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북해빙궁 (1)
태성문에 들어선 주석하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어제 들렀던 태성문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위풍당당하던 전각도, 곳곳에 경계를 서던 무사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황량한 폐허로 변한 황무지뿐. 적어도 백 년 이상 버려진 장원이라고 착각할 분위기였다.
그도 북혈각을 잔혹하게 잿더미로 만들긴 했다. 그래도 이곳의 참상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십 보 백 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우설금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마교의 마교수호사령을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과 비교하는 실수를 저지른 걸까. 눈 깜짝하지 않고 혈겁을 일으키는 마교의 생리를 간과했던 걸까.
예전에도 우설금이 벌였던 사건을 보았기에 그녀를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성문 혈겁을 본 순간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도 문파를 박살 낼 수 있는 거구나.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고.’
물론 태성문이든 북혈각이든 살려두면 훗날 강가보에 보복할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우설금이 깔끔하게 처리한다고 하여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왔어요?”
우설금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피바다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그 모습이 너무 선명하여 주석하는 당황했다.
“강가보는?”
우설금이 대답 대신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강가보 가족의 상봉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설금은 분명히 보주 가족을 보호하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주석하는 그 장면에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귀군이 음모를 꾸미지 않았을 테니 저 가족도 위험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일어난 발단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게 강가보에 피해가 돌아갔다. 물론 북혈각이나 태성문은 귀군에게 협박을 받아서라기보다 욕심을 부리다가 망가진 경우지만.
한동안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모르던 강가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주석하와 우설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강율이 우설금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렸고 강연연도 마치 우설금을 언니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주석하는 그 모습에서 조금은 이질감을 느꼈다.
이곳을 피바다로 만든 마교의 인물이 어린아이들과 다정하게 어울리는 장면이 왠지 낯설었다. 지금 우설금의 모습에서 누가 살인귀를 연상할 수 있을까.
‘어느 게 진짜 모습인지.’
지금의 밝은 그녀가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살인을 저지르는 싸늘한 분위기도 절대 가식이 아니었다. 우설금을 웬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할수록 더 모르겠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주석하는 우설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가보주 부인이 그에게 다가와서 인사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저가 참 예쁘네요. 언제쯤 혼인하실 건가요?”
뜻밖의 질문에 주석하는 얼굴을 붉혔다.
시산혈해 한중간에서 할 말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주석하는 미소로 답했다.
우설금과 혼인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지금처럼 아이들과 환하게 웃는 우설금이라면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평소의 그녀는…… 아니 가끔 드러나는 난폭한 그녀는…….
우설금이 지금까지 지내온 생활 환경이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십만대산에서 천마는 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마교수호사령. 모두 넷으로 이루어진 수호사령은 지금 중원으로 나간 단천마령을 제외하고 나머지 셋이 모여 있었다.
금천마령(金天魔靈), 은천마령(銀天魔靈), 묵천마령(墨天魔靈).
천마를 제외하면 마교의 최상위에 자리한 이들은 실질적으로 마교를 지배했다. 그들은 모두 괴이한 마기를 뿜어내며 천마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귀군이 죽었다고 합니다.”
“단천마령이 해치운 건가?”
“아닙니다. 단천마령과 함께 다니는 주석하가 해치웠습니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들어 주석하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강호의 큰 변화 중심에 주석하가 있었다.
주석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천마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몇 차례 회귀를 반복했지만, 세월의 흐름이 이처럼 많이 달라진 것은 처음이다. 무한회귀공을 익힌 이후로 역사의 흐름을 오직 그만이 좌우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이번 회귀에서는 주석하가 자꾸 중심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놈 역시 회귀자이기 때문인가.
묵천마령이 재빨리 덧붙였다.
“단천마령은……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 중입니다.”
“그렇긴 하지.”
천마는 우설금을 중원으로 보낼 때 내린 임무를 떠올렸다. 중원에서 정파와 사파의 균형을 맞추면서 그 세력을 약화하고 주석하를 잘 감시하라는 두 임무였다.
우설금은 제갈세가에 직접 개입해서 정파십존 가운데 셋을 제거했고 무게추가 사파로 기우는 기미가 보이자 이번에는 귀군을 없앴다. 그 과정을 우설금이 계획했는지 아니면 적들이 스스로 헛발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좋다면 좋은 거니까.
“현재 세력 분포가 어떻게 되지?”
“정파십존은 여섯이 남았습니다. 흑도팔군은 다섯입니다. 사실상 그 힘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정파이든 사파이든.”
금천마령이 대표로 대답했다. 금천마령의 주위에는 금빛의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실로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다.
“어느 쪽도 이제 우리가 마교칠왕을 앞세우면 막지 못합니다. 드디어 마교 천하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은천마령이 흥분해서 의견을 개진했다.
천마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의 견해가 틀리지 않는다. 다만 천마인 자신은 이미 과거에,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전생에 중원을 제패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흑도팔군과 정파십존을 사로잡고 중원을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중원을 제패하는 일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회귀할 때마다 자신이 강해지는 만큼 마교는 더 강해졌고 이제는 누구도 감히 천마나 마교를 대적할 수 없게 됐다.
지금은 중원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새로운 재미를 즐기고 있다. 그 핵심은 바로 우설금과 주석하다.
“조금 더 기다리지. 세월이 좀 먹지는 않잖아.”
