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48화 (148/273)

148화 모여드는 군웅 (2)

주석하와 우설금은 계곡의 바위틈에 적당히 자리 잡았다.

북해를 다녀오는 동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힘들지는 않았다. 날씨도 한겨울처럼 춥지 않아 모닥불 하나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그들 같은 고수에게 추위는 사실 별문제가 아니지만.

타닥- 타닥-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두 사람은 그 옆에 앉아 따뜻한 온기를 쬐었다.

“왜 그랬어요?”

뜻밖의 질문이었을까. 우설금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당사자도 아닌 그녀가 화를 낸 것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염려스러웠다. 그만큼 그녀와 가까워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그들이 미웠어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모닥불로 돌아갔다.

모닥불에 그림자가 진 우설금의 얼굴은 가히 환상이었다. 주석하는 내심 신음을 삼켰다. 그녀가 풍기는 기운뿐 아니라 외모도 이런 분위기에선 그에게 살인적이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우설금이기에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그녀가 타인과 다른 마음으로 그를 대하지만, 그 마음이 어떤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일까. 만일 마교와 그 사이에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를 선택할까. 너무 멀리 나간 생각이었지만 시험해보고 싶었다. 용기가 있는 자만이 미녀를 차지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난…… 흑검문으로 빨리 돌아가야 해요. 하북팽가가 들이닥치기 전에. 당신은…… 마교로 돌아간다고 했죠?”

끄덕끄덕. 모닥불에서 눈을 떼지 않는 우설금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하북팽가에서 몇이나 쳐들어올지 모르겠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

다시 그녀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얼핏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것 같기도 하고.

“하북팽가가 정파여서…… 복수 때문에?”

일전에 그녀가 정파에 복수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이번에는 조금 고심하는 눈치였다.

“……그건 아뇨.”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자신이 아닌 그를 위해서 하북팽가를 상대하고 싶다는 의미다.

용기를 얻은 주석하는 질문 방향을 옮겼다.

“정파에, 아니 중원에 복수하고 싶다고 했죠?”

“네.”

“만일 나도 척살 대상에 들어가면…… 죽일 건가요?”

예전에는 그를 죽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달라졌을까. 북해에 다녀오면서 서로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복수나 사문에 견줄 수준이 과연 될까.

우설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나 보다.

그가 그녀의 눈을 또렷이 쳐다보자 우설금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많이 발전한 건가. 이제 마지막 단계다.

“나, 우 소저에게 숨기고 있는 게 있어요.”

의문을 머금은 우설금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때, 만진장으로 가면서 신창패존과 귀군을 만났잖아요.”

“네.”

“그때 그들은 어떤 물건을 찾고 있었죠. 그리고 당신도.”

우설금의 눈동자가 그의 안면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한 것일까.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랬었죠.”

주석하는 품에서 작은 목합을 꺼냈다.

“설마?”

우설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요, 만리안석이죠. 그때 내가 가져갔어요.”

만리안석을 앞에 두고 우설금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만리안석이 무척 중요한 물건이지만 사실 주석하에게는 그리 쓸모 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우설금을 시험해보고픈 마음이 더 컸다.

그는 목합을 열고 만리안석을 꺼냈다.

진한 푸른빛을 띤 만리안석이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은 대단히 신비로웠다.

“만리안석은…… 이름처럼 만 리 밖을 볼 수 있어요. 떠오르는 사람 있어요?”

주석하는 우설금과 연관된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그녀는 가족이 없다고 했으니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일까?

푸른 구슬을 한참 바라보던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인간관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확실하다.

“없어요?”

“없어요.”

“그럼 내가 보여줄게요.”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내력을 주입했다. 동시에 여동생 주소은을 떠올렸다.

만리안석이 신비한 빛을 발하면서 그 중심부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침소에서 뜨개질하고 있었다.

우설금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석하를 쳐다봤다. 만리안석의 신비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여자가 나타나서 놀란 것인지 불분명했다.

주석하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누이동생 주소은이에요. 본 적은 없겠지만…… 참 사랑스러운 아이죠. 나를 항상 믿어주는 그런 동생…….”

그제야 우설금의 표정이 풀리고 열심히 만리안석을 살폈다.

“지금 이 시각 소은이가 뜨개질하나 봐요. 만리안석은 원하는 사람을 먼 곳에서도 볼 수 있게 해줘요.”

주소은의 안색은 편안해 보였다. 아직 하북팽가의 음모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만리안석에 주소은을 띄웠던 그는 내력을 중지했다. 만리안석이 빛을 잃고 중심부에서 보이던 장면이 사라졌다. 만리안석의 푸른빛도 절반으로 줄었다.

그는 다시 목합에 만리안석을 넣으며 말했다.

“오래 쓰면 푸른빛이 사라져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채워지죠. 만리안석이 아직도 필요해요?”

주석하는 목합을 우설금에게 건넸다.

만리안석과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우설금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뇨.”

“교에서 탈취하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지금은 아니죠.”

우설금은 만리안석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교의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마교에서도 만리안석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음이 확실했다. 아니면 굳이 그에게서 만리안석을 뺏고 싶지 않았거나.

“그럼 내가 계속 갖고 있을까요? 이걸 어디에 쓰려나? 흐음, 가끔 우 소저를 보고 싶을 때 봐도 돼요?”

뜻밖의 말이었을까. 우설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점차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녀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꽤 만족한 표정이다.

