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45화 (145/273)

145 한빙담 (3)

주석하는 구양상의 뒤에 앉아 명문혈로 진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녀의 몸 내부에서 격동하는 진기의 반응이 느껴졌다. 애초에 품은 내력보다 훨씬 많은 내력이 밀려들자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내상이 치유되어 구양상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단계만 참아낸다면 그녀는 한층 높은 내공 경지에 이를 것이다.

조심스럽게 구양상의 내력을 유도하던 주석하는 막힌 혈맥 앞에 이르렀다. 기의 주요 흐름은 임맥과 독맥으로 나뉜다. 내공의 양이 각 혈맥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지면 더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임독양맥을 타동해야 한다.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을 고수가 되려면 임독양맥 사이의 벽을 부숴야 한다. 임독양맥이 타동되면 내기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 수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임독양맥 타동이라 보면 된다.

당연히 주석하는 예전에 임독양맥을 타동했다. 십만대산에서 흑도팔군이 내공을 전수할 때였다.

‘가능할 것 같은데?’

주석하는 구양상이 이 단계 직전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이 순간 조금만 도와주면 그녀는 한 단계 성장이 가능하다. 만일 임독양맥이 타동되면 구양상에게도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다.

구양상도 이를 깨달은 듯 조심스럽게 시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주석하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다시 시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석하는 내력을 쏟아부으며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달했다.

구양상도 거부하지 않았다.

주석하의 인도로 구양상의 내부를 휘감던 기운이 임독양맥을 뚫으려고 몰려갔다. 구양상의 몸에 한차례 경련이 일었다.

“으음.”

구양상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최초의 시도는 실패했고 재차 내력을 모았다.

구양상은 몸 내부에서 번지는 충격을 가라앉히며 이를 악물었다. 타동의 기미가 보였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그그극-

갑자기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주석하는 애써 무시하고 운기를 계속했다. 다시 임독양맥을 뚫으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쿠르르르-

심상치 않은 소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주석하는 운기를 유지한 채 정면을 쳐다봤다.

희미한 야광주 불빛이 닿은 천장에 구결이 새겨져 있고 그 암벽 너머에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주석하는 소음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쩌저저적-

갑자기 천장 암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동혈의 붕괴 조짐이 일었다. 소음은 점차 잦아지고 강해졌다. 천장 암벽에 생긴 균열도 더욱 뚜렷해졌다.

‘위험하다!’

주석하는 자신의 앞에 앉은 구양상을 살폈다.

지금 그녀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시 임독양맥을 뚫으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구양상의 몸이 진동했다.

지금은 시도를 중단할 수도 계속할 수도 없는 모호한 상황이었다.

구양상은 주변 상황을 전혀 모르는 듯 전력을 기울여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 내부에 쌓여있던 내공과 주석하가 전해준 빙군의 내력이 합쳐지면서 무궁무진한 내력이 폭발적으로 혈맥을 타고 돌았다.

쿵!

재차 내력이 임독양맥을 뚫으려고 혈맥을 건드렸다. 한빙담의 기운이 두 사람을 감싸고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쩌저적!

급기야 천장 일부가 갈라지며 그 틈새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쿠쿠구쿵!

천장에서 번진 균열이 측면 벽으로 번졌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

주석하가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천장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북해의 물이 동혈로 쏟아졌다. 주석하는 황급히 내력을 강화하여 두 사람 주변으로 호신강기의 막을 쳤다.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천장에서 부서진 암석이 무너지면서 무지막지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붉은빛이 동혈을 갈랐다.

우설금이 허공을 질주하고 홍철산이 펼쳐져 암석과 물을 막았다.

그사이 주석하는 구양상과 함께 임독양맥 타동을 재차 시도했다.

쿵!

마지막 기회였다. 하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임독양맥이 타동되면서 구양상의 몸 내부에서 내공이 혈맥을 막힘없이 질주했다. 성공이다!

이제 주석하가 할 일은 사라졌다. 그는 호신강기를 강화하여 떨어지는 물과 암석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측벽이 붕괴했다.

순식간에 동혈 내부에 물이 쏟아져 들어와 소용돌이쳤다. 호수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물이 차올랐다.

“젠장!”

주석하는 다급하게 구양상을 붙잡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물이 들어오면서 짓누르는 수만 근의 압력이 그의 몸을 꼼짝하기 힘들게 했다.

“얼른 나가요!”

우설금이 홍철산으로 물을 튕겨내며 소리쳤다. 그녀는 내력을 이용해서 붕괴하는 벽을 지지하고 쏟아지는 물을 차단하고 있었다.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구양상을 안은 채 백변환영보를 펼쳐 암석과 물을 피했다.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이번에는 화판답공이 그의 몸을 받쳤다. 그의 신형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그가 탈출한 직후 우설금이 경공을 사용해서 재빨리 따라붙었다.

이제야 막 무너진 동혈로 들어오던 엄소교는 되돌아오는 주석하와 우설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뒤에서 밀물처럼 덤벼드는 거대한 물보라였다.

“으아악!”

엄소교는 놀라서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느새 주석하와 우설금은 그녀를 스쳐지나 입구로 질주하고 있었다.

뒤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밀물에 엄소교는 혼비백산해서 앞으로 달렸다.

“나도 데려가야지! 으아아!”

엄소교는 이 순간 경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달려서 우설금을 따라갔다.

하지만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도 살려달라고!”

엄소교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생각 없이 동혈로 들어온 과거의 자신을 책망했다.

**

간신히 석문을 통과한 주석하는 여전히 석문에 꽂힌 북빙패를 발견했다.

