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북해빙궁 (3)
외부의 소란이 계속되는 동안 주석하와 우설금은 감옥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냈다.
감옥에 있다고 하여 특별히 불안할 이유는 없다. 언제라도 이런 감옥은 바로 부수고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북해빙궁의 내부 다툼에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빙군의 비급을 얻으려면 빙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소궁주와 대사형 중에 누가 유리할지도 따져봐야 하고. 빙군의 진전을 이은 사람이 대사형일 것 같긴 한데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너희 둘, 나와라!”
엄소교가 갑자기 나타나 감옥 문을 열었다.
전쟁 중에? 예상치 않은 상황이라 주석하는 엄소교의 눈치를 봤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하아, 그게…….”
엄소교가 필요치 않은 상세한 전쟁 상황을 전달했다. 역시 말 많은 엄소교는 봇물이 터지자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있다.
대사형 맹이도가 무림인을 이끌고 빙궁을 점령하고자 쳐들어 왔다. 예상보다 용병 수가 많아 소궁주 쪽에서는 악전고투를 벌였다.
간신히 비등한 전세를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소궁주 구양상이 부상을 입은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잡아놓은 인질로 협상하려 한다.”
“저희는 대사형 쪽 용병이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상관없어. 너희 말고도 몇 명 있으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휴전을 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으나 엄소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빙궁의 정문으로 나가 앞을 보니 성채 밖으로 백여 명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보였다. 그 옷차림이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대부분 중원에서 건너온 용병으로 보였다.
반대로 빙궁 쪽 사람들 숫자도 그 정도인 것으로 보아 전선이 팽팽했다.
주석하는 엄소교의 인도로 가장 앞쪽 대열에 섰다. 그들과 같이 선 자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중원에서 용병으로 왔다가 잡힌 자들로 보였다. 모두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어 어찌 된 상황인지 금방 짐작이 갔다.
“흐흐, 간교한 술책을 쓰는구나.”
용병을 이끄는 한 남자가 소리쳤다.
주석하는 반대편에서 가장 앞에 선 남자를 주목했다. 대략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고 체구가 건장했다. 은연중 풍기는 기세는 이 남자가 상당한 고수임을 드러냈다.
‘대사형 맹이도인가 보네. 빙군의 제자도 맞고.’
남자의 기운에서 주석하는 곧바로 누구인지 확신했다. 얼핏 보기에 이곳에서 맹이도에 필적할 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궁주인 구양상은…….
주석하는 구양상의 안색이 의외로 파리하다는 점을 눈치챘다. 외부로 뿜는 기운도 많이 줄어 부상을 숨기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간교한 술책? 자신 있으면 해보시지!”
구양상이 뾰족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다만 그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났다. 그녀의 행동에서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함이 바로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부상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더 드러낸 꼴이 됐다.
“어차피 용병은 계약 관계다. 우리가 용병의 목숨까지 일일이 챙겨줄 필요가 있을까?”
“과연 그럴까?”
구양상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용병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지만 전투 중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쓰고 버릴 목숨이라 인식되면 용병이 열심히 싸울 리가 없다. 역시 대사형 쪽 무리에서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구양상이 인질을 걸고 협상 가능하다고 자처하는 이유도 이를 노린 것이다. 설사 협상이 되지 않더라도 손해 볼 일은 없다. 용병의 사기를 꺾는 효과가 있으니까. 대신에 협상이 잘 이뤄지면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런 조잡한 술수에 얽매일 맹이도가 아니었다. 그는 거침없이 신형을 날렸다.
“흐흐! 소궁주! 당신을 잡아 이 전쟁을 끝내겠다!”
대화 중에 맹이도가 공격해 올 줄 전혀 몰랐던 친위대에서 다급함이 터져 나왔다. 구양상도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부상 때문에 그녀의 반응은 무척 느렸다.
맹이도의 손에서 하얀 기운이 뿜어졌다.
‘극한빙백신공!’
주석하는 맹이도의 무공을 바로 알아봤다. 빙군의 대제자라더니 역시 빙군의 장기인 극한빙백신공을 익혔다. 순식간에 맹이도 주위에 하얀 냉기가 덮이며 주변을 얼렸다.
