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모여드는 군웅 (3)
풍운객잔은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때와 주인이 바뀌어서 아무도 주석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시 마불이 죽고 우설금의 추궁을 받으면서 죽음을 맞은 예전 주인장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위로를 표했다.
“흑검문이 말이야…….”
“백호문이 어디 있지?”
“돈은 받았어?”
주변 탁자의 대화는 대부분 흑검문과 하북팽가 이야기였다. 즉, 이곳을 채운 손님은 타지에서 넘어온 자이고 용병으로 한몫 잡아보려는 이들이다. 물론 주석하는 이들을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음식을 먹다가 우설금의 아미가 심상찮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가끔 걱정했다. 그때처럼 또 탁자에 벼락을 내리면 골치 아프니까. 고향까지 와서 노숙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설금이 옆 탁자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도록 주석하는 화제를 돌렸다.
“여기에 오니 생각나지 않아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무슨 말인지 잠시 고민하던 우설금이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가적성을 추적할 때?”
“그렇죠. 그때 내가 이 주점에서 술을 샀었는데 그거 해명하느라 우 소저에게 혼쭐이 나서…….”
곰곰이 생각하던 우설금은 그제야 이곳이 마불이 죽었던 곳임을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마불의 죽음을 캐려고 이곳을 방문했었다.
“그때 우 소저를 엄청 겁냈었는데…….”
피식 웃던 우설금이 웃음기를 싹 거두고 그를 노려봤다. 과거에 살기를 풀풀 날리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흐억! 무섭게…….”
“잘못한 게 없으면 무서울 게 없죠.”
마교가 어디 잘잘못을 따지던 집단이던가. 말이 통하지 않는 무리이고 우설금 또한 마주치면 오금이 저릴 한기를 풍기니 겁이 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그때 그는 무공도…… 변변찮았으니까.
주석하의 어이없는 몸짓에 우설금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나에게…… 숨기는 거 있죠?”
“헉!”
뜻밖의 추궁에 주석하는 안면을 확 구겼다.
“털어놔요.”
눈을 굴리면서 주석하는 잠시나마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만리안석도 털어놓았는데 마불 쯤이야.
“혼내지 않는다면요.”
“흐음? 정말 잘못한 게 있나 본데요?”
그를 살피는 그녀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주석하는 무덤까지 짊어지고 가려던 비밀을 토해냈다.
“실은…… 그때 이곳에서 땡중 한 사람을 죽였어요. 그거 내 잘못 아닙니다. 그 땡중이 갑자기 나를 죽이려 하잖아요? 그래서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우설금이 눈썹을 쓱 올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짐작은 했었는데…… 정말이었나 보네요.”
사실 우설금도 주석하를 의심하고 있었다. 당시 주석하의 무공은 마불에 견주어 터무니없긴 했으나 다른 용의자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다만 시간이 지나 주석하의 무공이 겉보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의심이 더욱 짙어지긴 했다.
“설마…… 그 일로 나를 원망…….”
우설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교는 그런 것 신경 안 써요. 죽은 자가 약한 거죠. 마불의 사인을 찾은 이유도 복수하겠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요.”
마교 특유의 문화이긴 했다. 다른 문파와 달리 그들은 강자를 숭상하고 상대보다 약하면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특이한 문화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약자를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마불은 마교 내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했죠. 그런 자에게서 살아났다니 운이 좋았네요.”
“다 내 능력 아닐까요?”
“피이…….”
우설금이 입술을 삐죽였다.
최근 들어 그녀의 표정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당분간 이곳에서 묵어야 할 것 같아요. 괜찮죠?”
“네.”
주석하는 점소이를 불러 빈방을 주문했다.
“저, 손님. 요즘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몰려서…… 방이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용병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객잔이 때아닌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볼지 고민하는 찰나 오히려 우설금이 흔쾌히 승낙했다.
“하나라도 주세요.”
주석하는 점소이에게 수고비를 주고 방 하나를 확보했다.
막 떠나는 점소이를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손님이 불렀다.
“이봐, 방 없어?”
그 탁자의 인물도 주석하처럼 일남일녀였다. 비슷한 나이에 남자는 비교적 준수했고 여자도 상당히 예뻤다. 두 사람은 탁자 위에 장검을 올려놓아 무림인임을 드러냈다.
“방금 나간 방이 마지막입니다. 아시잖아요? 요즘 이 동네로 사람들이 몰리는 거…….”
점소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청년이 안면을 찡그리며 점소이를 붙잡았다.
“방값이 얼마지?”
“요즘은 올라서 은자 반냥입니다.”
“그럼 내가 한 냥을 주지. 나에게 방을 줘.”
“방은 저쪽 손님이 먼저…….”
청년의 시선이 주석하와 우설금을 향했다. 우설금의 놀라운 미모에 잠시 눈을 돌리지 못하던 청년이 다시 윽박질렀다.
“저쪽은 내가 처리하지. 당신은 방만 주면 돼.”
당연히 주석하도 그 말을 들었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가로채는 법도 있나? 화가 난 그는 옆자리 청년을 향해 말을 던졌다.
“그 방은 우리 겁니다.”
“그럴 리가? 점소이에게 물어봐. 누구 것인지.”
청년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주석하의 눈이 점소이를 향했다.
점소이는 겁에 질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무림인 간의 시비에 끼어들기 싫은 표정이다.
주석하가 화를 내기도 전에 청년이 먼저 검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좋은 말할 때 양보해. 지금 내가 방이 꼭 필요해서 그러니까. 방금 낸 방값은 두 배로 변상해주지. 그만하면 좋은 거래 아닌가?”
