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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44화 (144/273)

144화 한빙담 (2)

북해빙궁의 역대 궁주들은 이곳 한빙담에서 폐관 수련하며 무공을 연마했다. 그들은 한빙담에 몸을 담그고 천장에 새겨진 극한빙백신공을 떠올리며 그 오의를 깨졌다. 자연스럽게 한빙담의 한기가 몸에 축적됐고 이것은 극한빙백신공의 근원이 됐다.

지금 극한빙백신공의 구결을 접하자 주석하는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빙군의 내력을 제대로 사용할 무공을 얻게 된 것이다.

“극한빙백신공을 익히려면 한빙담에 몸을 담그는 게 좋을 거예요.”

구양상이 연못을 가리켰다.

주석하는 마다하지 않고 한빙담에 발을 담갔다. 옷을 벗으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북해빙궁의 중요한 장소를 빌려 쓰는 셈이기에 주석하는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연못에서 가부좌를 튼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단전에서 빙군의 기운이 용트림했다.

몇 차례 구결을 천천히 읽고 있자니 구양상이 간략한 풀이를 해주었다. 그녀가 직접 깨우친 것인지 아니면 빙군에게서 배운 것인지 모르지만 덕분에 주석하는 신공에 빨리 입문할 수 있었다.

문득 지금 한빙담이 필요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구양상이라는 점을 잊고 있었다. 구양상은 내상을 치유해야 하는 데다 신공의 후반부를 익혀야 한다.

“소궁주님, 소궁주께서도 함께 하시죠?”

구양상이 멈칫했다. 그녀도 빨리 한빙담에 들어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참이다.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지금 이곳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앉으면 되지요. 옷도 입었고.”

머뭇거리던 구양상이 어쩔 수 없이 한빙담에 몸을 담갔다. 주석하나 그녀나 이곳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구양상은 연못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천장의 구결을 노려보았다. 이번 반란의 주된 원인은 그녀가 대사형 맹이도보다 신공 성취가 낮아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신공 후반부를 익히려 했다.

다만 극한빅뱅신공을 운용하는 순간 가슴이 쓰라렸다. 내상이 진기의 운용을 방해했다. 물론 이곳에서 진기를 운용하면 다른 곳에서보다 내상 치유가 빠르지만 내상 치료에 치중하면 신공을 익힐 수 없다.

구양상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주석하는 비교적 손쉽게 극한빙백신공을 체득할 수 있었다. 모두 빙군의 내력 덕분이다. 처음에는 야생마처럼 날뛰던 내력이 금방 온순해지면서 뜻대로 혈맥을 떠돌기 시작했다.

몇 차례 진기의 일주천에 성공한 후 주석하는 구양상을 힐끔 살폈다.

연못 물에 목까지 담근 구양상은 안면을 찡그리며 고생하고 있었다. 내상이 심한 상태에서 신공의 후반부를 익히려 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주석하는 내상을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을 떠올렸다.

“소궁주님, 내상 치료를 시작할까요?”

“네?”

구양상은 당황했다. 지금 이 순간 내상 치료가 왜 나오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주석하의 약속을 기억한 그녀는 눈을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치료하죠?”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비록 옷을 입었지만 물에 잠긴 상태라 구양상은 당황했다. 하지만 동혈 내부가 상당히 어둡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했다.

“알았어요.”

주석하는 구양상의 뒤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자, 이제 신공을 운용해 보세요.”

주석하의 요구에 구양상은 눈을 감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다시 통증이 엄습했다.

그 순간 주석하의 손이 그녀의 명문혈에 닿았다. 주석하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면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사혈이었고 운기 중이기에 더욱 위험했으나 구양상은 운기를 거두지 않았다.

놀랍게도 명문혈을 통해 주석하의 진기가 들어왔다.

“자, 힘을 빼고…… 운기에 집중하세요.”

주석하는 빙군의 내력을 끌어올려 구양상의 몸으로 진기를 이동시킨 다음 그녀의 내상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구양상은 밀려드는 내력에 깜짝 놀랐다. 주석하가 이처럼 고수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더구나 그의 내력은 그녀의 것과 차이가 없었다. 팔의 외상을 치료할 때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내상 때문에 아픔을 느끼기도 잠시 구양상은 곧 운기조식에 빠져들었다.

빙군의 어마어마한 내력으로 구양상을 치료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불과 몇 차례 일주천을 통해 혈맥을 치유하며 보호하자 그녀의 내상은 순식간에 완치됐다.

주석하는 구양상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사문의 독문 무공을 결단을 통해 그에게 내주었다.

따지고 보면 빙군을 죽인 그는 북해빙궁의 원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구양상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영원히 비밀로 가져가야 한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내력을 끌어올려 더 강하게 구양상의 운기를 도왔다.

순간 구양상은 이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내상이 거의 치유되었기에 주석하가 내력을 물려야 정상이다. 그런데 더 많은 내력이 그녀에게로 넘어오고 있었다.

‘이, 이건…….’

내상 치유를 넘어 그녀에게 내력을 전수하려는 조짐이 엿보였다.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만일 이 상황에서 거부하면 두 사람에게 자칫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으니까.

고오오오-

강력한 기운을 받아들이며 구양상은 운기에 집중했다.

