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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38화 (138/273)

138화 북해빙궁 (2)

주석하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연신 지었으나 엄소교는 콧방귀만 뀌었다.

“내가 보니 딱이야. 너희들 중원에서 왔다고 했잖아? 최근에 대사형이 고수를 많이 영입했다던데…… 네놈들도 거기에 합류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이 먼 곳까지 올 리가 없잖아?”

“전 대사형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의 직책은…….”

“난 소궁주 친위대장이야.”

재빨리 주석하는 머리를 굴렸다. 대충 짐작해 보니 소궁주와 대사형이 대립하는 상황인 듯했다. 아마 대사형이 세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중원에서 용병을 영입한 모양이다.

주석하는 소궁주와 대사형의 관계가 어떠하든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이곳에 온 목적만 완수하면 된다.

북해빙궁에는 빙군의 무공을 익히러 왔다. 빙군의 내력을 품고 있으나 사용할 수 없기에 빙군의 무공이 필요했다. 이미 빙군은 죽고 없지만, 그 무공은 북해빙궁에 남아 있으리라 예상했다. 목적을 이루려면 일단 빙궁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

포로가 되면 빙궁 잠입이 오히려 쉬운 점도 있으니 주석하는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따르자 기분이 좋아진 듯 엄소교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치사하게 용병을 해코지하지는 않아. 그러니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순순히 말만 잘 들으면. 그래, 어디에서 왔다고 했지?”

“사천입니다.”

“사천? 강이 네 개야? 몇 개 안 되네. 북해에 접어드는 강은 백 개가 넘어.”

주석하는 이 여자가 중원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는 데 목을 걸 수 있었다. 내심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자니 엄소교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공은 얼마나 돼?”

“고만고만합니다. 무공이 강하면 벌써 도망쳤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무공으로 밥 벌어먹으려면 퉁소 말고 칼을 들고 다녀야지. 그게 뭐냐? 하긴, 대사형도 답답하겠네. 용병이라고 끌어모은 것이 너처럼 머저리면…… 뭐, 볼 것 없이 우리가 이기겠어.”졸지에 머저리가 된 주석하는 머쓱해졌다. 뒤에서 나지막한 우설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썹을 확 모으며 인상을 팍 쓴 엄소교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네년도 마찬가지야. 우산 나부랭이나 들고 다니는 주제에. 하긴 무공보다 미인계를 쓰면 좀 먹히긴 하겠지만 대상을 잘못 골랐어. 대사형은 남자지만 소궁주는 여자라 미인계는 안 먹히거든.”우설금이 발끈할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음, 미남계는…… 불가능하지는 않겠네. 너, 소궁주 앞에서 꼬리 치면 죽을 줄 알아!”

엄소교가 주석하를 살펴본 후 엄포를 놓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북해빙궁에 도착했다.

북해빙궁은 눈 덮인 호숫가 옆에 하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중원에서 흔히 보던 건축물과는 양식이 달랐다. 더 튼튼했고 오밀조밀했다. 마치 천자의 별궁을 옮겨놓은 느낌이다.

닫힌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내부로 끌려갔다.

가장 먼저 피부에 닿은 것은 내부에 흐르는 긴장감이다. 무공 고수로 보이는 자들이 열을 지어 성곽을 방비하고 있고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성 전체를 덮고 있었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성 내부의 광장으로 끌려갔다. 이곳은 날씨가 춥다 보니 건물 내부 공간이 상당히 넓었다.

“그래도 잡았으니 심문해야 하잖아? 잠시 후 소궁주께서 오셔서 친히 너희에게 물어보면 아는 대로 전부 대답해야 한다. 알겠지? 나, 나쁜 사람 아니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다 불어. 그게 신상에 좋아.”협박 반 회유 반, 그래도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어서 주석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꿇어!”

