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36화 (136/273)

136화 귀군 (4)

순간 혈신은 상황을 파악했다.

귀군의 패배는 그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가 목격한 주석하의 무공은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까마득히 높았다. 절대 함부로 덤빌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으나 이곳이 자신의 본거지이다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살 방법은 무엇인가.

혈신의 눈이 인질로 잡아둔 강가보 사람을 향했다.

‘저놈이 강가보 사람을 구하러 온 거니까…….’

강가보 사람을 위협하면 어떻게든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혈신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강가보 보주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화염에 휩싸여 뜨거운 기운을 줄줄이 뿌리던 주석하의 시선이 혈신을 향했다.

“머, 멈춰라! 이, 이놈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든가.”

주석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불꽃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허억!”

혈신은 그 광경에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인가 화마인가.

‘강가보 사람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나?’

혈신은 인질의 목에 검을 더 가까이 대고 더 큰소리로 외쳤다.

“이, 이놈들을 죽여 버리겠다!”

주석하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옆에서 달려들던 부하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불타는 전각에 처박혔다. 상식을 벗어난 무공에 공포가 엄습했다.

“난 네놈의 목이 필요해! 강가보? 필요 없어!”

“가, 강가보를 구하러 온 게…….”

“강가보가 뭔데?”

순간 혈신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생각해보니 주석하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한 번도 강가보를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오자마자 귀군과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싸움이 붙었다.

강가보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저놈을 피하지? 혈신의 머릿속은 생각이 멈췄다. 평소라면 주석하와 강가보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짐작했겠지만 당황한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저, 저놈을 쳐라!”

옆에서 검을 들고 대기하던 부하들이 움찔거렸다. 불에 활활 타오르는 주석하는 인간이 아니어서 도무지 덤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석하가 손을 휙 휘두르는 순간 주변의 전각으로 불이 번지고 이제는 화원까지 불바다가 됐다. 게다가 포위했던 부하들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걷잡을 수 없는 대참사가 발발했다.

“으아악!”

부하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주석하는 혈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혈신은 강가보주에게 댔던 검을 들어 주석하를 막으려 했다.

콰앙!

흑검소에 맞아 혈신의 검이 뚝 부러졌다.

“허억!”

손이 허전해졌다고 느낀 순간 혈신의 가슴에 화끈한 충격이 일었다.

흑검소 앞으로 쭉 뻗은 검강이 혈신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사방으로 피와 육편이 튀고 혈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혈신 옆에서 진을 치던 북혈각 간부들이 미처 놀랄 틈도 없이 주석하의 흑검소가 다시 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서걱-

피의 제전이 시작됐다. 아니 화마의 제전인가.

주석하는 귀군에게 동조하여 잇속을 챙기려 한 북혈각을 단숨에 초토화했다. 북혈각이 건재하면 다시 강가보에 해를 끼칠 테니까.

**

창고에 우설금을 감금한 북성무적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미모의 여인 모습이 눈앞을 어른거린다. 북성무적은 여자를 탐하는 자는 아니었다. 태성문주라는 배경 때문에 꽤 많은 여자가 꼬였고 오는 여자를 막지 않았을 뿐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든 여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미녀를 만났다. 전설의 서시나 왕소군도 이 여자의 미모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가히 천상의 선녀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가 평가한 우설금의 무공은 별것 아니었다. 귀군이 신신당부했다고 하지만 단지 의례적인 경고라 여겼다. 태성문이 변방에 자리 잡아 평가절하 당했다고 믿었기에 그는 한낱 아녀자에 불과한 우설금은 강해 봐야 자신과 동급이라 여겼다.

그러니 우설금의 무공이 두려울 리 없었다. 그녀의 미모가 아니었다면 보자마자 그녀를 죽여 이 사태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내 평생 최고의 여인을…… 그냥 죽일 수는 없지.”

욕심을 부리며 중얼거리던 북성무적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창고를 반드시 지켜라. 아무도 내보내서는 안 돼.”

태성문은 나름 큰 문파라 문하 제자도 많다. 그 많은 제자 절반을 창고 부근에 배치했다. 그녀의 미모라면 이런 정성 어린 수고는 당연한 일이다.

완벽하게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생각한 북성무적은 부하들 틈 사이에 섞여 있는 천라귀영대를 확인했다. 모두 열둘. 사이한 기운을 뿌리는 저들은 무공을 추측하기 쉽지 않다. 태성문 장로급도 비교하기 어려울 강자들이다.

“이 정도면…… 나라도 못 빠져나와. 귀군도 마찬가지. 정파십존 서넛이 달려들어도 쉽지 않지.”

흐뭇한 표정으로 북성무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그 붉은 옷의 여인을 붙잡아 흥정할 생각이었다. 강가보 가족을 살려주는 대신에 하룻밤 시중을 들라고 하면 그녀도 어쩔 수 없이 굴복할 것이다. 어차피 가족의 목숨은 계획대로 처리한다. 그녀의 수락과 상관없이. 하룻밤을 보낸 후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태도에 따라 계속 데리고 있든가 아니면 죽이든가 결정할 것이다.

나름 괜찮은 작전이라 생각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귀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얼이 빠진 채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창고의 지붕이 와장창 깨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북성무적은 눈을 깜박일 수 없었다.

창고의 지붕을 뚫고 올라와 거만한 자태로 서 있는 여인. 한 손에 홍철산을 들고 천하를 오시하는 우설금이었다. 햇빛에 그녀의 외모가 빛을 발해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북성무적은 그녀의 뜻하지 않은 무공에 감탄해야 할지 그녀의 화려한 미모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일순간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지붕 위에서 우설금이 홍철산을 휘둘렀다.

