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빙궁의 반란 (3)
엄소교가 재빨리 주석하를 나무랐다.
“주 소협, 그건 안 돼. 극한빙백신공은 북해빙궁의 비전 절기라서 궁주를 비롯한 주요 인물만 익힐 수 있어. 아무에게나 전수하지 않아. 하물며 넌 빙궁 사람도 아니잖아? 외부인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어.”역시 예상대로였다. 문파의 비전절기를 외부인에게 알려주는 문파는 없다.
주석하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요구했다.
“공짜로 가르쳐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승낙만 해주시면 대사형 쪽을 제가 처리해드리죠. 빙궁은 확실하게 안정될 겁니다.”
“맹이도 대사형을? 너 그럴 능력은 있어? 무공이 시원찮아 쫓겨난 것 아니었어?”
엄소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석하를 열심히 살폈다. 당연히 그녀는 주석하의 무공을 가늠할 능력이 안 되니 진실을 알 수 없었다.
“제가 대사형 쪽을 처리한 후에 알려주시면 되니 손해 볼 일 없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래도 비전 무공을 함부로 알려주기엔…….”
엄소교가 말끝을 흐리자 구양상이 대신 말했다.
“주 소협, 어떻게 맹이도 사형을 처리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의 무공은…… 나조차도 버거워요. 지금 북해 인근에서 그를 상대할 자는 없어요.”
“압니다. 그러니 그가 빙궁을 노리는 것이겠지요. 만일 신공을 알려주시면 다른 선물도 드리겠습니다.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을 말입니다.”
주석하의 장담에 구양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재주로 그렇게 장담하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가장 큰 문제는 극한빙백신공의 구결을 모두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할아버지께서 전부를 전수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아는 범위는 기껏 절반 정도라 신공을 육성까지 밖에 익힐 수 없어요. 맹이도 사형은 팔성까지. 사실상 신공의 맥이 끊어졌다고 봐야 해요.”빙군이 신공을 완전히 전수하지 않은 듯했다. 신공을 비급 형태로 전하지 않고 구결로 전수하는 모양이다.
주석하도 허탈해졌다. 절반이라도 배워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주석하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구양상이 다시 설명했다.
“물론 완전히 절전된 것은 아니에요. 신공의 전체 구결은 한빙담에 남아 있거든요. 다만 한빙담은 궁주의 신물인 북빙패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고 그 북빙패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라져버렸죠.”북해빙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꼽으라면 바로 한빙담이었다. 이 작은 연못은 만년빙이 녹은 물로 채워져 있어 한기가 탁월했다. 극한빙백신공과 한빙담의 순수한 한기가 어우러지면 최고의 내공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 한빙담은 오로지 북빙패를 가진 궁주만이 출입이 가능했고 역대 궁주는 이 한빙담에서 폐관 수련에 매달리곤 했다.
북해빙궁의 큰 비밀을 알게 된 주석하는 희망을 품었다. 자신에게는 북빙패가 있다. 굳이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한빙담을 찾으면 극한빙백신공을 익힐 수 있게 됐다.
다만 그렇더라도 주석하는 북해빙궁에 악의가 없기에 북빙패를 넘겨줄 용의가 있었다. 자신이 빙군을 죽이면서 발생한 문제니 극한빙백신공의 명맥이 끊어지는 것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한빙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약속대로 대사형을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또 빙궁이 필요한 선물도 드릴 거고요.”
“우리도 들어갈 수 없다니까요.”
구양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석하의 장담에 구양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볼수록 이상한 자였다. 그녀의 외상을 고친 것에서 내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까지. 거기에다 극한빙백신공을 알려달라는 것도.
문득 구양상은 팔을 치료할 때 느꼈던 편안함을 떠올렸다. 이 사람의 기질은 어쩐지 그녀와 비슷했다. 분명히 북해빙궁과 연관된 사람인 듯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지금까지 만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승낙하면 두 가지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사형 반란과 절전된 극한빙백신공을 되찾을 수 있다. 북해빙궁을 재건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알았어요. 고민 좀 해보죠. 늦었으니 내일 다시 얘기해요.”
구양상이 이마를 짚으며 주석하를 물렸다.
엄소교가 눈치를 줬다.
주석하도 조용히 물러났다.
“너, 제법이네? 근데…… 대사형을 어떻게 이긴다는 거지?”
엄소교의 질문에 주석하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석하를 쓱 훑어보던 엄소교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같이 있던 그 여자는 어디로 갔어? 빨간 옷 여자 말이야.”
**
“으악!”
맹이도는 처절한 비명을 터트리며 바닥을 기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의 붉은 여자가 손을 허공에 저으면 자신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게다가 그녀가 노려보면…….
“으으으.”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천만 근의 압력이 전신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맹이도는 우설금이 생전 처음 만나는 초강 고수임을 깨달았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그녀의 실체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저…… 저년을 잡아라!”
맹이도는 엉금엉금 뒤로 물러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맹이도의 호위병이 재빨리 비상사태를 알렸고 주변에서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년을 잡는 자에게 상금 천 냥을 주겠다!”
구경하러 나왔던 용병들은 천 냥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혔다. 게다가 무너진 막사 중앙에 서 있는 홍의 여인은 무림 고수라 보기에 너무 곱상하게 생겼다. 검이라도 들고 있으면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소지품이라고는 예쁜 홍철산뿐이다.