광장 중앙에서 주석하는 우설금과 나란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를 데려온 엄소교와 친위대가 한발 물러서서 대기했다. 그들은 두 사람의 무공이 별 것 아니라 생각한 듯 경계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좀 덜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순진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대기하고 있자니 한쪽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시녀를 대동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갑옷을 입은 여인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북해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그녀의 외모에서 하얀 눈이 연상됐다. 우설금의 피부가 매우 희고 고왔는데 이 여인의 피부는 그 이상이었다. 나이는 대략 우설금과 비슷해 보였다.

“소궁주님이시다. 머리를 숙여라!”

엄소교의 엄포에 주석하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소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원에서 왔나?”

“강이 네 개인 동네서 왔답니다. 무공은 별 볼 일 없고 대사형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거로 봐선 용병으로 합류하려다가 직전에 잡힌 것 같습니다. 향후 적이 될 게 확실해 보이는 바…….”주석하가 대답하기 전에 엄소교가 먼저 소나기 퍼붓듯 대답했다. 어째 이 여자는 말이 무척 많다.

“용병 아닙니다만.”

“앞으로 할 거잖아?”

엄소교가 눈을 부라리며 말을 잘랐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소궁주의 명령이 들려왔다.

“머리를 들라.”

주석하는 시선을 들어 소궁주를 차분하게 관찰했다. 다행히 엄소교와 달리 소궁주는 나이답지 않게 신중해 보였다.

주석하와 우설금을 조용히 살피던 소궁주 역시 우설금에 시선이 이른 다음에는 살짝 안색이 변했다. 우설금의 남다른 미모가 어떻게 작용할지 주석하도 궁금해졌다.

“대사형에게 얼마나 받기로 했지?”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은자 열 냥씩입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요.”

이번에도 엄소교가 대신 대답했다.

“용병이 몇이나 될까?”

“현재 추정으로는 대략 백 명가량 될 것 같습니다.”

“많군.”

이어서 두 사람 간에 자세한 대화가 오갔다. 덕분에 주석하는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북해빙궁 궁주였던 빙군이 궁을 떠나 중원으로 갔다가 실종되면서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는 빙궁에서 실권을 지닌 자가 둘이었다. 빙군의 손녀인 구양상과 빙군의 대제자이자 구양상의 대사형인 맹이도.

빙군은 그간 대제자인 맹이도를 후계로 키웠고 실질적으로 맹이도는 무공이나 실권에서 이인자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정작 중원으로 떠나면서 빙군은 손녀인 구양상을 차기 궁주로 지명하고 떠났다. 대제자 맹이도가 절대 승복하기 힘든 지시였다.

빙군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구양상은 조부를 이어 빙궁의 궁주에 오르려 했고 맹이도는 빙군의 실질적인 후계가 자신임을 선포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커져 급기야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다만 대부분 빙궁 사람들은 빙군의 친혈육인 구양상을 지지했다. 소궁주 친위대장인 엄소교도 마찬가지였다.

세 부족을 절감하자 대사형 맹이도는 다른 방법을 꾀했다.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 궁주 자리를 거머쥐려 했다. 덕분에 중원에서 많은 용병이 이곳으로 넘어오는 상태였다.

지금은 구양상과 맹이도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질 찰나였다.

‘하아, 때가 좋지 않았네.’

주석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비전 무공을 얻어야 하니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처럼 전쟁에 휘말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는 용병이 아니라고 항의했으나 번번이 엄소교에게 막혔다.

“딱 보니 용병 맞는데 뭘. 너 돈도 없잖아? 그러니 용병하러 왔지.”

엄소교의 송곳 같은 질문에 주석하는 움찔했다. 저 여자는 돈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백 명이라…… 그들의 무공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도 쉽지 않겠는데.”

소궁주 구양상이 걱정스러운 한숨을 토했다.

지금까지는 수적 우위에 있었는데 용병으로 인해 그 우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숨을 내쉬던 구양상이 두 사람을 가리켰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일단 잡아두죠. 인질로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대사형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인질로 쓰겠다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주석하는 반박할 처지도 아니었다.

