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귀군 (3)
과연 강가보 보주 가족이 맞았다. 우설금은 한동안 보주 부인과 장로의 해후를 지켜봤다.
그녀의 붉은 치마를 끌어당기는 녀석이 있었다. 결박이 풀린 아이가 그녀의 치마를 잡고 흔들었다.
“누나는 누구야?”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아이를 내려다봤다.
“아, 죄송해요. 동생이 아직 버릇이 없어서……. 전 강연연이고 얘는 강율요. 이분은 제 어머니이시고요.”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열심히 소개하며 인사했다.
우설금은 별 관심이 없었기에 고개만 까닥였다. 그녀의 무표정에 여자아이가 실망한 듯 풀이 죽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은공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보주 부인 또한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당연히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주석하의 당부만 기억하고 있었다. 애들만은 잘 보호하라고. 사실 그녀는 강가보가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감사를 표하던 보주 부인도 우설금이 정체를 밝히기 싫어한다는 점을 눈치채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다만 그녀의 치마를 붙잡고 흔드는 남자아이, 강율만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누나, 누나는 누구야?”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율의 손에서 치맛자락을 빼냈다.
쿵!
그때 창고의 문이 세차게 닫히고 걸쇠가 걸리는 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창고 내부가 어둑어둑해졌다.
장로가 급하게 문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문을 밀었다. 걸쇠가 걸린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우렁찬 경고가 들려왔다.
“흐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잠시 네놈들을 가두어 놓겠다. 소란 피우지 말거라!”
북성무적의 목소리였다.
“일이 끝나면 풀어주겠다. 물론 붉은 옷을 입은 네년은 쉽게 놓아줄 수 없다. 태성문에 들어왔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우설금을 제외하고 장로와 보주 가족까지 모두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아, 이를 어째요? 우리 때문에…….”
보주 부인이 연신 미안해했고 장로는 허탈한 표정으로 우설금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그들을 구하러 온 여인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으니 미안했다.
주변의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강율이 다시 우설금의 치마를 붙잡고 흔들었다.
“누나, 누나!” 우설금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추고 강율과 눈을 마주쳤다.
“왜?”
“나, 무서워.”
잠시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컴컴해졌으니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녀는 차마 아이를 떼 낼 수 없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빠도 없는데?”
“내가 곧 꺼내줄게.” 우설금은 차분하게 아이를 달랬다. 강율의 옆에 있던 여자아이, 강연연이 끼어들었다.
“율아, 언니를 괴롭히면 안 돼.”
“누나가 꺼내준다는데?”
“으응.”
강연연은 슬픈 표정으로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열 살인 강연연은 이 창고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로와 이 언니가 왜 위험을 자초했는지 모르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강율이 재차 우설금의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누나, 나…… 나갈 수 있는 거지? 나, 무서워.”
“그래.”
우설금은 강율의 머리를 더듬었다.
한결 안정된 강율이 여전히 그녀의 치맛자락을 놓지 못하고 말했다.
“누나, 나 배고파.”
창고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이들은 이곳에 갇힌 후 계속 굶었다.
우설금은 품을 뒤져 지니고 다니던 육포를 꺼냈다.
“이거 먹을래?”
고개를 끄덕이던 강율이 육포를 조금 베어 물고는 환하게 웃었다.
옆에서 강연연이 감사를 표했다.
“언니, 미안해요.”
“괜찮아.”
우설금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주석하를 제외하고 타인에게 미소를 처음 보냈다.
강율과 강연연을 차분히 살피던 우설금이 몸을 일으켰다.
보주 부인이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소저, 정말 고마워요. 어떻게 보답할 길이 없지만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은혜랄 게 있나요. 이제 나갈 준비 하세요.”
우설금의 시선이 창고 천장을 향했다.
