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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47화 (147/273)

147화 모여드는 군웅 (1)

자하검존의 목소리는 매우 엄해서 유비연은 말문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며칠동안 기다렸던 기회가 왔기에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왜 하필이면 하북팽가입니까?”

“하북팽가가 흑검문을 치겠다고 무림맹에 요청했다. 무림맹이야 승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유비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북팽가의 청운괴도 팽두석이 원정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는 부친인 살존의 복수를 하려 하는 겁니다.”

“알고 있다.”

“그게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사부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날 제갈세가에서 십존 세 분이 주석하 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살존의 죽음은…… 그 책임을 흑검문에 물을 수 없다는 것도요.”유비연은 피를 토하듯 하북팽가의 부당함을 늘어놓았다. 그날의 사건을 들은 이후 그녀는 정파에 대한 회의감이 더욱 짙어졌다. 정파의 토대인 무림맹과 무림맹의 군사인 만사지존까지 그녀가 보기에 모두 위선자로 보였다.

백번 생각해도 주석하를 사지로 유인해서 정파십존 셋이 심판한 사건은 정파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추태였다. 그 와중에 십존 셋과 주석하까지 모두 사망한 것은 그녀에게도 충격이었다.

주석하의 무공도 놀라웠지만 어떻게 죄 없는 자를 매도하여 그렇게 죽일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파란 사실이 부끄러웠다.

흑검문을 하북팽가와 비교할 수는 없다. 특히 주석하가 없는 흑검문이라면.

그녀는 흑검문을 방문했었고 그곳에서 주석하의 부친과 여동생을 만났었다. 그들이 얼마나 오순도순 정겹게 살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았었다. 그랬기에 하북팽가의 흑검문 원정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었다.

“사부님! 하북팽가를 막아야 합니다.” 자하검존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비연아, 너도 알지 않느냐? 두 문파의 은원에 타인이 개입할 수 없다. 하북팽가에서는 흑검문을 살존을 죽인 원흉으로 지목했다. 이제는 두 문파의 문제일 뿐,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원흉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연아, 강호에서 사파를 척결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유야 어떠했건 우리는 정파인 하북팽가를 지지해야 한다.”

“사부님!” 비연의 외침에 자하검존이 마침내 분노를 터트렸다.

“유비연! 넌 돌아가서 참선하도록 해라!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반성하라!”

자하검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쪽으로 사라졌다.

“아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유비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지 않아도 흑검문의 최후가 그려졌다. 단란한 한 가족을 무너트리는 팽두석과 쓰러지는 주소은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유비연은 힘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몇 걸음 걸었을까.

그녀는 나무 뒤에 숨어 자신을 보고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그때 주석하와 함께 풍운채에서 구해 화산파에 입문시켰던 바로 그 어린아이, 명아였다.

“명아야, 넌 왜 여기에…….”

“언니! 오빠가…… 정말 죽었어요?”

유비연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명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흑흑, 지금 오빠네 집안이 위험하다는 것도요?”

유비연은 울음을 터트리는 명아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등을 토닥이는 것뿐이었다.

“언니, 나…… 오빠네 집으로 갈래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절대 안 돼. 그곳은 위험해!”

“그래도 갈래요. 거기 가서 위험하다고, 얼른 도망치라고 알려줄래요.”

“명아야…….”

“오빠한테 은혜를 입었는데…… 모른 척하면 안 되잖아요? 이곳에 와서도 은원을 명확히 구분하라고 배웠는데…… 협과 의를 행하라면서요?”

유비연은 말문이 막혔다. 정의와 협의는 정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녀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엄밀히 따져 정의와 협의가 아니었다.

“난 흑검문으로 갈래요.”

명아가 고집을 부리며 산에서 내려가려 했다.

이곳에 와서 비교적 잘 적응하던 명아였다. 이제 겨우 무공 입문 단계에 들어섰지만 나름대로 자질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명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비연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좋아, 일단 흑검문에 가서 알리자. 명아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명아 탓을 하면서 유비연도 결심했다. 사문에 혼쭐이 나더라도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

해가 지고 끼니를 때우려는 나그네들이 객잔에 모였다.

사천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객잔에는 손님이 많았다. 대부분 상인이었으나 그중에는 무림인도 일부 섞여 있었다.

창가의 구석진 탁자에 세 장한이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그들은 반주로 마신 술이 입맛을 당기자 추가로 술을 시켜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들었나? 하북팽가에서 용병을 모집한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들었지. 유명 무림세가에서 모집하는 용병은 정말 오랜만이잖나?”

“그렇지. 상대가 누군지도 알지?”

“덕양인가…… 한적한 마을에 있는 흑도 문파래. 그 문파의 씨를 말려버린다고 하더라고.”

그들은 술잔을 부딪쳐 흥을 돋웠다. 얼큰하게 술이 돌자 점차 별별 이야기가 나왔다.

“하북팽가가 주도하면 죽을 일은 없겠네. 돈은 많이 주나?”

“엄청 준다는데? 다른 곳의 세 배야, 세 배!”

“바로 신청해야겠어.”

“그런데 하북팽가에서 왜 나섰지?”

“그 흑도 문파가 백호문이라는 정파 문파를 봉문 시켰다네. 무림맹에 몇 차례 지원 요청이 들어갔었는데 하북팽가가 받아들인 거지. 어쨌든 무슨 상관인가? 가서 칼만 들고 있으면 일당이 떨어질 판인데.”

“으흐흐, 그렇군. 좋아, 좋아!”

세 장한이 술잔을 부딪쳤다.

흥에 겨워 연신 술을 퍼마시는 그 자리와 달리 바로 옆의 탁자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탁자의 검은 옷을 입은 청년과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주석하와 우설금이었다.