천마는 곧바로 마교수호사령의 불만을 잠재웠다. 마교수호사령은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천마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래서 단천마령은 어디로 갔지?”
“계속 북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이유를 천마도 모른다. 주석하는 그의 전생에서 미미했던 인물이니까. 아니 엄밀히 말하면 회귀자로 존재하지 않던 인물이라 존재감이 전혀 없었으니까.
뇌군이 주석하를 회귀시키면서, 또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면서 무슨 짓을 한 걸까.
천마는 차를 마시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어차피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주석하의 힘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신에 비하면 한 줌밖에 되지 않으니.
“내버려 둬라. 어차피 우리에게 득이 되고 있으니.”
단천마령이 주석하를 옆에서 감시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만사지존과 뇌군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존명!”
천마는 아직 마교가 모습을 드러낼 시기가 아니라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흑도팔군과 정파십존을 사로잡은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으니까.
**
북해라 하여 끝없이 펼쳐진 빙원을 연상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한 지역은 완전한 얼음 바다는 아니었다. 아마 계절이 여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원의 여름은 아니다. 기온은 차고 서늘했고 곳곳에 녹다 남은 눈과 얼음이 널려 있었다. 나지막한 관목이 어우러진 넓은 들판의 푸른색과 눈과 얼음의 하얀색이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자랑했다.
“여기가…… 북해 맞아요?”
우설금 또한 놀란 표정으로 연신 질문했다.
“아마 겨울이 되면 천지가 눈과 얼음으로 덮이지 않을까요?”
주석하는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북해를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짠물이 아니니 호수이긴 한데 바다보다 더 넓은 기분이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유난히 파란 물 위로 떨어지는 햇빛이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임을 알려주었다.
그는 물가로 걸어가서 손을 물에 담갔다.
뼛속으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북해의 특징이다.
그 한기가 몸으로 들어오는 순간 단전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빙군의 내력이다. 동질의 기운이라고 순응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빙군이 무공을 연마하던 북해가 확실했다.
잠시 손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우설금이 옆에 와서 쪼그려 앉더니 조심스럽게 물에 손을 담갔다.
“앗, 차거!”
화들짝 놀란 그녀가 손을 뺐다.
주석하는 우설금을 밀어 호수에 빠트리는 장난을 쳐보려다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다가 살인이라도 나면 곤란하다.
“여기 북해 맞아요. 여름이라 덜 추운 거고요. 이제 북해빙궁을 찾아야 하는데…….”
주석하는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인적이 없으니 물어볼 곳도 없다.
옆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던 우설금이 멀리 어떤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뭔가가…….”
얼핏 보기에 작은 성 같은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도 노숙할 수는 없지 않나. 빙궁이든 아니든 무척 반가웠다.
“가보죠.”
두 사람이 허리를 폈을 때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멈춰라!”
물가 숲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주석하는 부근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잠복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비록 숲과 북해가 꽤 떨어져 있고 두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 또한 무공이 상당하지 않았다면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 두꺼운 털옷을 걸치고 있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확실했다. 북해 인근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북해빙궁밖에 없으니 아마도 그곳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어차피 북해빙궁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라 오히려 잘됐다고 여기고 있을 때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너희들은 누구지?”
대략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앞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였다.
“우리는 중원에서 왔습니다.”
“중원 어디?”
약간 적대감이 엿보였다.
“사천입니다.”
이곳 북해에서 사는 사람들이 과연 사천을 알까? 여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
“뭐하러 왔지?”
“북해빙궁 궁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궁주님? 지금 안 계시는데? 제대로 말해.”
“궁주님이 안 계시면 부궁주님이라도…….”
주석하의 대답에 여인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부하들에게 눈짓하자 곧바로 포위망이 형성됐다.
여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거짓말 마. 너희들 첩자지? 우리를 염탐하러 온 거잖아?”
“그게 무슨?”
“최근에 중원에서 건너온 작자는 하나같이 첩자더라고. 얘들아! 놈들을 잡아라!” 여인의 명령에 부하들이 검을 목에 들이댔다.
이런 위협에 당할 주석하가 아니었으나 어차피 빙궁에 들어가야 할 처지라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우설금 또한 주석하의 의도를 눈치채고 순순히 검을 받았다.
제압한 두 사람을 쓱 훑어본 여인이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네. 그건 뭐야?”
여인이 흑검소를 가리켰다.
“이거…… 퉁소인데요?”
“흐음, 악사냐? 넌 그거 뭐냐?”
우설금이 홍철산을 펴 보였다.
“예쁘긴 한데…… 쓸모는 없겠네. 눈은 어렵고 비 가리면 딱이네. 끌고 가자!”
무기가 아니라 생각한 여인이 몸을 돌렸다.
주석하는 우설금과 눈빛을 교환하며 여인의 뒤를 순순히 따라갔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엄소교. 넌?”
엄소교가 주석하와 우설금에게 번갈아 눈짓했다.
“난…… 주석하이고 저쪽은 우설금 소저입니다.”
엄소교가 재차 두 사람을 힐끔거리며 면밀하게 관찰했다. 우설금을 몇 번 살피던 엄소교가 안면을 찡그렸다.
“너희들 대사형과 무슨 관계냐?”
“대사형요? 그게 누굽니까?”
“모른 척하지 마. 대사형이 고용한 용병 아니야?”
어째 골치 아픈 일에 엮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