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귀군 (2)
북혈각은 강가보에서 북동쪽이었다.
태성문이 있는 중심 마을에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마을 일대가 북혈각 관할이었다.
지금까지 부딪힌 여러 일 때문에 주석하는 북혈각을 매우 나쁘게 평가했다. 이런 놈들 때문에 사파가 욕먹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북혈각을 처단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다만 떠나려 할 때 도착한 북혈각의 연통이 문제였다.
부각주 혈풍에게 전한 연통에는 강가보 임무를 끝내면 태성문으로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태성문? 태성문은 갑자기 왜?”
“그게…….”
혈풍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주석하가 몇 차례 눈을 부라리고 나서야 혈풍이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강가보 사건은 저희 각주님과 태성문 문주가 손을 합쳐 벌인 일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실토에 주석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이야?”
“그게…… 강가보가 그동안 눈엣가시였거든요. 그래서 북혈각이 강가보를 칠 때 태성문이 움직이지 말도록 부탁했습니다.”
주석하는 태성문 장로를 만난 일을 떠올렸다.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서 강가보를 돕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뒤로 밀약을 맺었을 줄이야.
“태성문이 얻은 이득이 뭐지?”
“강가보를 없앤 후 태성문이 북혈각과 협상하여 인질을 구해 명성을 얻기로 했습니다. 또 보상금을 일부 받고요. 명예를 중시하는 정파이다 보니 수지맞는 장사지요.”정파와 사파의 더러운 공작을 보는 듯하여 주석하는 기분이 상했다. 두 문파의 욕심에 강가보가 희생된 모양새다. 그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래서?”
“강가보의 주요 인질을 둘로 분류했을 겁니다. 살려두면 안 되는 자, 살려둬도 되는 자. 보주를 비롯하여 살려둘 수 없는 자는 북혈각으로 끌고 갔고…… 아마 죽이겠지요. 무공을 모르는 일가족은 태성문이 구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태성문으로 데려갔습니다.”
“네놈에게 태성문으로 오라는 통지는…….”
“대충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뜻 아닐까요.”
혈풍이 심각해진 주석하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슬금슬금 주석하와 우설금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흡사 얄미운 쥐새끼 같다.
주석하는 강가보, 태성문, 북혈각 세 곳을 놓고 저울질했다.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이 고생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 지어야 한다. 팔수록 더러운 냄새가 진동하니 이것들을 그냥 둘 수도 없다.
지금 강가보는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북혈각과 태성문에 잡힌 사람들은 무척 위험하다. 특히 북혈각에 잡힌 사람들의 목숨은 한시가 급하다.
그의 몸이 하나이다 보니 양쪽을 동시에 처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민하고 있자니 우설금이 제안했다.
“우리도 나누죠. 주 공자는 북혈각으로 가세요. 내가 태성문으로 갈 테니까요. 난 강가보 사람들을 보호할게요.”
양쪽으로 찢어지자는 뜻이다.
지금으로선 최선의 책략이다. 다만…….
‘우 소저가 걱정되는데…….’
주석하는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최강고수인 우설금의 안위가? 그럴 리가 있나. 태성문이 걱정되어서다. 우설금의 무자비한 성정을 고려하면, 태성문이 자칫 우설금을 잘못 건드리면 어마어마한 파문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가 옆에 붙어야 우설금을 제어할 수 있을 텐데…….
“그래요. 어쩔 수 없네요. 무리하지 말고 애들만은 잘 보호해줘요.”
큰 요구는 하지 않았다. 애들을 보호하라면 적당히 자중하겠지.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당부하고는 강가보 장로를 딸려 보냈다.
그는 혈풍을 데리고 북혈각으로 향했다. 혈풍의 입가에 살짝 어린 비웃음을 그는 보지 못했다.
**
놀랍게도 북혈각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연무장에는 북혈각 제자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단상 위에도 몇몇 인물들이 그를 맞이하려고 대기 중이었다.
“여기냐?”