기세등등한 청년은 말을 듣지 않으면 검을 휘두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검병에 손을 슬슬 문질렀다.
“흠, 그래?”
당연히 기가 죽을 주석하가 아니었다. 그는 낯선 두 남녀가 하북팽가의 용병에 자원하려고 모여든 뜨내기 낭인이라 여겼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그의 적이 아닌가.
주석하가 일어나려는 순간 옆 탁자에서 여인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소협, 죄송합니다. 제 사형이 성격이 좀 급해서요.”
사과하는 여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 주석하는 몸을 추슬렀다.
“사매, 그럴 필요 없어. 필요하면 구하는 게 임자니까. 강호 생리가 원래 그렇다고!”
“그래도 이분들이 먼저 잡은 거잖아요.”
“지금 우리 사정이…….”
사형과 사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였다.
주석하가 보기에 사형이란 청년은 성질이 급한 데다 철이 없었고 그나마 사매란 여인은 도리가 있었다.
두 사람의 다툼을 보다 못한 주석하가 그들을 달랬다.
“좋습니다. 그럼 같이 방을 쓰지요? 일부 양보해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우설금과 단둘이 방을 쓰기엔 너무 어색해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또 그들을 통하면 정보를 수집하기도 용이하다.
여인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대답하면서 주석하는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우설금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연신 허리를 굽히던 여인은 여전히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대는 청년의 옆구리를 찔렀다.
“사형, 어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세요.”
청년이 마지못해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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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주석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객방치고는 제법 넓어서 양쪽으로 나뉘어 자면 네 사람도 충분히 가능했다. 침상 대신에 방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어 암묵적으로 자리가 구분됐다.
방 한쪽 구석에 행낭을 풀어놓고 주석하는 우설금과 나란히 휴식을 취했다.
맞은 편에는 청년과 여인이 마찬가지로 짐을 풀고 앉아 있었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더니 여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저는 호북 대운방의 사운혜라 합니다.”
여인이 예의 바르게 자신을 밝혔다.
주석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석하라 합니다. 섬서에서 넘어왔습니다.”
“아, 유명한 석가장의…….”
“하하, 아닙니다. 석가장과는 전혀 무관하지요.”
주석하는 자신이 흑검문 사람임을 숨기려고 이름만 말했다.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석 씨가 됐다.
“전 우설금이에요.”
우설금이 짤막하게 인사했다.
사문을 밝히지 않으니 두 사람을 강호 무명이라 여긴 청년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청년은 사매를 째려보다가 마지못해 인사했다.
“대운방의 양승이라 하오. 반갑소.”
예상대로 양승과 사운혜는 대운방의 사형제 관계였다.
“석 소협도 하북팽가의 용병 지원 때문에 오셨습니까?”
사운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에 묵는 사람 대다수가 그 때문이었기에 주석하도 그렇게 위장하기로 했다.
“그렇습니다만. 돈을 많이 준다고 하더군요.”
“아, 그러시네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희는 돈 때문은 아니고…….”
“그럼?”
“저희는 사문인 대운방의 명성을 날리려고요.”
주석하는 이번 사태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유를 눈치챘다. 일당을 많이 주는 용병과 강호 정의를 실현하려는 협의지사 열풍이 합쳐진 결과였다. 모두 하북팽가, 아니 무림맹의 교묘한 술책이다.
사운혜가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이번에 유명 문파에서 많은 분이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들과 어울리면 사문의 명성에 도움이 될까 하여…….”
호북에서 대운방의 입지는 덕양의 백호문이나 검우방과 비슷했다. 지역에서는 제법 잘 나가는 정파였으나 무림 전체로 보면 유명무실했다. 강호 전체로 보면 그만한 문파는 적어도 수백 군데가 넘으니까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인근의 대문파인 무당파 때문에 기를 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하북팽가의 원정은 매우 좋은 기회였다. 문파를 널리 알리고 유명인사와 친분을 쌓을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이번 원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자 급히 참가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머물 곳을 미리 정하지 못하여 고생할 뻔했죠. 다시 감사드립니다.”
사운혜가 열심히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주석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솔직히 흑검문을 치겠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우설금이야 원래 표정이 없으니…….
사운혜는 두 사람의 태도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양승이 핀잔을 줬다.
“저들은 단지 돈 때문에 움직이는 낭인이라고. 우리와는 달라. 대의를 품은 우리와 비교하면 안 돼.”
한동안 양승의 무시하는 발언이 계속되었으나 주석하는 귀를 닫았다. 막상 덕양에 오니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버지와 누이동생을 보고픈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얼마간 논쟁을 벌이던 양승과 사운혜가 곧 잠잠해졌다.
객방에 불이 꺼지고 고요가 내려앉았다.
창으로 은은한 달빛이 들어왔다. 덕분에 방안에는 희미한 어둠이 깔렸다.
선잠에 몸을 뒤척이던 주석하는 약간 떨어져서 잠이든 우설금을 확인했다.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잠이든 듯했다.
그의 시선이 반대편 구석의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 두 사람은 처음에는 떨어져서 자더니 어느새 꼭 붙어 있었다. 그 장면에 주석하의 안면이 화끈거렸다.
사형제 사이라 하더니 연인 사이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예법에 무덤덤하다지만 저렇게 남녀가 붙어 자다니!
민망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주석하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슬금슬금 우설금에게로 손을 뻗쳤다.
이불 속에서 그는 우설금의 손을 잡았다.
우설금이 움찔하는 듯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손을 잡고 편안하게 숨을 골랐다. 뭔가 성공했다는 뿌듯함에 한결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