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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43화 (143/273)

143화 한빙담 (1)

북해빙궁 소궁주 구양상은 친위대장인 엄소교의 보고를 받았다.

“소궁주님, 그게…… 그날 봤던 여자 있죠? 빨간 옷 입었던 여자, 그 여자가 한 짓입니다. 그 여자가 맹이도 대사형을 죽이고 그쪽 진지를 완전히 박살 내놨어요.”

“붉은 옷?”

“억울하지만 나보다 쪼금 잘생긴 여자 있잖아요.”

당연하게도 구양상은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날 전쟁 중에 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주석하와 함께 있던 여자라고 하니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녀를 치료해준 주석하의 괴이한 행보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오늘 아침에 우리 궁문을 뜯어놨지 뭐예요.”

“궁문을? 그게 가능해?”

“그러게요. 그 여자가 어마어마한 고수인가 봐요.”

구양상은 침묵에 잠겼다. 생각할수록 주석하와 홍의녀가 보통 인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들은?”

“가둬놨어요. 물론 감옥은 아니고요. 문을 부쉈으니 변상을 받아야…….”

구양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맹이도를 죽이고 문을 부술 정도면 북해빙궁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감옥에 가두면 감옥도 부술 텐데? 맹이도 한 사람의 반란으로 벌벌 떨던 그들이 맹이도를 죽인 그 홍의녀를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자칫 변상은커녕 화를 자초할 우려가 있었다.

“그럼 이제 반란은 마무리된 거지?”

“그렇다고 봐야죠. 아, 아직 잔챙이가 남긴 했어요. 대사형을 따르던 사제 둘…….”

그 두 사제의 생사는 불분명했다. 그들은 대사형 맹이도와 유달리 친했던 자로 맹이도가 반란을 꿈꾸고 궁을 떠났을 때 함께한 인물이다. 당연히 살려둘 수 없으니 죽여야 하는데 그들의 무공 수준을 보면 만만찮다. 그들을 확실하게 상대할 인물은 빙궁 내에 소궁주인 자신과 엄소교뿐이니까.

그래도 맹이도가 죽어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천만다행이고 시간을 벌었다. 이 모든 성과는 주석하와 그 홍의녀 덕분인데 하필 궁문을 부쉈다니 공과를 따지기가 모호해졌다.

사실 빙궁 편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라도 끝났으니. 그 두 사람에게 상을 내려야 하나? 아니면…… 그가 요구한 극한빙백신공을?”

구양상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엄소교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주 소협 있잖아요, 제가 보기엔 정말 안 됐더라고요.”

“뭐가?”

“그 홍의녀가 정말 괴물이라…… 오늘 입구에 딱 서 있는데 한기를 풀풀 날리는 게 완전 저승사자더라고요. 보는 순간 오금이 저려서……. 주 소협도 평소 그런 여자에게 쥐여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별걱정을…….”

“그 여자가 예쁘기는 또 엄청 예뻐서……. 하여튼 주 소협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평생 얻어맞으며 살 것 같아요.”

구양상은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엄소교가 사물을 보는 눈이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거짓은 아닐 것이다. 어제 본 주석하는 그리 고수가 아니었으니 엄청난 고수인 여자 옆에서 얼마나 시달릴지 눈에 선했다.

아마 극한빙백신공을 원하는 이유도 그 여자에 필적할 무공을 배우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 여자와 싸우겠다는 뜻보다는 그나마 어깨라도 좀 펴고 살려고…….

“그래서 주 소협이 조금…… 불쌍해 보이니 신공을 알려줘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머뭇거리면서 엄소교가 먼저 제안했다.

구양상도 비슷한 해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극한빙백신공이 북해빙궁의 중요한 무공이긴 하지만 외부인이 익히려면 제한이 많다. 무엇보다 완벽하게 연성하려면 한빙담에서 연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취에 한계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신공 구결을 절반밖에 모르니 전수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물론 신공을 타인에게 전수하지 않도록 서약을 받아야 한다.