주석하는 찜찜한 표정으로 혈풍에게 물었다. 어째 혈풍의 안색이 상당히 밝다. 하긴 강아지도 집에 돌아오면 좋아하긴 하지.
“여기가 대 북혈각입니다.”
“그놈의 ‘대’소리 좀 뺄 수 없나?”
“문파가 큰데 어쩝니까?”
“크기는 개뿔…….”
휘휘 둘러보니 대충 적혈방 정도 되려나? 혼천교를 가봤으면 입도 다물지 못할 놈이.
연무장에 들어서자 옆에서 개처럼 잘 따라오던 혈풍이 순식간에 도망쳤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 신경 쓰지 않고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주석하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나지막이 신음을 토해냈다.
멀리서 봐도 그 기운과 생김새 덕분에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붉은 주름진 얼굴에 귀기를 뭉클 풍기는 노인, 바로 귀군이었다.
‘저놈이 왜 여기 있지?’
뭔가 왕창 엉킨 느낌이다. 본능적으로 음모에 빠졌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쨌든 상관없나? 피라미에게는 그물이 통해도 고래에게는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귀군은 만리안석을 뺏으려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망쳤었는데 아직도 만리안석에 집착 중인가? 그에게 만리안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었다.
귀군의 옆에 부곡주와 비슷하게 생긴 놈이 보였다. 중년에 뚱뚱한 몸집, 그리고 도수만큼 중구난방으로 생긴 얼굴, 거기에 울긋불긋한 옷차림까지. 손쉽게 북혈각주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옆으로 북혈각 주요 인물로 보이는 몇 명이 흉흉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상 바로 아래에 강가보주와 장로로 보이는 네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잡혀갔다는 강가보 사람은 모두 일곱. 그렇다면 여기 없는 셋은 강가보주 가족으로 태성문에서 데려갔다는 뜻이다.
“흐흐, 왔느냐?”
옥좌에 앉아 있던 귀군이 벌떡 일어나 천천히 연무장으로 내려왔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꽉 손에 쥐며 기분 나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지?”
“그 물건을 내놓아라.”
“물건? 그게 뭐지?”
“그때 거기에서 가져간 것 말이다.”
귀군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가 만리안석을 가져갔다는 주장도 넘겨짚은 것일 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원래 당신의 근거지가 여기냐?”
“그럴 리가 있나? 네 녀석을 따라다니면서 함정을 팠다. 흐흐, 운 좋게도 네놈이 딱 걸리더군.”
“태성문까지?”
“그렇다. 이놈들을 압박해서 일을 꾸몄지. 지금쯤 태성문으로 간 그 홍의녀도 곤욕을 치르고 있겠지.”
주석하는 피식 비웃음을 터트렸다. 우설금을 곤란에 빠지게 하려면 적어도 귀군이 두세 명은 있어야 한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음모가 귀군이 만리안석을 뺏으려고 벌인 일 아닌가. 강가보는 그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그가 강가보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강가보에 피해를 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주석하는 단상 아래에 묶여 있는 강가보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이제는 확실하게 강가보를 구해야 할 신념이 생겼다.
“오오! 나를 잡으려고 이런 계책까지. 이렇게 영광스러울 때가…….”
“흐흐, 얼른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후회할 자는 바로 당신이야!” 주석하는 발을 힘껏 박차고 앞으로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시간을 끌어봐야 유리할 게 없다. 이럴 때는 속전속결이 최선이다.
흑검서생 주석하와 흑도팔군의 일인인 귀군의 역사적인 대결이 시작됐다.
**
강가보 장로와 우설금은 손쉽게 태성문에 들어갔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달리 태성문에서는 문주가 직접 우설금을 맞이했다.
태성문주 북성무적은 연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설금을 대청에서 만났다.
강가보 장로는 정중하게 문주에게 허리를 숙였고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북성무적을 노려봤다.
우설금의 남다른 미모에 넋이 나간 북성무적은 차를 대접했다.
