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빙궁의 반란 (1)
“날이 저물면 빙궁에 다녀올게요.”
주석하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놨다.
우설금이 홀로 있다고 위험할 리 없으니 그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니, 걱정은 된다. 맹이도가.
먼저 구양상과 협상을 벌여보고 여의치 않으면 맹이도와 타협할 생각이다. 구양상에게는 빙군의 죽음에 관련된 빚이 있다. 반면 맹이도는 그가 개입하지 않으면 실권을 잡을 것이니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맹이도의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조심해요.”
주석하의 당부에 우설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내심을 눈치챈 주석하는 머쓱해졌다. 그래도 여자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데 이런 걱정은 당연한 거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들고 막사를 나와 주변을 살폈다.
대부분 중원에서 온 용병들인 데다 오늘 한 차례 전투를 치러 막사 밖을 돌아다니는 자는 거의 없었다. 서로 안면이 없어 오히려 활동이 자유로웠다.
멀리 북해빙궁이 보였다. 이제 그곳을 잠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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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빙궁의 내전에는 긴장이 내려앉아 있었다.
소궁주 구양상의 부상이 심상치 않았다. 대사형 맹이도와 일전을 치르면서 얻은 부상이 예상보다 위중했다.
“대사형의 무공이 전보다 더 상승한 것 같아요.”
엄소교가 침상에 누운 구양상의 부상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하아, 예상 밖이었어.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격차가 클 줄은…….”
구양상은 침울한 표정으로 낮에 있었던 몇 차례의 격전을 떠올렸다. 같은 극한빙백신공을 사용했다. 한때 같이 수학한 사이이기에 서로를 손바닥 보듯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달랐다. 목숨을 노리는 격전이 되니 확실히 그 차이가 벌어졌다. 어쩌면 맹이도가 본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구양상은 타격을 받았다. 외상도 심상찮고 내상은 더욱 심했다. 한쪽 팔에 한기가 스며들어 가누기 힘들었고 상대의 내력이 침습한 그녀의 혈맥은 운기가 원활하지 않아 내력을 전부 끌어올리기 어려웠다.
“다시 싸울 수 있으시겠어요?”
엄소교의 염려에 구양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다시 맹이도를 상대하기 어렵다. 본신의 실력을 절반도 발휘하기 힘들다. 이 부상을 완치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이다. 문제는 맹이도가 내일이나 모래면 다시 쳐들어올 테고 지금 빙궁에는 맹이도에 필적하는 무공을 가진 자가 없다.
“소궁주께선 얼른 몸부터 추스르세요. 대사형은 제가 어떻게든 막아볼게요.”
엄소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양상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엄소교는 친위대장답게 북해빙궁에서 손꼽히는 강자다. 하지만 맹이도에 미치지는 못한다. 친위대도 오늘 전투에서 보니 중원에서 온 용병을 제압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 고마워.”
구양상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엄소교가 고마웠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할아버지인 빙군이 살아있었을 때는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빙궁 궁주 자리를 물려받으리라 생각했고 빙군의 대제자인 맹이도가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리라 예상했다. 한때 맹이도와 혼인하는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는데…….
빙군의 중원행과 죽음 소식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그래도 며칠 시간을 벌었으니 얼른 부상부터 처리하고…….”
구양상도 엄소교의 응원에 힘을 냈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럼 몸조리 잘 하세요.”
엄소교는 구양상의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온 엄소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구양상 앞에서는 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그녀도 안다. 그녀도, 소궁주도 맹이도의 상대가 되지 못함이 문제의 근원이다.
오늘은 다행히 맹이도가 물러났지만 다시 쳐들어온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그래도 끝까지 해봐야지. 난 소궁주를 배신할 수 없어.”
얼마 전부터 친위대에서 동요가 일고 있었다. 대사형과 친했던 친위대원을 중심으로 대사형의 무공을 두려워하며 돌아서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친위대가 맹이도에게 붙으면 소궁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니 북해빙궁에서 전쟁을 치를 일도 사라진다는 논리였다.