주석하 일행이 이번 내전에서 이룬 공을 생각하면 충분히 신공을 줄 수 있다. 게다가 그녀의 내상을 빨리 치유할 수 있다면 더 좋다.

비록 급한 불은 껐으나 반란에 가담했던 사제 둘이 남은 이상 얼른 내상을 완치해야 한다.

생각을 굳힌 구양상은 엄소교에게 지시했다.

“그럼 구 소협과 그 홍의 낭자를 불러오라.”

**

“넌 이제 큰일 났어. 소궁주께서 많이 화가 나셨거든.”

“네?”

“무려 궁문을 부쉈잖아? 그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너 돈 많아?”

“아뇨.”

“그럼 어쩔 수 없네. 몸으로 때워야지.”

두 사람을 소궁주에게 데려가는 동안 엄소교가 킥킥 웃으며 엄포를 놨다.

그녀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어려있어 진심이 아님을 눈치챘지만 주석하는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옆에서 따라오는 우설금의 눈치를 보니 그녀는 별달리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부분에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문이 얼마냐고? 그거 다 갚으려면 한…… 십 년은 이곳에서 죽어라 일해야 할걸?”

연신 재잘대던 엄소교가 우설금을 쓱 살피며 말을 이었다.

“뭐, 너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면 옆에 여자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본인이 도마에 올랐음을 알아챈 듯 우설금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헉!”

우설금에게서 뻗어 나오는 싸늘한 살기에 엄소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우설금을 본 이후로 오금이 저려 입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첫날 봤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지금 보니 과연 맹이도를 제압할 무공을 지닌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 북해빙궁에서는 저 여자를 감당할 방법이 없다. 당연히 친위대장인 그녀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여자 옆에서 주눅이 든 주석하가 불쌍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곳 북해까지 와서 신공을 알려달라고 사정할까. 역시 주석하가 신공을 원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저 여자 앞에서 기를 펴보려는 의도가 확실하다고 홀로 짐작했다.

어제와 달리 소궁주 구양상은 탁자에 앉아서 그들을 맞이했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탁자 맞은편에 앉아 차를 대접받았다. 구양상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기에 주석하는 안심했다.

“대사형 측 반란군을 처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세를 크게 졌네요.”

구양상이 감사를 표했다.

문을 부순 죄가 있기에 주석하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말인데…… 주 소협이 손수 해결해주셨으니 저도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다행히 극한빙백신공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소궁주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제 협상 때 제 내상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셨죠?”

“물론입니다.”

“대사형이 죽어서 당장 급하진 않지만 대사형을 따르던 사제 둘이 남아 있어서 아무래도 빨리 내상을 치유하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그래서…… 내상을 치유하는 동안 극한빙백신공 구결을 알려드릴까 해요.”주석하는 어떤 식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내상을 치유하려면 아무래도 한빙담이 유리하다. 그가 빙군의 내력을 끌어내기에도 한빙담이라면 훨씬 자연스럽다.

“다만 저는 현재 극한빙백신공의 구결을 절반밖에 몰라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면…….”

“혹시 한빙담을 구경해볼 수 있겠습니까?”

주석하의 요구에 구양상과 엄소교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주 소협, 한빙담은…… 이제 못 가. 거기 들어가려면 궁주의 신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거 분실했거든. 물론 극한빙백신공을 제대로 연마하려면 한빙담에서 내력을 모아야 하는 건 맞는데……”엄소교가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북해빙궁이 당면한 모든 문제는 빙군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대사형의 반란과 극한빙백신공이 실전될 위기에 처한 것까지. 빙군의 죽음은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에 주석하는 내심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

“문 앞이라도 구경해봤으면 합니다.”

