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46화 (146/273)

146화 한빙담 (4)

구슬픈 음률이 아름다운 풍경에 스며들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검푸른 북해의 물이 퉁소 소리와 어우러졌다.

주석하는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퉁소에 몰두했다. 상춘원 격전 이후 진심으로 천무태평악을 연주하기는 처음이었다.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우설금은 홍철산을 펼쳤다. 비단으로 만든 우산에 그려진 모란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음률을 타고, 꽃잎을 휘날리며 우설금의 붉은 옷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란 하늘과 그 빛을 반사하는 더 파란 물에 붉은 점이 찍혔다. 그녀의 신형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치기 시작했다.

- 오래도록 기다렸죠.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 단아한 기품, 숨길 수 없는 표정. 그리움만 쌓였죠.

우아한 그녀의 동작이 빨라지고 내공이 실린 기파가 물결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그녀도 내력을 끌어올려 최선을 다해 음률과 일체가 됐다.

점차 곡이 빨라지며 주석하의 주위를 음파가 휘몰아쳤다.

그 음률에 호응하듯 우설금의 홍철산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동작은, 홍철산의 움직임은 음률을 타고 점점 격해졌다.

우우우웅-

천무태평악의 음공으로 형성된 강기의 파편에 북해가 출렁이며 진동을 일으켰다. 우설금의 신형은 우아하게 파도 위를 떠다니고 홍철산에서 발산하는 산강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파- 파- 파- 파-

무림 최강에 이른 두 사람이 전력으로 펼진 합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점차 파도가 높아지고 북해는 마치 폭풍을 만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두 사람의 무공이 강할수록 서로 어긋날 가능성이 큼에도 흑검소의 천무태평악과 우설금의 홍철산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위력을 증폭했다.

천무태평악이 절정에 이르면서 우설금의 몸동작도 더욱 격해지고 빨라졌다. 단천마공이 패도적인 위력을 뿜어냈다.

그녀는 천무태평악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꽃잎이 흩날려 물 위에 점점이 뿌려지는 것처럼 홍철산에서 뿌려지는 모란이 북해를 가르고 격동을 일으켰다. 춤을 추는 그녀는 천상의 선녀라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다.

우설금의 매력이 폭발했다!

다만 그들의 주변으로 뿌려지는 살기와 강기의 파편이 회오리처럼 물 표면을 난도질하고 있어 섬뜩한 대조를 이뤘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

천무태평악이 마무리되면서 우설금의 동작 또한 점차 느려졌고 홍철산에서 피어났던 모란 역시 희미하게 사라졌다.

천지의 조화를 불러왔던 음률과 이에 맞춘 격렬한 춤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들끓었던 주석하의 내력이 점차 잔잔해졌다. 다만 주석하는 눈을 감을 수도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 우설금 때문이다. 그는 퉁소를 거두고 우설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방금 본 그녀의 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신비로웠다. 그녀가, 아니 두 사람이 일으킨 북해의 파도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그 파도 위를 넘나드는 우설금은 환상 그 자체였다.

상춘원의 경험으로 천무태평악과 우설금이 잘 어울리리라 짐작하고 있었으나 드러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모두 천무태평악에 잘 맞춰준 우설금의 능력 덕분이겠지만 주석하는 그녀와 자신이 정말 잘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결과는 무공이 아니라 마음의 일치와 화합 때문일 것이다.

천무태평악의 위력은 우설금을 만나면서 배가 되었고 우설금의 홍철산 위력도 천무태평악과 어우러지면서 한층 강화됐다.

“하아!”

우설금이 가쁜 숨을 내쉬며 주석하를 쳐다봤다. 춤을 끝낸 그녀는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초강고수인 그녀에게 물 위에 뜬 자세는 별것 아니겠지만 바라보는 주석하게는 색달라 보였다.

파란 물과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옷이 나부끼는 그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이 순간 주석하는 확실히 깨달았다. 우설금이 없으면 그녀를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그녀를 잡고 싶다고. 그녀와 일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그녀가 마교의 인물이란 사실은 머릿속을 떠나고 없었다.

“괜찮았어요?”

우설금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석하는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피식 웃는 우설금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마도 그녀는 방금 선보였던 춤이 주석하에게 얼마나 자극적이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도움은 되었나요?”

“네, 무척.”

“천무태평악…… 곡이 좋아서 따라 하기 편했어요. 그 음파에 실어 나의 무공을 증폭하는 것도. 뭔가 잘 맞는 느낌이에요.”

우설금도 예상보다 훨씬 좋았던 듯 미소를 보냈다.

실제 우설금은 천무태평악에 맞춰 춤을 춘 게 아니라 산공(傘功)을 펼쳤을 뿐이다. 마치 검을 가진 자가 검무를 추듯이. 다만 그 산공이 주석하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 화려한 춤이었다.

“방금 우리 둘이 어우러진 합공은 정파십존 세 사람과 붙어도 자신 있을 만큼 위력적이었습니다.”

주석하도 짧은 평가를 내놓았다. 정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둘이 연합하면 천하의 누구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우설금이 물 위를 미끄러지며 그에게로 왔다.

다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북해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서 떠나면 어디로 갈 건가요?”

“십만대산.”

우설금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상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럼 사천까지는 함께 가겠네요.”

주석하는 그녀와 조금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중원으로는 자주 나오나요?”

“나도 몰라요.”

그녀의 음성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래요, 그때까지 함께 다녀요.”