푸아악-

홍철산에서 뻗어 나온 붉은 강기의 파편이 포위한 자들을 덮쳤다.

“으아악!”

대부분 영문을 모르고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목이 잘렸다. 여인의 무공은 상상 초월이었다.

“으으, 잔인한 년!”

북성무적이 기댈 곳은 귀군과 함께 왔던 천라귀영대뿐이었다. 역시 천라귀영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재빨리 창고 지붕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열두 명의 천라귀영대가 귀기를 발하며 팔방에서 우설금을 공격했다.

홍철산이 펼쳐지고 모란꽃이 춤을 추었다. 천라귀영대가 방출한 귀기가 홍철산에 가로막혀 연기처럼 사라졌다.

천라귀영대가 당황한 순간 우설금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포위망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녀를 막아서는 천라귀영대의 눈앞을 홍철산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시뻘건 피가 허공에 뿜어졌다.

예상과 달리 너무 쉽게 천라귀영대 한 사람이 목숨을 잃자 남은 천라귀영대도 당황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천라귀영대가 펼친 천라지망은 정파십존이라 하더라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우설금은 천라지망이 막 완성되기 직전의 빈틈을 공략하여 포위망을 바로 무너트렸다. 열둘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위력이 발휘되는 진법의 특성 때문에 천라귀영대는 혼란에 빠졌다.

푸아악-

홍철산이 허공을 가르고 여지없이 모란꽃 잔영이 허공에 날리는 가운데 피 분수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사실상 천라귀영대의 포위망은 흔적도 없이 무너졌다.

북성무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홍철산을 휘두르며 모란꽃을 흩날리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녀가 지나간 곳에는 여지없이 피투성이가 된 시신이 널렸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이 아니야! 지옥의 아수라다!”

북성무적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방법은, 태성문을 지킬 방법은 무조건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길뿐이다. 천라귀영대가 어이없게 궤멸하는 순간 그는 우설금이 감히 맞설 상대가 아니라 판단했다.

“제, 제발!”

북성무적은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우설금이 홍철산을 나부끼며 천천히 다가왔다.

북성무적은 홍의 여인이 피의 제전을 끝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콰앙!

우설금이 휘두른 홍철산에 전각이 통째로 무너졌다. 말이 안 되는 위력에 북성무적이 입을 쩍 벌리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귀를 가득 채웠다.

“으아아악!”

창고 주변에 대기하던 태성문 문도들이 마구잡이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 죽음도 처참했다. 홍철산의 강기가 몸을 가르면서 목이든 허리든 팔다리든 가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

저 여자는 상대가 항복하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음을 그때야 깨달았다. 항복하면 당연히 협상하고 목숨이라도 건질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처절한 비명이 천지를 메웠다. 피비린내가 사방을 덮었다.

도망치는 자들에게까지 붉은 강기의 파편이 폭탄처럼 뿌려지며 목숨을 빼앗았다.

시산혈해!

북성무적의 눈에 우설금은 이미 살인마를 넘어선 잔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북성무적의 머릿속은 하얗게 정지되었고 몸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태성문도가 죽어 나가고 전각이 계속 무너졌건만 북성무적은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북성무적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을 감았다. 평생 이끌었던 태성문이 저 여자 하나 때문에 풍비박산 나고 있었다.

지옥의 비명이 잦아들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북성무적은 눈을 의심했다.

태성문을 구성했던 우람한 전각들이, 아름다운 화원이 잿더미처럼 지워져 있었다.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전각만이 아니었다. 그 많던 태성문도 또한 모두 시체로 변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손에 쥔 홍철산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북성무적은 그제야 우설금의 몸을 감싼 붉은 기운을 제대로 감지했다.

불길한 기운을 뿜으며 일렁거리는 저 기운은 강렬한 마기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죽음의 기운이었다.

“너…… 넌…… 마…….”

북성무적의 목소리는 이어질 수 없었다.

우설금이 홍철산의 핏물을 털어내려고 한 바퀴 빙글빙글 돌리는 순간 날카로운 강기가 북성무적의 몸을 갈랐다.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북성무적은 피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몸 곳곳에 강기의 파편이 박히면서 육신이 찢겨나갔다. 시체마저 온전히 건질 수 없는 비참한 최후였다.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태성문을 쓸어버리는 동안 우설금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전멸! 태성문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더는 움직이는 생명체가 없음을 확인한 후 우설금이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홍철산을 가볍게 휘젓자 창고 문에 걸려있던 걸쇠가 싹둑 잘려나갔다. 문이 열리고 밝은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강가보 가족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외부의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창고 안에서 외부의 비명만 들었기에 힘든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고 혼자인 우설금을 염려하고 걱정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드러난 장면은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잿더미가 된 폐허 속에, 밝은 햇빛 아래 우설금의 붉은 옷만 보였으니까.

“누, 누나? 여기 어디야?”

강율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우설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기다리면…… 아버지께서 오실 거야.”

“정말? 나쁜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어려서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강율은 기쁜 표정으로 방방 뛰었다.

정작 보주 부인과 강연연은 지옥도를 보고 겁에 질려 입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강가보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우설금이 강하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무위는 예상 밖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았기에 그녀를 인간이라 여겼지 만일 그 장면을 보았다면 인간이 아닌 마신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때였다.

“우 소저!”

주석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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