**
북혈각주 혈신은 주석하와 귀군의 대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처음 귀군을 만났을 때 그는 귀군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군을 만난 직후 그 의심이 팍 줄었다. 귀군은 자신보다 한참 위의 존재였다. 그는 귀군의 무공을 측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두말없이 귀군에게 복종했다. 게다가 눈엣가시인 강가보를 제거할 기회를 얻게 됐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강가보는 항상 태성문에 붙어 북혈각을 적대시했으니까.
이 순간 혈신은 귀군을 찾아온 주석하를 관찰했다.
아직 어린놈이었다. 얼핏 보기에 무공도 변변치 않아 보였다. 기껏 저런 녀석을 해치우려고 북혈각 전체에 비상을 걸고 대기했다는 사실이 쪽팔렸다. 저런 녀석을 견제하는 귀군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북혈각이 손해 볼 일은 없으니 혈신은 인내심을 가지고 둘의 공방을 지켜보기로 했다.
불과 몇 합이 흐르자마자 혈신은 경악했다.
“헉! 무슨 무공이…….”
귀기(鬼氣)를 외부로 발산하는 귀군의 무공에 그는 혼비백산했다. 귀군의 몸에서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은 뭔가 이상했다. 그 기운에 스치는 순간 혈신은 이상하게도 내력을 운용하기 어려워졌으니까. 귀군의 귀기에 이상한 효능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주석하가 몇 초식 견디지 못하고 패배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귀군을 향해 돌진한 주석하가 이상한 막대기를 두어 번 휘두르더니 갑자기 몸에서 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 기운은 주위를 불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허억! 이건 또 무슨 무공이야?”
마치 새로운 무공에 눈을 뜬 신참처럼 혈신은 화들짝 놀랐다.
천지를 울리는 폭음 속에 그 둘이 강렬하게 부딪쳤다. 귀군의 귀기와 주석하의 뜨거운 기운이 엉키면서 주변으로 충격파를 쏟아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강력한 충격에 혈신은 후들후들 몸이 떨렸다.
“이, 이게 사람이냐?”
혈신은 흑도팔군의 무공 수준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콰아앙!
두 기운이 충돌하고 그 충격파가 사방을 휘몰아쳤다. 소용돌이가 일며 장내에 태풍이 불었다.
“허억!”
심상찮은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던 혈신은 넋이 나갔다. 전각에 불이 붙었다. 갑자기 전각 곳곳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석하가 염군의 극양염천신공을 쏟아낸 때문이었다.
빨리 불을 꺼야 하는데 눈앞에서 천하를 쪼갤 듯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아무도 꼼짝하지 못했다.
모두 주석하와 귀군의 대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콰아앙!
재차 충격파가 터져나가면서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오를 때보다 더 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다시 귀군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공방은 혈신이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전광석화였다.
점점 두 사람의 신형이 붉은 기운으로 덮였다. 비록 두 기운의 성질은 판이했으나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였기에 혈신은 우열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만일 귀군이 패배한다면…… 북혈각은 끝장이다.’
귀군과 주석하의 무공이 아득히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혈신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주석하는 강가보를 구하러 왔을 테니 귀군의 패배는 북혈각에게 재앙이었다. 그는 귀군의 음모에 동참한 것을 후회했다.
귀신처럼 음산하게 일렁이는 귀군의 귀기와 이에 맞서 강렬하게 폭사하는 주석하의 뜨거운 열기를 보면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악마다…….”
이들의 무공은 천외천의 경지였다. 혈신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귀군의 무공은 특이하다.
그의 귀기는 상대의 내력 운용을 방해한다. 그와 싸우는 자들은 내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면 내력이 마비되는 증상을 느끼면서 제대로 무공을 사용하지 못했다.
예전에 만리안석을 놓고 공방을 벌였을 때 귀군은 비슷한 방법을 쓰려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때는 붉은 옷의 여인이 눈치를 채고 재빨리 대응하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오늘 주석하는 귀기를 향해 오히려 적의를 드러내며 돌진하고 있으니 귀군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귀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한심한 놈! 이런 식의 대결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
귀군은 승리를 손에 잡은 듯 자만했다.