맹이도가 구양상의 지척에 이르자 그녀도 다급하게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대응했다. 구양상의 손바닥이 하얗게 물들며 강력한 한기를 쏟아냈다.
그녀의 무공도 동일한 극한빙백신공이었다.
두 사람이 익힌 무공이 같으면 신공의 성취, 내공의 양, 초식의 이해도에 의해 결판이 난다. 구양상에 비해 훨씬 오랜 시간 무공을 연마한 맹이도가 뒤질 리 없었다.
두 사람이 뻗어내는 한기의 양부터 큰 차이가 났다. 각자가 지배하는 영역을 비교하면 맹이도가 무려 두 배나 넓었다.
슈아악-
간신히 맹이도의 신공을 막아냈으나 구양상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있었다. 부상 상태에서 맹이도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 응수하다 보니 내상의 징후마저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맹이도가 아니었다.
그는 구양상의 신공과 맞부딪히는 순간 반탄력을 이용해서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한 다음 재차 구양상을 공격했다. 그는 손으로 매서운 한기를 뿜어내며 구양상의 전신을 얼렸다.
연속 공격에 대응하기 힘든 구양상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구양상은 궁주 자리를 지키기 힘들어진다.
주석하도 상황의 다급함을 바로 알아챘다.
맹이도가 구양상을 잡는 상황을 그냥 두고 봐야 할까. 누가 궁주에 적합한지 확실하지 않기에 맹이도의 승리는 달갑지 않았다.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내력을 모았다. 그리고 맹이도의 신공이 구양상을 휘감는 순간 혼천십팔지를 뿌렸다.
푸슉-
맹이도가 승리의 미소를 짓는 순간 구양상을 휘감았던 극한빅뱅신공이 종잇장처럼 깨져나갔다.
“헉!”
맹이도는 예상치 못한 현상에 위기감을 느끼고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전면에는 구양상이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그의 극한빅뱅신공을 구양상이 깨트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자가 깨트린 것인지 불분명했다.
제자리로 돌아온 맹이도는 신공을 갈무리하며 구양상과 그녀를 둘러싼 친위대를 살폈다. 아무리 살펴도 신공을 깨트릴 능력이 있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구양상이 다른 무공을 익힌 건가?’
마땅한 고수가 없는 상황에서는 구양상의 술수라 보는 게 타당했다.
구양상이 분노한 표정으로 일성을 터트렸다.
“대사형! 어디 다시 공격해보시지?”
맹이도는 골치 아픈 상황에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구양상을 잡아 빙궁을 접수하나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격이 들어왔다. 무시하기에는 방금 깨진 극한빙백신공이 찜찜하다.
바로 치고 들어가려니 부담이 크다. 구양상의 부상도 어쩌면 별것 아닌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잡은 승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법. 맹이도가 다시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그의 눈이 인질로 나온 몇 사람을 쓱 훑었다. 그리고 주석하와 우설금에 눈이 멎었다.
‘저런 용병은 없었는데?’
낯선 두 인물이 끼어있었다. 처음에는 소궁주 쪽에서 엉뚱한 사람을 끼워 넣어 숫자를 부풀리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설금의 미모를 확인한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우설금의 미모는 몇 년 동안 그가 눈독을 들였던 소궁주 구양상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북해빙궁 최고의 미인이라는 구양상을 가볍게 누를 정도였다.
‘누구지?’
맹이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빙궁 인물이 아니니 중원에서 온 자다. 중원에서 왔다면 일단 아군이라 볼 수 있었다.
“어떠냐? 휴전을 받아들이겠느냐?”
맹이도의 심사를 눈치챈 구양상이 빠른 대답을 촉구했다.
지금 계속 전쟁을 수행하기엔 맹이도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용병들의 동요가 문제였고 자신도 많이 지쳤다. 소궁주를 에워싸고 결사 항전을 벌이는 친위대를 처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보다 더 그를 유혹한 것은……. 맹이도는 다시 우설금을 쓱 눈으로 훑었다.
“좋다. 이틀간 휴전하도록 하지.”