아무리 봐도 맹이도가 여인을 건드리려다 다툼이 생긴 형국이라 용병들은 전혀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천 냥이다!”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한꺼번에 우설금에게 달려들었다.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용병들을 쓱 훑어보았다.
쿵!
겁 없이 우설금에게 달려들던 용병들은 호신강기에 막혀 튕겨 나갔다.
“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들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 몰려든 대다수 용병은 호신강기를 이해할 만큼 강한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순간 우설금이 홍철산을 쫙 폈다.
홍철산의 분홍빛 모란꽃이 선명했다.
푸- 파- 파- 파-
홍철산이 회전하며 강기의 파편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파편은 마치 날카로운 검처럼 다가오던 용병들의 가슴에 박혔다.
“으악!”
처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우설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주저앉은 채 맹이도는 뒷걸음질 쳤다.
“내, 내가 실수했다……. 실수라고…….”
그제야 맹이도는 우설금의 실체를 알아봤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무자비한 살인마였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수였다. 그는 외모에 홀려 저지른 엉뚱한 실수를 자책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우설금은 말이 없었다. 두렵게도 표정의 변화마저 없었다.
그녀는 맹이도 앞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홍철산을 들었다.
“사, 살려줘!” 맹이도가 처절한 애원을 보냈으나 우설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홍철산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푸욱!
홍철산 끝이 맹이도의 가슴을 꿰뚫었다. 시뻘건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떨어졌다.
**
주석하는 잠에서 깨자마자 급히 달려온 엄소교와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주, 주 소협! 드, 들었어?”
“뭔데요?”
여기서 자는 사람이 무슨 소문을 들어? 주석하는 눈을 비볐다. 어젯밤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아니면 잠자리가 낯설어서인지 편하게 자지 못했다.
“대…… 대사형 쪽이 끄, 끝장났어!”
“뭔 소립니까?”
“대사형이 죽었다고. 용병들도 절반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고…… 남은 용병은 다 도망쳤데.”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으나 맹이도가 죽었다는 말만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맹이도가 죽어요?”
“그래.”
엄소교의 표정을 보니 거짓이 아니었다.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싸맸다.
“아, 망했네.”
“망하다니?”
멍한 표정의 엄소교를 내버려 두고 주석하는 상황을 정리했다.
대사형과 용병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바로 우설금.
어쩐지 어제 맹이도의 눈빛이 이상하더라니. 이놈이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호랑이 코털을 건드렸나 보다. 얼핏 그런 기미가 보였는데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설금에게 걸렸으니 당연히 대사형 쪽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하아, 그나저나 망했네. 협상할 건더기가 사라져버렸어.’
우설금의 행동을 질책할 생각은 없지만 다 된 밥이 망가진 판국이라 아쉽긴 했다.
태연한 주석하의 반응에 엄소교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너! 뭔가 알고 있구나?”
“에이,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도 밤새 여기 있었는데.”
“그, 그렇긴 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소궁주 내상, 치료해요? 말아요?”
“그, 그게 급하게 치료할 필요가 없어졌잖아? 그래서…….”
엄소교가 말끝을 흐렸다. 주석하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짐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콰앙!
엄소교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 이거 뭐야?”
맹이도가 죽었으니 이제는 별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엄소교와 주석하는 서로를 쳐다보다 황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빙궁의 정문이 뿌리째 뽑혀 있었다.
맹이도가 쳐들어왔을 때도 일어나지 않았던 황당한 사건이었다. 정문 옆으로 빙궁의 호위무사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고 주변에는 떨어져 나간 문짝이 반파되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설사 태풍이 몰아쳐도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엄소교가 버럭 소리치며 문 앞으로 달려갔다.
주석하는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붉은 옷의 여인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우 소저가 사고 쳤구나!”
맹이도 쪽을 박살냈다더니 그것도 모자라 여기에서도 난리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우설금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비정상적인 정서가 있다. 그것이 단순한 성장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의 결여인지 분별이 쉽지 않지만.
몰려든 호위병들은 정문을 박살 낸 우설금의 신위를 보았기에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우설금에게서는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싸늘한 기운이 뻗어 나와 상대를 주눅 들게 하고 있었다.
우설금을 확인한 엄소교가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
“너, 넌! 여기에 왜?”
“주 공자 어디 있어?”
엄소교가 다급하게 주석하를 찾았다.
주석하가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나, 여기 있어요.”
그제야 우설금에게서 뿜어지던 살기가 줄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주석하가 살짝 눈을 부라리며 우설금을 나무랐다.
우설금이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여자도 나를 겁낼 때가 있나? 의외의 반응이 신선했다.
“호,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해서…….”
“하아! 그럴 일 없습니다.”
주석하의 긴 한숨에 그제야 우설금도 뭔가 잘못됐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우설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어차피 그녀에게 계획을 말해준 적도 없고 그녀도 그가 북해에 온 목적을 정확히 모르니 그녀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어정쩡한 태도에 엄소교가 눈썹을 쓱 올리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주 소협, 이거 어떻게 해결할래요? 따라와요!”
아무래도 극한빙백신공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대문값을 물어줘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