“……가, 가끔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녀의 안면에 홍조가 일었다.

자신을 사랑해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일이다. 주석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씩 우설금의 상체가 그에게로 기울었다.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주석하는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그녀가 감정에 서툴다고 해도 일반 여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마교라는 환경에서 벗어난다면 그녀도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을 가진, 따뜻한 여인으로 변신할지 모른다.

어쩌면 정파를 향한 뿌리 깊은 원한이 사라지면 정상으로 돌아갈지도.

대체 그녀의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 때문에 마교에 투신하여 천마에게 충성을 다하는 걸까. 마교수호사령이라는 지위가 특별한 만큼 그녀의 성장 과정도 유별날 것이다.

그녀의 막힌 응어리를 그가 뚫어주고 싶었다.

**

제갈세가의 문을 나서며 남궁후는 분노를 터트렸다.

하북팽가의 소식을 듣자마자 제갈세가로 왔었다. 하지만 제갈휘를 만나지 못했다. 제갈휘는 이미 하남의 무림맹으로 떠난 후였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밖에서 기다리던 남궁천과 남궁서란이 재빨리 옆에 붙었다.

남궁후는 낙심해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한 것 아닙니까? 군사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하북팽가에서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그것도 해묵은 시골 동네 다툼을 빌미로 말입니다.”

남궁천은 화가 치밀었다. 그도 흑검문을 가봤기에 사정을 잘 안다. 흑검문은 문파라기보다는 가족이다. 친족으로 세가를 형성한 남궁세가와 달리 단지 조금 큰 가족일 뿐이다. 그런 곳이 하북팽가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는 사람은 모두 다 알지. 이번 전쟁이 명분도 실리도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추진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파의 아집 때문이다. 감히 이름 없는 흑도 문파가 나대는 꼴이 보기 싫다는 거지.”

“설마…….”

“이미 당문 멸문을 빌미로 주 공자를 제갈세가로 불러 응징하려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무려 십존 셋이 죽었다. 주 공자의 죽음과 맞바꾸기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 피해가 너무 크지. 그러니 만회할 구실을 찾은 거다. 마침 하북팽가에서 알아서 나서 주니까.”남궁후는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다.

겉으로는 하북팽가가 앞장섰지만 뒤에서는 제갈휘가 밀고 있다. 아마 제갈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 뒤에는 무림맹이 있으니. 그렇다면 현 무림맹주인 무극천존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남궁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주석하가 제갈세가를 방문할 때부터 정파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점점 도를 더하는 모습이다. 비록 주석하를 지키지 못했으나 그 가족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명색은 무림 문파라지만 흑검문은 단순한 가족

경영체일 뿐이니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

“무림맹주가 주요 문파 요원들을 소집했다는구나. 만사지존도 그 때문에 이곳에 없어. 무림맹에서 최근에 발생한 십존의 죽음을 설명하고 타개책을 구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 할 것 같다. 거기에서라도 하북팽가를 저지할 방법을 찾아야지.”

“저도 가겠습니다.”

남궁천도 의욕을 불태웠다. 흑검문에 도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남궁후가 손을 저었다.

“천아, 넌 굳이 무림맹에 갈 필요 없다. 어차피 그곳에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다.”

“하지만…….”

“너는 흑검문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려라. 다만 절대 하북팽가와 맞서서는 안 된다.”

“왜 안됩니까? 흑검문에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남궁천의 결의와 달리 남궁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남궁세가는 수백 년 동안 정파라는 테두리에 묶여 있었다. 이를 벗어날 수는 없어. 하북팽가와 함께 설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대시할 수도 없다. 흑검문을 돕더라도 뒤에서 도와야 해.”신중한 남궁후의 설명을 남궁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는 했다. 하지만 양심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남궁천에게 남궁후가 재차 신신당부했다.

“알겠지? 그래서 흑검문에 미리 알리는 게 최선이다.”

“알겠습니다.”

남궁천은 자신이 할 일을 가늠했다. 일단 흑검문에 가보면 어떻게든 도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남궁천의 시선이 남궁서란을 향했다.

“넌 어떻게 할래?”

“저도 흑검문에 갈래요.”

남궁서란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그녀는 그동안 주석하나 흑검문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

제갈세가를 떠난 후 가주인 남궁후는 무림맹으로 남궁천과 남궁서란은 흑검문으로 목적지가 분리됐다.

**

풍운객잔.

객잔 현판을 접한 주석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적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살검회의 도건이 죽던 날, 그는 이곳에서 마불에게 위협을 당했었다. 당시 단전에 숨은 내력을 제대로 몰랐던 탓에 얼떨결에 마불을 죽이고 우설금을 피해 다니느라 고생했었는데…….

지금 그 우설금과 함께 이곳 풍운객잔에서 묵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덕양 코앞인 이곳까지 급히 온 이유는 당연히 하북팽가의 도발 때문이었다. 일단 덕양 부근에 머물면서 상황을 엿보기로 작전을 짜고 객잔을 골랐는데 하필 이곳이었다.

“집에 들어가야 하지 않아요?”

“아직 상황을 잘 몰라서…….”

주석하는 애써 달려가고픈 마음을 억제했다.

흑검문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여기는지 또 하북팽가의 원정을 알고 있는지 모든 게 신경 쓰였다.

섣불리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좋은 작전이 아니다. 오히려 적의 표적이 될 뿐이다. 일단 하북팽가와 용병이 모이기로 했다는 백호문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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