다리를 옥죄었다. 부들부들 떨던 혈풍은 결국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에 연무장이 정리됐다.

연무장에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이 연신 감사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제법 나이가 든 노인이 주석하에게 다가왔다.

“소, 소협. 고맙습니다.”

“당신은?”

“노부는 강가보 장로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는 강역 총관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아! 총관이…….”

강가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제 북혈각에서 쳐들어왔을 때 강역 총관이 포위망을 뚫고 태성문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 강가보 사람들은 어제부터 태성문에서 구원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힘든 시간을 견뎠다.

“그럼 소협은…… 태성문의?”

주석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태산처럼 믿고 있는 태성문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묵살했다.

“저는 태성문은 아니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강역 총관을 만났습니다.”

“오오, 하늘이 도왔군요.”

술렁이던 강가보 사람들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금방 주석하는 이들의 걱정을 눈치챘다.

“보주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그게…….”

북혈각에서 쳐들어왔을 때 강가보는 일방적으로 밀렸다. 원래는 이만큼 격차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맥을 추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얼마 후 보주를 비롯하여 가족과 주요 인사들이 제압됐다. 그렇다 보니 제대로 저항조차 하기 어려웠다.

“지금 보주님을 비롯한 온 가족이 북혈각에 잡혀가셨습니다.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상황을 보니 심각했다. 만일 잡혀간 인사가 모두 죽으면 사실상 강가보는 맥이 끊어지고 문을 닫아야 했다.

장로를 비롯하여 강가보 사람들이 주석하와 우설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 소협! 부디 우리 보주님을 구해주십시오!”

예상 밖으로 일이 번지자 주석하는 우설금의 의견을 물었다.

“좋을 대로 하세요. 이들을 외면하고 떠나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요?”

예상외로 우설금이 남을 걱정해 주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대상은 강가보가 아니라 주석하이겠지만 그런 감정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주석하는 여전히 꼼짝 못 하는 북혈각 부각주 혈풍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겁에 질린 혈풍이 급히 다가와 다리를 붙잡았다.

“소, 소협! 사, 살려주십시오!”

주석하는 싸늘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강가보주는 어디로 갔느냐?”

“부, 북혈각으로 갔습니다.”

“인질을 몇 사람이나 데려갔지?”

“가, 강가보 보주 가족이 모두 넷입니다. 거기에 장로 세 사람까지…… 모두 일곱입니다.”

인질이 일곱이면 적지 않은 숫자다. 그들 모두를 무사히 구출하기란 의외로 어렵다. 지금까지 접한 북혈각 사람들의 성정으로 보아 불리하면 인질에게 해를 입힐 게 뻔했다.

“소, 소협! 부디 도와주십시오!”

주석하가 망설인다고 생각했는지 장로를 비롯하여 강가보 사람 모두가 머리를 숙였다.

애초에 발을 잘못 들였나. 자꾸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들은 외면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런 식으로 엮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왕 도와주기로 했으니 끝까지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주석하가 다리를 붙잡고 있는 혈풍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지금부터 네놈이 북혈각으로 안내해라. 딴마음 품으면 죽는다.”

“소, 소협!” 혈풍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주석하는 강가보 장로를 비롯하여 서너 사람을 데리고 움직이기로 했다. 인질이 된 사람을 확인하고 상황을 판단하려면 강가보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나려 할 때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와 혈풍의 어깨에 앉았다.

혈풍이 눈치를 보자 주석하가 턱으로 지시했다.

혈풍이 조심스럽게 전서구가 가져온 양피지를 펼쳤다.

“뭐라고 적혀 있느냐?”

“그, 그게…….”

주석하는 양피지를 빼앗아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의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태성문 깊숙한 곳에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특이한 인물은 두 눈에 귀기가 어린 붉은 안광을 빛내는 자였다. 자글자글한 주름살과 늘어진 하얀 수염, 끊임없이 풍기는 기괴한 기운……. 바로 흑도팔군의 일인인 귀군이었다.