“소저는…… 뉘시오?”
“강가보 사람들이 이곳에 있나요?”
우설금은 자신을 소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북성무적은 안면을 찌푸렸으나 재차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말했다.
“강가보 사람들이 왜 여기 있습니까?”
“있다고 들었는데요?”
“헛소문입니다.”
딱 잘라 말하는 북성무적을 보며 우설금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북성무적은 우설금의 무공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귀군에게 조심하라는 언질을 수차례 들었다. 직접 본 우설금은 위험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티가 나긴 했으나 고수라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저렇게 곱상한 얼굴이라니. 이런 여인의 무공이 뛰어날 리가 없다.
사실 북성무적은 계산을 잘못해도 상관없었다. 태성문은 그리 약하지 않다. 설사 이 여인의 무공이 엄청나다고 해도 태성문이 나서서 해결 못 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또 이곳에는 귀군이 남겨둔 천라귀영대가 숨어 있다. 천라귀영대라면 흑도팔군이 직접 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다고 들었다.
“소저, 잘못 알고 오셨습니다.”
“정말 없나요?”
우설금의 서늘한 눈빛이 북성무적을 압박했다.
순간 북성무적은 가슴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어린 여자에게 위축되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분노가 치밀었다.
‘이년이 아직 세상의 험난함을 모르는구나!’
우설금의 옆에 있던 강가보 장로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태성문 문주님, 부디 강가보를 살려주십시오. 보주님이나 가족분이 돌아가시면 저희 강가보는 끝장입니다. 태성문은 명문정파 아닙니까?”
장로의 하소연은 무뚝뚝한 우설금과 비교됐다.
북성무적은 귀군의 명령을 떠올렸다. 절대 우설금을 놓아주면 안 된다. 죽여도 상관없고. 그런데 우설금을 보고 있자니 그 미모가 탐이 난다. 죽일 때는 죽이더라도…….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도 현재는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인질을 잡은 것도 아니고…….”
“내부를 살펴봐도 될까요?”
우설금이 북성무적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북성무적은 알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으나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했다.
“그렇게 못 믿으신다니…… 좋을 대로 하시지요. 어디를 둘러보시겠습니까?”
태성문은 넓다. 잠시 뒤진다고 절대 찾을 수 없기에 북성무적은 자신만만하게 치고 나갔다.
우설금이 벌떡 일어나 대청을 나섰다. 영문을 모른 장로가 따라가고 북성무적은 눈을 찌푸리며 급히 부하에게 눈짓했다.
밖으로 나온 우설금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후원을 건너 별채 쪽으로 향했다.
어째 방향이 이상했다.
‘설마? 아니겠지.’
북성무적은 내심 기겁했다. 우설금이 향하는 쪽이 강가보 가족을 감금해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설금은 별채를 지나 허름한 창고 앞에 도착했다.
“여기를 뒤져보고 싶습니다만.”
‘족집게의 현신이냐?’ 말문이 막힌 북성무적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미소를 잃지 않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하하, 소저의 용기가 놀랍습니다. 직접 뒤져보시지요. 우리 태성문은 숨길 게 없으니까요.”
북성무적의 손짓에 부하가 창고에 채워진 커다란 걸쇠를 풀었다.
우설금의 눈짓에 장로가 재빨리 창고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듯 창고 내부에서 습한 기운이 풍겼다. 창이 없는 곳이라 내부는 매우 어두웠다.
장로가 어떻게 할지 우설금을 바라보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로도 허겁지겁 뒤를 따라갔다.
사방을 쭉 훑어보던 우설금은 창고 안쪽을 살폈다. 창고 내부에는 각종 버려진 건자재와 농기구 등이 쌓여 어지러웠다.
거의 끝까지 들어간 우설금이 장로에게 물었다.
“맞나요?”
창고 구석에 세 사람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중년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과 열 살가량 된 여자아이에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세 사람을 발견한 장로가 허겁지겁 그들을 끌어안았다.
“가, 가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