완강한 주석하의 태도에 고민에 잠겼던 구양상이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구양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구양상을 따라 궁전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깊이 들어간 그들은 미로처럼 보이는 복도를 통해 꽤 멀리 이동했다. 궁전 지하에 이처럼 복잡한 통로가 있다는 사실에 주석하는 새삼 놀랐다.

“한빙담은 북해 아래에 자연적으로 생긴 동혈에 있어요. 북해의 한기가 집약된 작은 연못이죠. 그곳에서 역대 궁주들은 한기를 몸에 끌어들여 내공을 쌓았죠. 즉 북해빙궁의 폐관수련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이동 중에 구양상이 잡다한 설명을 계속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복도의 끝에 닿았다. 막다른 복도에는 커다란 석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석벽 중앙에는 육중한 석문이 위압적으로 닫혀 있었다.

“이 석문 너머에 한빙담이 있어요. 아쉽게도 지금은 이 석문을 열 방법이 없어요. 오직 궁주의 신물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죠.”

주석하는 석문에 새겨진 문양을 살폈다. 북해빙궁을 의미하는 문양들이 석판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감탄사를 연발했다.

한참 살핀 후에 주석하는 익숙한 문양을 발견했다. 바로 북빙패에 새겨져 있는 문양과 정확하게 음양이 뒤집힌 문양이다.

“어제 협상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알죠. 당신은 맹이도를 처리하고 내상을 치료해준다고 했고 저는 그 보답으로 극한빙백신공을 전수해준다고 했어요.”

“하나 더 있었죠.”

“흠, 그게…… 아! 주 소협이 뭔가 선물을…….”

“바로 이겁니다.”

주석하는 품에서 북빙패를 꺼냈다.

구양상과 엄소교의 눈이 동그래졌다. 빙군이 죽으면서 사라졌던 북빙패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게 어떻게…….”

“제가 사천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으셨군요. 사천에는 사천당문이 있고 사천당문에서 빙군이 돌아가셨습니다.”

“아!”

입만 벌리던 구양상의 안색이 갑자기 확 변했다.

“설마 당신이 사천당문의…….”

“아뇨, 전 사천당문과 전혀 관련 없습니다. 우연히 북빙패를 얻었고 돌려주려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구양상과 엄소교는 혼란스러웠으나 주석하 옆에 있는 우설금 때문에 추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진작에 북해빙궁에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또 이렇게 북빙패를 돌려줄 리도 없다. 어쨌든 지금까지 주석하와 우설금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 않은가. 문을 부순 것만 제외한다면.

북빙패를 받아든 구양상은 연신 감사를 표했다.

“이제 한빙담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한빙담에서 마무리를 짓죠.”

구양상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한빙담에 들어가면 내상 치유에도 유리하고 신공 구결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북빙패를 석문의 지정된 문양에 끼웠다.

그그긍-

석문이 열리고 눈앞에 어두컴컴한 동혈이 나타났다. 동혈은 상당히 깊은 데다 불빛조차 없어 내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엄소교가 재빨리 야명주 하나를 건넸다.

야명주를 든 구양상이 엄소교에게 지시했다.

“넌 우 소저와 함께 이곳에서 대기해라.”

우설금을 한빙담으로 들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눈짓으로 이곳에 남으라고 한 다음 구양상을 따라 동혈로 들어갔다.

예상보다 동혈이 깊었다. 야명주의 빛이 닿는 지역을 제외한 외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한기가 더욱 강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기 때문에 전진하기 어렵겠지만 주석하는 오히려 푸근함을 느꼈다. 그의 단전에서 빙군의 내력이 마치 고향에 온 듯 서서히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꽤 먼 거리를 걸은 끝에 주석하는 작은 연못에 도착했다. 어둠 때문에 시커멓게 보이는 물이 대략 방원 오 장가량 되는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한빙담이에요. 그리고 저기에…….”

구양상이 야명주를 높이 들었다.

주석하의 눈에 동굴 천장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 천장에는 꽤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극한빙백신공의 구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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