귀군의 옆에는 오색 창연한 알록달록한 장포를 걸친 뚱뚱한 중년인과 맑은 하늘을 연상시키는 연푸른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바로 북혈각주인 혈신(血神)과 태성문주인 북성무적(北聖無敵)이었다.

“지금쯤 서신이 도착했겠군?”

귀군의 눈빛이 두 사람을 매섭게 훑었다. 혈신과 북성무적이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쯤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흐흐, 그래야지. 드디어 그물에 걸려드는구나.”

귀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귀기가 전신에서 스멀스멀 뻗어 나와 두 사람을 짓눌렀다.

혈신과 북성무적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 일대를 휘어잡은 문파의 수장이다. 실제로 그들의 무공도 낮지 않았다. 비록 중원의 변방에서 놀고 있지만 중원 한복판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고 자부했었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이 비록 명성이 높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무시한 배경과 부풀림이 반영된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실제로 흑도팔군인 귀군을 만나고 완전히 사라졌다. 귀군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자였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둘을 봤나?”

“화원에 숨어서 떠나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

“어땠지?”

혈신과 북성무적은 이른 아침에 주석하와 우설금이 태성문을 떠나던 모습을 떠올렸다. 과연 뛰어나긴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못해 보였습니다. 일대일이라면……지지 않을 겁니다.”

혈신과 북성무적의 솔직한 평가였다.

“과소평가하는군. 물론 그렇다. 넘기 힘든 벽은 아니지. 예전에 나도 우연히 붙어 봤는데…… 하지만 얕잡아 보다간 큰코다친다.”

혈신과 북성무적이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그 둘을 떼어놓는 일이다. 지금 두 사람은 고민하겠지. 북혈각과 태성문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갈지. 둘이 찢어지면 우리에게 최상이다. 만일 계속 붙어 있으면 우리도 한꺼번에 친다.”귀군은 예전에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의 수모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만리안석을 탈취하고자 주석하, 우설금, 신창패존과 겨뤘던 그 싸움이다.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귀군은 이상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만리안석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보니 주석하 아니면 우설금이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주석하가 제갈세가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급히 제갈세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석하와 우설금을 발견했다. 그는 목적지를 모른 채 그 둘의 뒤를 밟았다.

귀군은 만리안석을 노리고 기회를 엿봤다. 주석하와 우설금이 함께 있으면 절대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무조건 둘을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귀군은 새롭게 음모를 꾸몄다.

북혈각과 태성문을 끌어들였다. 두 문파는 정과 사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나 그 본질은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위협하고 어르면 말을 듣게 되어 있다.

북혈각이 강가보를 노리고 있음을 안 귀군은 강가보를 먹이로 던져주었다. 강가보를 손에 넣고 싶었으나 태성문의 눈치를 봤던 북혈각은 덥석 먹이를 물었다.

대신에 태성문에는 명분과 실리를 던져줬다. 북혈각이 강가보를 흡수하면 태성문이 이를 응징하는 그림이다. 태성문은 북혈각을 제압하여 강가보를 구원했다는 명분을 얻고 배상금을 얻게 된다. 이 계획이 완수되면 이 지역에서는 태성문과 북혈각 둘만 남게 되기에 두 문파 모두 이익이었다.

이 계획을 이용해서 주석하를 이 음모에 끼워 넣었다. 역시 주석하는 도움을 청하러 간 강가보 총관을 외면하지 못하고 깊이 개입하게 됐다. 이제 인질을 활용하여 주석하와 우설금을 북혈각과 태성문 양쪽으로 떨어트리면 된다.

주석하는 귀군 자신이 직접 상대할 생각이다. 반대로 우설금에게는 자신이 키운 친위대, 천라귀영대(天羅鬼影隊)를 보낼 것이다. 천라귀영대와 북혈각, 또는 태성문의 조합이라면 그 붉은 옷의 여인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귀군이 신신당부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주석하가 북혈각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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