맹이도의 승낙으로 전쟁이 일시 중지됐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반란군인 대사형 쪽으로 넘겨졌다.
그는 구양상과 엄소교를 힐끔 쳐다봤으나 두 사람 모두 그에게 시선을 전혀 주지 않았다. 넘겨줘도 아쉬울 것 없는 인질을 대하는 태도였다.
**
반란군은 북해빙궁에서 십 리가량 떨어진 북해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주석하와 우설금은 곧바로 맹이도와 면담했다.
친위대로 보이는 고수 둘의 호위를 받으며 맹이도가 주석하를 만났다. 맹이도와 근거리에서 마주하자 주석하는 그의 무공을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흑도팔군에 이를 수준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중원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는 되었다. 엄밀하게 보자면 구양상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어디 출신이지?”
“사천성입니다.”
“넌?”
맹이도의 시선이 바로 우설금으로 넘어갔다. 주석하는 연신 우설금을 힐끔거리는 맹이도의 태도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저러다가 자칫하면 죽을 텐데……. 맹이도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저도…….”
우설금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천성에서 이 먼 곳까지 무슨 일인가?”
다시 질문이 떨어지자 주석하가 대답했다.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우연히 북해빙궁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용병은 내가 모았다. 궁에는 왜 들어갔지?”
“이 부근에 왔을 때 소궁주 친위대에 잡혔습니다.”
“흐음, 그래서 손도 못 써보고 감옥에 있었다…….”
맹이도가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친위대에게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할 실력이니 용병으로 쓸 일도 없다. 사내는 처리하고 계집은…….
대충 정황을 파악한 맹이도는 우설금을 찬찬히 살폈다. 얼굴선이 대단히 고왔다. 평생 이런 미녀는 처음 봤다.
“이름이?”
“주석하입니다.”
“우설금입니다.”
당연히 맹이도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북해는 흑검서생이란 별호가 퍼지기에는 너무 멀었다.
“둘이 무슨 사이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주석하는 우설금을 돌아봤다. 문득 그도 궁금증이 생겼다. 무슨 사이일까. 이 먼 곳까지 함께 왔으니 보통 사이가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딱히 어떤 사이라 규정하기도 모호했다.
“그, 그게…….”
주석하가 머뭇거리고 우설금은 전혀 표정 변화가 없자 맹이도는 단박에 정답을 꿰뚫었다.
‘둘이 떳떳한 사이는 아니군. 특히 여자는 남자에게 전혀 무관심이야. 하긴 특별한 사이라도 무슨 상관인가. 강호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미녀를 쟁취하는 법! 그렇다면…….’맹이도는 둘을 노려보며 면담을 끝냈다.
“일단 용병으로 접수할 테니 돌아가서 대기하라. 필요할 때 다시 부르지.”
주석하와 우설금은 맹이도의 막사에서 물러났다.
**
북해빙궁에서 벌어진 내전 상황 파악을 완료했다.
소궁주인 구양상과 대사형인 맹이도가 무엇을 노리는지, 각 세력 분포는 어떻게 되는지. 주석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극한빙백신공을 받을 생각이었다. 덤으로 북해빙궁 궁주를 의미하는 북빙패까지 선물로 줄 생각이다. 이만하면 대가로 충분하지 않을까.
다만 남의 내전에 그가 영향을 미친다는 게 꺼림칙하긴 했다. 게다가 북해빙궁이 내전에 휘말린 근본적인 이유는 빙군의 죽음 때문이니 그의 책임이 없지 않았다.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면서 주석하는 고민에 잠겼다.
“누굴 도와야 하지?”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우설금은 그의 고민을 이해 못 하는 듯했다. 그녀는 마교라는 강자존의 세상에서 살았으니 그런 태도가 이해가 간다. 그녀라면 승리한 놈이 강한 자이니 강한 자를 밀 것이다.
주석하는 빙군이 살아있었다면 과연 누구에게 궁주 자리를 물려줬을지 생각해봤다. 빙군이 떠나기 전에 임시 궁주로 구양상을 지목했다고 했던가.
구양상의 처지에서 보면 주석하는 할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맹이도보다 구양상에게 더 마음의 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