엄소교는 바로 일축했지만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다. 냉정히 따져 보면 소궁주는 자리를 보전하기 쉽지 않다.
한숨을 내쉬며 처소로 가려던 엄소교의 눈에 한 인물이 들어왔다.
“어?”
궁 수비대원에게 끌려 들어오는 한 남자는 낮에 보았던 중원의 용병이 아닌가.
“뭐냐?”
엄소교가 수비대원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수비대원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자가 갑자기 정문에 와서…… 대장님을 만나겠다고…….”
엄소교가 수상한 눈빛으로 그 남자, 주석하를 훑었다.
잠시 후 피식 웃음을 떠올린 엄소교가 손을 휘휘 저어 수비대원을 보냈다.
“알았다. 내가 처리하마.”
둘만 남자 엄소교가 조소를 띠며 물었다.
“너! 쫓겨났지?”
“네?”
“무공이 변변찮다고 대사형 측도 용병으로 안 받아준 거잖아?”
주석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 굴리는 것 좀 봐라. 그래도 난 안 속아. 흠, 하긴 이 황량한 북해에서…… 용병도 못 하니 먹고살기도 막막하겠네. 근데 솔직히 우리도 무공이 변변찮으면 용병으로 받아주기 어렵거든.”주석하가 당황하고 있자니 엄소교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뭐, 그래도 사람이 부족하니…… 내가 인심 썼다. 용병으로 받아줄게. 단 임금은 삭감해야 해. 저쪽에서 열 냥이라니까 넌 다섯 냥. 나쁘지 않지?”
졸지에 다섯 냥짜리 용병이 된 주석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저, 근데요……. 소궁주님 부상은…….”
엄소교의 눈이 확 커졌다.
“어딜 그런 극비를…….”
주석하를 질책하려던 엄소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대사형도 아나 보네. 어쩔 수 없지. 이제 너도 우리 편이니까 내가 말해주는데…… 솔직히 소궁주님 상태가 별로 안 좋아. 한 달간은 치료해야 할 것 같아. 대사형의 극한빙백신공이 예상보다 대단해서……. 하여튼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발설하지 말고. 지금은 다시 적이 쳐들어오면 쉽지 않아.”과연 비밀이 맞는지 엄소교가 술술 다 털어놓았다.
주석하는 엄소교의 푼수에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와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근데…… 대사형은 혹시 부상 없냐? 그것만이 희망인데…….”
주석하가 고개를 젓자 엄소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래저래 고민하던 엄소교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넌 쫓겨났으니 밥도 못 먹었겠네. 저녁 먹었어? 못 먹었으면 줄게. 따라와.”
아무리 생각해도 친위대장 엄소교는 조금 이상한 인물이라고 주석하는 생각했다. 이 어지러운 판국에 밥을 챙겨주겠다니. 한편으로는 무척 고마웠다. 그녀가 따뜻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
급히 말은 국수를 얻어먹으면서 주석하는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소궁주님이 거동하기 힘든가요?”
엄소교가 눈썹을 확 올리면서 질책했다.
“어허,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된다니까. 물론 사실이긴 해. 지금 상황에서는 무공을 사용하기 쉽지 않아. 내상이 예상보다 심각한 데다 한쪽 팔을 극한빙백신공에 당해서…….”이 여자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더니 정작 본인은 더 상세히 다 털어놓았다.
주석하는 몇 차례 더 그녀를 유도해서 소궁주의 상세를 비교적 자세하게 알아냈다. 구양상의 몸이 좋지 않다니 일단 이 점을 이용해서 협상을 벌여볼까.
“근데요, 혹시 여기에 좋은 의원 있어요?”
“의원? 의원은 왜?”
“소궁주가 몸이 안 좋다니까…….”