주석하는 차마 마교로 돌아가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전생의 경험으로 보아 앞으로 몇 년간 중원과 마교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비록 그는 중원을 대표하는 정파에서 한발 물러나 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는 중원과 그녀 사이에서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우 소저도 내가 그리울까?’

내심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녀이기에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지금 그녀의 미소로 보면 그녀의 마음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보였다.

주석하는 옆에 앉은 우설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북해의 푸른 물로 시선을 돌렸다.

물 위에서 붉은 그림자가 환상이 되어 어른거렸다. 방금 보았던 우설금의 춤사위가 지금도 펼쳐지는 것처럼 여전히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 장면은 아마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소궁주 구양상이 원정을 다녀온 날 저녁, 때아닌 연회가 펼쳐졌다.

원정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연에 주석하와 우설금도 참석하게 됐다.

오늘따라 처음 접하는 물고기 요리가 무수히 많이 나왔다. 북해 특산이라 했다.

“우리 소궁주님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알아? 대사형을 따르던 사제 둘을 일격에 그냥 날려버렸는데…….”

엄소교가 평소처럼 장황하게 썰을 풀었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했고 구양상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구양상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주석하의 눈치를 봤다.

“예전 같았으면 막상막하였을 텐데 단 일 초식에 끝내버리더라고! 그러니까 주변의 반란군 녀석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모조리 무릎을 꿇지 뭐야…….”구양상의 무공이라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던 소궁주가 아니었다.

빙군이 사라진 후 그녀가 빙궁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빙궁의 무공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사형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궁주 자리를 눈독 들였었다.

이제 그녀는 북해에서 최강 고수로 발돋움했고 이번 내란 진압에서 위력적인 무공을 선보인 만큼 한동안 빙궁 체제는 안정될 것이다.

“소궁주님을 향해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와아! 내가 눈물이 막 쏟아져서…… 흑흑.”

엄소교가 그때의 감격을 되살리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한 서린 눈물에 주석하는 그동안 구양상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원인 일부를 책임지고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주 소협과 우 소저 덕분입니다.”

구양상이 진심으로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별말씀을.”

주석하는 예의상 대답하고 옆에 앉은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우설금은 평소처럼 말없이 젓가락질만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우설금은 더욱 안색이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구양상은 내심 한숨을 쉬었으나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요리를 권했다.

내상이 완쾌된 후 그녀는 주석하와 함께 극한빙백신공을 연마할 시간을 몇 차례 가졌었다. 그 시간은 그녀에게 무척 도움이 됐다. 아마 주석하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준 북빙패가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신공은 발전이 매우 더뎠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구양상은 주석하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는 예전에 대사형 맹이도에게 의존하던 감정과는 달랐다. 그녀는 수시로 주석하를 세밀히 관찰했다.

안타깝게도 주석하의 옆에는 우설금이란 아름다운 여인이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다만 그녀는 우설금의 태도에서 나름 확신했다. 우설금은 모두에게 얼음장 같은 싸늘한 기운을 풍겼으나 유독 주석하 앞에선 그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주석하와 함께 있는 장면을 들키면 우설금의 냉담한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자연히 그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봐야 했는데 우리 소궁주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너 같은 하수는…… 아, 넌 하수가 아니었지……. 하여튼 ‘소궁주께서 무척 멋있었다’ 그런 뜻이거든. 너도 그렇게 보이지 않냐?”엄소교가 은근슬쩍 주석하의 마음을 물었다.

“소궁주님이야 항상 멋있으시죠.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요.”

주석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엄소교가 과장된 감탄사를 연발했다.

구양상은 엄소교의 의도를 눈치채고 눈짓으로 말렸다. 눈치 없는 엄소교는 구양상의 마음을 짐작하고 주석하의 마음을 떠보려 하고 있었다.

정작 구양상은 이 순간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주 소협과의 인연은 어렵겠구나.’

한숨을 내쉬며 구양상은 화제를 전환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네, 내일 떠날 생각입니다.”

예상보다 빠른 헤어짐에 구양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엄소교가 버럭 소리 지르려는 순간 구양상이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함께요?”

“네, 방향이 같거든요.”

주석하가 우설금과 눈빛을 맞추며 대답했다.

구양상은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둘이서 함께 강호를 주유하는 우설금이 무척 부러웠다. 그녀는 태어나서 북해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 북해에 다시 들러주세요.”

주석하는 그녀의 환대에 고마움을 표했다.

엄소교는 구양상의 마음을 짐작하고 내심 탄식했다.

‘한빙담에 들어가셨을 때 정말 사고 쳐버리시지……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는데…….’

**

설매검화 유비연은 자하검존의 거처인 정심각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벌써 며칠째일까. 그녀는 사부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기에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오늘은 꼭 뵙고 말씀드려야 해.”

유비연은 주먹을 꾹 쥐고 닫힌 사부의 침소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고집이 묻어났다.

강한 햇볕이 서쪽으로 기울 때쯤 정심각의 문이 열리고 하얀 수염을 날리는 노인이 나타났다. 바로 자하검존이다.

“사부님!”

유비연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자하검존의 안면에 노기가 어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냐?”

“하북팽가의 움직임을 무림맹에서 지지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

“어떻게 그런 일을…….”

“흑검문은 사파다. 얼마 전 덕양의 백호문과 검우방에서 흑검문의 만행을 알려왔었다. 무림맹이 정파 문파를 지원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자하검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비연의 가슴을 후벼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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