마침 주석하가 호신강기를 뿌리며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녀석의 기운은 모든 것을 불태울 듯 뜨겁지만 잠시만 참으면 그만이다. 귀기에 휩싸이면 내력 운용이 중지될 테니까.
일순간 주석하의 신형이 귀기를 깨고 호신강기를 파괴했다. 귀군은 두 손으로 주석하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뒤엉켰다.
콰아앙-
강기가 서로 부딪치며 충격파가 일었으나 귀군은 공세를 거두지 않았다. 귀군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귀기를 강화하고 상대를 잡아챘다.
주석하도 반발하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에 순응하듯 몸을 밀착시켰다.
“네놈은 끝이다!”
귀군은 득의의 함성을 토해내며 귀기를 주석하에게 밀어 넣었다. 상대는 곧 내력 운용이 어려워질 것이다. 마치 내공 싸움이 벌어진 것과 동일한 양상이 펼쳐졌다.
푸스스스-
귀군이 일으키는 붉은 기운과 주석하의 뜨거운 기운이 서로 만나며 소용돌이쳤다.
사방으로 불꽃이 튕겨 나가 불길이 전각 곳곳으로 번졌다. 불바다가 따로 없었다.
주석하는 염군의 내력이 귀기의 영향을 받아 일순간 흩어지는 경험을 했다. 역시 예상대로 귀기는 사이한 무공이었고 쉽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과연 흑도팔군이라면 숨은 절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술수만으로 주석하를 누를 수 없다.
염군의 내력이 귀기에 막히는 순간 주석하는 다른 기운을 불렀다. 악군의 내력이 전신을 일주천하면서 염군의 내력을 붙잡고 있는 귀기를 몰아냈다.
순간 기이한 느낌을 감지한 귀군의 눈동자에 의문이 일었다. 내공을 옥죄었는데 다른 내공이 밀려오다니! 하지만 귀군의 반응은 너무 늦었다.
주석하는 악군의 내력을 양손에 불어넣으면서 힘껏 상대를 압박했다.
고오오오-
무지막지한 압력이 귀군을 억눌렀다. 마치 태산이 무너진 것처럼 거대한 기운이 양어깨를 짓눌렀다. 귀군은 염군의 내력을 제압하고자 귀기에 온 힘을 기울이던 순간이라 악군의 내력에는 속수무책이 됐다.
상대방의 내력을 마비시키고 내력 운용을 분명히 방해했는데 어떻게 상대가 여전히 내력으로 압박할 수 있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으으으!”
쿠르르- 무지막지한 압력을 버티면서 귀군의 발아래 지면이 서서히 함몰하기 시작했다. 연무장 바닥에는 두꺼운 청석판이 깔려있었다. 그 청석판에 족인이 깊숙이 패더니 급기야 청석판이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콰지직-
귀군의 다리가 연무장 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도 위에서 짓누르는 압력이 더욱 커졌다. 어쩔 수 없이 귀군은 귀기를 거두고 순수 내공만으로 압력에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귀기가 거두어지는 순간 이에 반발한 주석하의 뜨거운 불꽃이 귀군을 휘감았다. 마치 불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귀군은 열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으악! 살려줘!”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귀군은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저항하면서 주석하에게 처량한 눈빛을 보냈다.
당연히 주석하는 상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극양염천신공으로 더욱 강하게 상대를 짓눌렀다.
콰지직-
다시 바닥이 꺼지면서 귀군은 허리까지 바닥에 박혔다. 동시에 귀군의 몸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태산을 방불케 하는 압력에 귀군은 꼼짝할 수 없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귀군의 몸이 숯덩이로 변했다. 무림을 종횡하던 흑도팔군 일인의 처절한 종말이었다.
사람들이 넋이 나가 있을 때 뜨거운 불꽃을 뿜으며 주석하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혈신이 대체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