엄소교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휴, 넌 무공을 발로 배웠니? 무림인이 다친 건 일반 사람이 다친 것과 달라. 일반 의원이 치료하긴 어려워. 특히 내상 문제는. 무공을 배웠으면 그 정도는 알아야지……. 그러니 용병에도 못 들어가지.”졸지에 다시 하수 취급을 받은 주석하는 쓴맛을 다셨다.
어쨌든 빙궁에서 구양상을 치료할 인물이 없다는 소리였다.
극한빙백신공에 다쳤고 구양상의 내공이 빙군과 같다면 그가 치료할 수 있다. 자신에게는 빙군이 남긴 엄청난 내력이 잠자고 있으니까. 문제는 빙군의 내력을 그도 마음먹은 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제가 내상 치료를 조금 아는데…….”
“응?”
주석하의 중얼거림에 엄소교가 눈을 크게 떴다. 재차 요모조모 주석하를 훑어보던 엄소교가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거짓말 마. 어딜 봐도 의원처럼 안 생겼어.”
“의원이 어떻게 생겼는데요?”
“자고로 의원이라 하면…… 흰 수염을 늘어트리고 환자에게 신뢰를 팍팍 주는 그런 인상을……. 에혀, 말을 말자.”
“정말이에요.”
주석하가 엄소교를 또렷이 쳐다보자 엄소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상 치료는 꽤 자신 있어요. 제가 중원에서 한때…….”
“됐고. 너 혹시 우리 예쁜 소궁주 얼굴 한 번 보려고 수작 부리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닌데요.”
“음, 하긴…… 그때 옆에 있던 그 여자도 꽤 예뻤는데…… 근데 그 여자는 어디로 갔어?”
뒤늦게 우설금의 행방을 질문받자 주석하는 버벅거렸다.
그의 태도를 본 엄소교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갑자기 위로의 말을 던졌다.
“너도 참 불쌍하구나. 그래도 어쩌겠니, 하수의 비애지. 원래 대사형이 여자를 좀 밝히거든. 그래서 소궁주와도 많이 다퉜는데……. 결국 그 녀석이 뺏어갔나 보네. 넌 용병에서 쫓겨나고. 이제 제대로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네.”무슨 말인지 모를 헛소리를 혼자서 마구 중얼거리던 엄소교가 다시 정색했다.
“하여튼…… 내상 치료할 줄 안다는 거 진짜야?”
주석하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차례 주석하를 노려보다 홀로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하던 엄소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 사내란 어쩔 수 없지. 우리 소궁주님이 잘 생긴 게 죄지. 내가 보기에 너도 외모가 그럭저럭 괜찮으니……. 혹시라도 내상까지 치료할 수 있으면 좋고. 속는 셈 치고 한번 말씀드려보지 뭐. 그래도 우리 소궁주님께 흑심을 품으면 절대 안 된다. 알지?”주석하는 엄소교의 말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데 그녀의 오락가락하는 감정을 따라가기 정말 힘들었다.
“당연하죠.”
“흥! 사내들은 전부 처음에는 그러더라.”
이것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엄소교가 벌떡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얼른 일어나. 소궁주님 주무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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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하를 보낸 후 우설금은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북해로 오는 동안 그녀는 수하인 백귀와 흑귀를 통해 천마의 명을 전달받았다. 당분간 주석하를 주시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려왔다.
주석하가 왜 천마의 주목을 받는지 그녀도 몰랐다. 지금이야 그가 강자로 떠올랐으니 정파십존에 준하는 관심을 기울이는 게 정상이지만 예전에 그렇지 않았을 때도 가끔 천마는 주석하의 움직임을 물었었다.
물론 우설금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천마의 명령은 그만큼 절대적이니까. 그런데 어째 슬슬 주석하와 관련된 일이라면 신경이 쓰인다.
지금까지 주석하가 무엇을 하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소궁주 구양상을 만나러 가니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제갈세가에서도 백화령이 옆에 붙자 괜히 거슬렸었는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우설금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주석하 걱정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흠흠, 안에 있나?”
그때 바깥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한 인물이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우설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사형인 맹이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