처음에 두 사람은 옆 탁자의 대화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강호에는 별별 소문이 떠도는 법이니까.

그런데 익숙한 지명과 아는 문파가 나오면서 주석하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하북팽가가 덕양을 왜 침범한단 말인가. 하북과 사천은 중원을 가로질러야 할 만큼 먼 거리에 있다.

저들의 구설에 오른 덕양의 흑도 문파는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흑검문이 분명했다.

주석하의 안색이 굳어지자 우설금 또한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다.

흑검문에 패한 백호문이나 검우방이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한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왜 갑자기 하북팽가가 튀어나오는 걸까. 중원에서 손꼽히는 세가와 시골의 이름 없는 문파가 어떻게 격이 맞을 수 있나?

“팽두석 그 자식이…….”

주석하도 어렴풋하게 그 내면을 눈치챘다. 이것은 정파 문파를 지원한다는 핑계로 살존의 복수를 하려는 팽두석의 계략이 분명했다. 제갈세가에 있을 때도 팽두석과 무열은 그를 노골적으로 싫어하지 않았던가.

물론 주석하도 살존의 죽음을 변명할 생각은 없다. 따지고 들어가면 살존의 행동이 훨씬 비열하지만 어쨌든 살존이 죽었으니 원한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복수는 주석하 자신에게 해야 하지 않나. 지금 그는 무림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사문인 흑검문을? 가족에게 보복하겠다는 발상에 주석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이 분노를 옆 탁자에 쏟아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옆 탁자에서 노닥거리는 자들은 하북팽가나 무림맹 사람이 아니다. 굳이 화풀이할 대상이 아니란 의미다.

우설금이 고개를 갸웃했다.

“팽두석?”

“중원사룡에 그런 놈 있어요. 그때 제갈세가에서 봤었죠. 아마 이 모든 계획을 제갈휘가 뒤에서 획책했을 겁니다.”

제갈휘는 손해 볼 일이 없다. 잘못되면 책임을 하북팽가에 씌우면 되니까. 사실 실패할 부담도 전혀 없다. 흑검문을 지우면 정파의 위상도 높일 수 있고.

당연히 우설금은 팽두석이 누구인지 몰랐고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모든 정황을 이해한 우설금 주위로 한기가 더욱 짙어져 주석하가 만류했다.

두 사람이 옆에서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옆 탁자에서는 대화가 계속됐다.

“많이 지원할 것 같냐?”

“당연하지. 명분 있지, 돈 주지, 위험할 것 없지, 이렇게 좋은 대목이 또 있겠어?”

“하긴, 그놈들은 이미 무림 공적으로 찍혔으니까.”

순간 우설금이 벌떡 일어나려 했다.

주석하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참아요, 저들이 나쁜 건 아니니까.”

왜 우설금이 더 분노하는지 모르겠으나 주석하는 그녀를 달랬다.

“어디에서 집결한데?”

“덕양에 백호문이라고 있나 봐.”

백호문은 봉문하기로 약속한 곳이 아닌가. 주석하는 약속마저 저버린 백호문과 정파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싹 쓸어버릴 걸 그랬나?

주석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빨리 흑검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지금의 흑검문만으로는 절대 하북팽가를 막을 수 없다.

“나도 가야겠어. 돈 벌어야지.”

“흐흐, 돈? 우리 같은 협사가 돈 몇 푼에 끌려다니면 쓰나? 우린 무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여하는 거라고.”

“정의? 푸하하! 우리끼리니까 솔직해지자. 너, 그러다 하늘에서 벼락 맞는다!”

우지끈-

순간 그들이 앉은 탁자가 와장창 쪼개졌다.

세 장한은 얼이 빠져서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 탁자에서는 주석하는 한숨을 쉬고 있고 우설금이 간신히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우설금의 분노가 폭발하여 기운으로만 놈들의 탁자를 쪼개버린 것이다.

“어? 어…… 날벼락이 쳤나?”

“에이, 그럴 리가. 탁자가 부실했던 거지.” “튼튼해 보였는데…….”

세 장한이 부러진 탁자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술맛 잡쳤어. 그냥 가자.”

그들은 계산하면서 점소이에게 호통을 쳤다.

“탁자 좀 제대로 갖추고 영업해라, 응? 돈을 벌려면 시설 투자를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냐? 우리가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상대가 무림인이기에 점소이는 연신 고개만 숙였다.

장한들이 사라지자 주석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식사하기에는 입맛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사천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주막 밖으로 나가자 세 장한이 키득거리며 어깨동무를 한 채 길을 나서고 있었다.

“크크, 사천으로 가자고. 무림 정의 수호를 위해!”

“좋지! 칼도 쓰고, 돈도 벌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흐흐, 거기에 예쁜 여자라도 있으면 몸보신할지도 몰라. 원래 멸문지화 당하면 제일 욕보는 건 여자들이거든.”

우지직-

세 장한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고목 가지가 부러졌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커다란 나무토막이 떨어지자 세 장한은 기겁하고 옆으로 피했다.

“으으!”

“하, 하늘에서 벼락이 쳤나봐!”

“하, 이 새끼야, 네놈이 자꾸 벼락, 벼락 소리하니까 벼락이 내리지.”

우지직-

다시 위에서 커다란 나뭇가지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으아악!”

놀란 세 장한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그들의 뒤에서 주석하는 실소를 짓고 있었다. 우설금이 뿌리는 살기에 일대의 나무가 폭풍을 맞은 듯 휘어지고 부러졌다.

쓰레기 같은 놈들을 대신 혼내주는 우설금이 고맙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성정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마 말리지 않았다면 우설금은 저들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오늘은 어디서 묵을까요? 주막? 아니면 노숙?”

우설금이 방금 나온 주막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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