“감옥에 넣어두어라.”

그렇게 북해빙궁 소궁주와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

“이곳에서 뭘 하죠?”

감옥에 갇힌 후 우설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석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난 이곳에 빙군의 무공을 익히러 왔어요.”

“하필이면 이 먼 곳까지…….”

우설금은 입을 열다가 바로 다물었다. 주석하가 흑도팔군의 무공을 익혀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왜 하필이면 흑도팔군의 무공인지, 또 빙군도 없는 이 먼 곳까지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원하니까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없다.

“예상외로 북해빙궁 상황이 나쁘네요. 순순히 무공을 내어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훔치기도 쉽지 않겠어요.”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했어요?”

우설금이 슬며시 눈웃음을 쳤다. 가끔 이런 표정의 그녀는 무척 귀엽다. 그녀를 볼 때마다 예전과 상반되는 분위기가 어색해서 놀랄 때가 많다.

“그래도 다 작전이 있었죠.”

주석하는 품에서 북빙패를 꺼냈다. 그날 빙군이 죽었을 때 얻었던 북해빙궁의 궁주를 뜻하는 신물이다.

우설금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 패가 있으면…….”

“그렇죠. 지금이라도 이 패로 ‘내가 궁주다’라고 부르짖으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다만 주석하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빙군이야 그를 죽이려 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북해빙군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게다가 그는 북해빙궁 궁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추운 곳에서 평생을 사느니 궁주 자리를 포기하는 게 낫다.

주석하가 이곳에 온 목적을 확실하게 깨달은 우설금도 생각에 잠겼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주석하는 재빨리 북빙패를 품에 넣었다.

“자, 식사시간이다.”

엄소교가 간수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간수가 마른 떡과 양젖을 창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먹을 것을 주니 감옥도 지낼만하다.

주석하가 떡을 먹는 동안 엄소교가 다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만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우리 인원이 적어서 고민이야. 열 냥 주면 우리에게 붙을 거냐?”

새로운 제안이 떨어졌다. 그만큼 이곳의 인원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수락하고픈 마음이 꿀떡이었으나 애초에 용병이 아니라 우겼으니 갑자기 수락해도 이상할 듯했다. 어쩌면 내심을 떠보는 수작일지도 모르고. 물론 엄소교의 성격으로 봐선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낮지만.

주석하가 고개를 젓자 엄소교가 불쾌한 표정을 풀풀 날렸다.

“하긴 그 무공실력에 열 냥은 과하지. 너넨 하수잖아? 돈이 아깝지. 하아! 큰일이네. 대사형이 용병을 더 끌어 모으면 골치 아픈데…….”

“그러니까…… 서로 궁주가 되겠다고 싸우는 거죠?”

“뭔 소리야! 소궁주님이 적통인데 역적인 대사형이 욕심내는 거다.”

“어쨌든요.”

“원래 소궁주는 북해에서 조용히 살자는 생각이었고 대사형은 외부로 세력을 확장하자는 의도였어. 그게 부딪히며 권력투쟁으로 비화한 거지. 근데…… 정말 외부에서 세력을 끌어들일 줄은……. 대사형이 비록 강하지만 지지 세력이 크지 않았는데 이러다간 외부인에게 빙궁을 통째로 넘겨줄 판이야. 이 전쟁은 꼭 이겨야 해.”소궁주 구양상과 대사형 맹이도의 성향이 완전히 다른 듯했다.

“근데 우리 소궁주님 예쁘지 않냐?”

“딱히…….”

“소궁주님이 북해 제일의 미녀거든. 원래 대사형과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대사형이…… 여자를 밝히는 편인가요?”

주석하의 반응에 엄소교가 시선을 잠시 우설금을 향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옆에 그만한 미녀가 있으니 관심 없겠네…….”

이런저런 말이 오갈 때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엄소교가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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