그는 구양상을 안은 채 북빙패를 회수한 다음 열심히 계단을 올라갔다. 바로 뒤를 우설금이, 그 뒤에는 엄소교가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와 지하 복도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주석하는 돌아서서 상황을 점검했다.

밀려들던 물이 지하를 완전히 채우고 계단 중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북해의 수면 아랫부분만 물에 잠겨 궁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물론 한빙담은 완전히 물에 잠겨 앞으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극한빙백신공은…… 구양상은 끝까지 완전히 암기했으려나? 당연히 주석하는 모두 암기했다. 신공의 성취는 십이성은커녕 육성에도 이르지 못했으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주석하는 품에 안은 구양상을 확인했다.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임독양맥을 타동한 후 마무리 운기를 하지 못해 약간의 내상 징후가 있긴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아니기에 곧 완치될 것이다.

아마도 구양상은 예전의 빙군에 필적하는 고수로 발돋움하지 않을까.

주석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구양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 주 소협!”

그제야 헐레벌떡 도착한 엄소교가 재빨리 눈치를 줬다.

“네?”

“소, 소궁주를…….”

엄소교가 팔을 뻗었다.

그때야 주석하는 무슨 문제인지 알아챘다. 물에 흠뻑 젖어 구양상의 옷이 피부에 완전히 들러붙어 있었다. 오늘따라 은빛 갑옷이 아닌 순백의 비교적 하늘하늘한 옷감이었기에 물에 젖은 옷은 투명하게 변했다.

덕분에 구양상의 피부와 몸의 윤곽이 비교적 또렷하게 눈앞에 어른거렸다.

“헉!”

깜짝 놀란 주석하는 재빨리 구양상을 엄소교에게 넘기려다 다시 한번 신음을 토했다. 엄소교 또한 물에 젖은 꼴이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으악!”

무심코 손을 뻗던 엄소교가 다급하게 몸을 가렸다.

그 순간 주석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날카로운 살기를 의식했다. 우설금이 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절로 간이 오그라든 주석하는 우설금을 향해 어설픈 웃음을 전달했다. 우설금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제야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 살벌한 와중에 주석하는 입을 쩍 벌렸다.

우설금 또한 물에 잠겼었기에 옷이 완전히 젖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홍의여서 백의의 구양상만큼은 아니었으나 주석하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런 우설금의 모습을 예전에 제갈세가 상춘원에서 본 적이 있었건만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 우설금이 미간을 확 구기더니 홍철산을 활짝 펴서 시선을 차단했다.

엄소교는 재빨리 구양상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주 소협, 소궁주께서 어떻게 된…….”

“곧 정신 차리실 겁니다.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었다는 말에 엄소교 또한 미간을 확 구겼다.

엄소교와 우설금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주석하는 재빨리 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정말 별일 없었다니까요.”

“별일 있었으면 넌 죽었어! 근데 없었던 거 맞아? 우리 소궁주가 매력이 없다는 거야?”

엄소교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우설금은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진짠데……. 있으란 거야, 말라는 거야…….”

주석하는 어이가 없어 후다닥 처소로 돌아갔다.

**

북해는 매우 넓었다.

빙궁을 나와 물가를 걸으면서 주석하는 이국적인 풍경을 만끽했다. 군데군데 남은 얼음과 눈은 겨울이 되면 일대를 하얀 천국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주석하는 빙궁에 온 목적을 달성했기에 떠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소궁주 구양상은 금방 몸을 회복했다. 임독양맥을 타동한 그녀는 엄청난 내공의 증가를 순조롭게 받아들였고 극한빙백신공에서도 충분한 성취를 보였다.

덕분에 주석하도 신공을 함께 익혀 꽤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이제는 빙군의 내력을 본신의 내력처럼 운용할 수 있었다.

떠나기에 앞서 주석하는 마지막으로 북해 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물가에 앉아 석상처럼 정지해있는 붉은 점이 보였다. 우설금이다.

최근 들어 그녀가 이처럼 홀로 멍하니 북해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조용히 다가간 주석하는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해요?”

“…….”

대답 없이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북해로 돌렸다. 이런 태도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녀가 조금 우울해 보였다.

“다른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줄래요?”

묘책을 떠올린 주석하는 흑검소를 꺼내며 물었다.

그제야 우설금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날…… 상춘원에서 우리 둘이 연합하여 살존과 만겁묵존을 공격했었잖아요?”

죽음의 문턱에서 생사를 건 전투였기에 그때의 장면은 하나하나 완벽하게 기억났다. 다만 지금도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점은…….

“그때 우리 둘이 합이 잘 맞았죠? 이전에 한 번도 연습해본 적이 없었잖아요?”

살존과 만겁묵존의 파상 공세를 우설금이 홀로 상대하는 동안 주석하는 악군의 음공을 이용해서 측면지원했다. 그 싸움에서 우설금이 큰 역할을 했었지만 천무태평악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해봐요. 내가…… 음공 수련을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죠? 그때처럼 함께 어울려봐요. 합을 맞추어서.”

주석하는 흑검소를 입에 대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사실상 그녀의 의사를 묻지 않은 반강제적 요구였지만 우울한 기분의 우설금에게서 변화를 끌어내고 싶었다. 한바탕 무공을 펼치며 힘을 쓰면 가슴을 억눌렀던 감정이 풀어지지 않을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짐작되진 않지만.

물끄러미 주석하를 쳐다보던 그녀가 홍철산을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해보죠. 가능하죠?”

주석하의 요구에 우설금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태평악의 퉁소 소리가 북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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