주석하는 지난번 사천당문에서 새롭게 얻었던 빙군의 내력만큼을 구양상에게 전했다. 빙군의 내력은 그가 회귀하기 전 십만대산에서 얻었던 것에 당문에서 흡수한 내력이 더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른 내력에 비해 빙군과 염군의 내력이 훨씬 많았다. 이번 생에서 추가로 얻은 만큼의 내력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빙군 내력의 일부를 구양상에게 전하면 그녀는 곧바로 최강고수 반열에 올라설 것이다. 비록 과거 빙군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한 수준에 이르러 맹이도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아울러 북해빙궁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오오오-

어둠 속에서 구양상은 한빙담에 몸을 담근 채 새로운 고수로 거듭나고 있었다. 동시에 주석하도 빙군의 내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됐다.

**

한빙담으로 통하는 석문 앞에서 우설금과 엄소교는 서로를 관찰하며 멀뚱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간 후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한빙담을 확인하고 주석하에게 신공 구결을 알려주어야 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예상했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두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특히 엄소교는 양쪽으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우설금이 어마어마한 고수임을 알기에 마치 호랑이 앞에 선 생쥐 같은 기분이었다. 우설금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게다가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감감무소식인 구양상이었다. 낯선 남자와 단둘이 저 어두운 곳을 들어갔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주석하의 무공이 소궁주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지금 소궁주는 내상 중인 몸 아닌가.

자칫 기습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두 사람이 청춘 남녀이다 보니 어두운 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점점 이상한 쪽으로 상상이 옮겨가자 엄소교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다시 우설금에게 집중했다.

“하하, 좀 오래 걸리네요.”

긴장된 분위기를 깨트리고자 엄소교는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설금이 말없이 그녀를 노려봤다. 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섬뜩한 눈매에 엄소교는 오줌을 지릴 뻔했다.

“아아, 곧 오겠죠.”

다시 웃음으로 무마한 엄소교는 연신 식은땀을 닦았다.

‘이 여자 대체 뭐야? 이거야 오금이 저려서…….’

평소 이 여인과 같이 다니느라 고생했을 주석하를 떠올리니 절로 연민이 가슴을 메웠다. 괜찮은 남자였는데 이런 무시무시한 여자에게 쥐여살다니.

역시 하늘은 불공평하다. 친위대장인 자신에게 그럴싸한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면 하늘의 불공평이 명확한 사실이긴 한데…….

우설금은 어두운 동혈 깊은 곳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소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시 억누르는 긴장감을 상쇄하고자 엄소교는 어설픈 대화를 걸었다.

“주 소협과는 무슨 사이예요?”

엄소교에게 잠시 시선을 옮겼던 우설금이 말없이 다시 동혈을 쳐다봤다.

“사귀는 사이예요?”

여전히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점차 익숙해진 엄소교는 평소처럼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딱 보니 주 소협이 무공만 좀 강하면 꽤 괜찮은 남자 같아요. 생긴 것도 멀끔하고. 나름 타인을 배려할 줄도 알고. 거기에 비하면 당신은…… 예쁘긴 하지만 남자들이 좋아하기엔…….”긴장감을 해소하려고 급히 말을 토해내다 보니 엉뚱한 쪽으로 잘못 튀었다.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어 우설금을 보니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히이익!’

급히 입을 다문 엄소교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마치 염라대왕 앞에 불려갔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점차 우설금의 시선에서 따끔한 기운이 사라지자 엄소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학습효과가 있어서 우설금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 소궁주님을 보면…… 꽤 다정다감하잖아요? 궁에서도 모두가 좋아해요.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부하에게도 잘해줘요. 아마 남자가 생기면 현모양처가 될 자질도 보이고요. 예전에 맹이도 대사형이 소궁주를 무척 좋아했었는데 전대 궁주께서 허락하지 않았죠. 이젠 남자만 잘 만나면 소궁주님도 안심인데…… 어떤 남자가 채가려나…….”엄소교는 주절주절 입에 올리며 우설금의 눈치를 쓱 봤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빙궁을 안정시키라면 소궁주의 부군이 강해야 하거든요. 주 소협은 무공이 약해서…… 아! 이제 신공을 익히니까 강해지려나? 흐음, 그럼 둘이 천생연분인데? 아니지, 소궁주님이 아까워…….”순간 엄소교는 가슴을 후벼 파는 살기를 다시 느꼈다.

‘허억!’

우설금의 눈치를 살펴보니 어째 시선이 심상찮았다.

‘주 소협은 이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랬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렇다고 둘이 연인관계라 보기엔…….’

아무래도 몸조심해야겠다는 직감에 엄소교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동혈 내부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점점 그녀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하아,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설마…… 한빙담에서 같이...?”

그 순간 엄소교는 자신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쾅!

“으악!”

난데없이 석벽에 몸을 부딪친 엄소교는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벽으로 날아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으으, 무서운 년…….’

엄소교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여자와 도무지 맞지 않았다. 입을 열 때마다 두들겨 패니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녀는 우설금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점차 날카로운 기운이 그녀를 엄습했다. 우설금에게서 뻗어 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 우설금도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이거 자칫 오늘 대형 사고를 치겠는데……. 소궁주가 사고를 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엄소교는 쪼그라드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려 애썼다. 다만 우설금의 기운이 점점 강해져 그녀의 가슴도 더욱 오그라들었다.

어째 동혈을 노려보는 우설금의 태도가 심상찮다.

순간 우설금의 신형이 동혈 안으로 번개처럼 쏘아졌다.

“어?”

놀란 엄소교도 급히 우설금의 뒤를 따라 안으로 달려갔다.

짙은 어둠 속으로 우설금이 폭발적으로 질주했다. 엄소교는 경공을 펼치며 그녀를 따라가려 했으나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으으, 나도 같이 가자고! 으악! 엄마야!”

주위를 칠흑 같은 어둠이 감쌌다.

저 멀리 어슴푸레한 야명주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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