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50화 (150/273)

150화 모여드는 군웅 (4)

아침이 되자 양승과 사운혜가 단장을 서둘렀다.

느긋하게 일어난 주석하는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부터 어디에 가십니까?”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는 양승과 달리 사운혜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백호문에 들려보려고요.”

“빨리 가서 등록할수록 좋은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아직 날짜가 남았으니까요. 다만 분위기를 익히며 정보를 좀 모아 볼 겸…….”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있었다.

평범한 용병이라면 모두 그녀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다만 주석하는 목적이 다르기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함께 가실래요?”

“저희는 준비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먼저 가세요.”

주석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물론 그도 상황파악이 필요하긴 했으나 백호문에 갈 수는 없다. 얼굴이 알려진 그는 지금 당장 덕양을 활보하기도 쉽지 않다.

양승과 사운혜가 양해를 구하고는 먼저 떠났다.

방안에는 그와 우설금만이 남았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간밤에 잠을 설쳤나?

“잘 잤어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정작 돌아오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분노도 아니고 호의도 아니고 경계하는 미묘한 눈빛이다.

“잘못 잤어요? 아무래도 낯선 사람들이 함께 있어서…….”

대답 대신 안면을 살짝 찡그리면서 우설금이 그의 손을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주석하는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충 짐작해 보니 간밤에 손을 잡고 자느라 편히 못 잤다는 뜻인 것 같았다.

사실 별 의미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우설금의 마음을 동요하게 했나?

싸늘하고 무덤덤한 우설금도 이럴 때가 있을 줄은. 주석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우설금이 미간을 확 찌푸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어린 것을 발견한 주석하는 내심 웃음을 터트렸다.

**

느지막이 돌아온 양승 일행과 주석하는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어제보다 풍운객잔은 더 복잡해졌고 소란스러웠다. 용병 또는 협사를 자처하고 모인 무림인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은 탁자 하나를 잡아 마주 보고 앉아서 간단한 식사로 국밥을 먹었다. 사람이 많아서 단일 식단이라나.

“오늘 좀 다녀보셨어요?”

사운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뇨.”

항상 그들이 마주치면 사운혜와 주석하가 대화를 나눴다. 양승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화를 꺼렸고 우설금은 원래 말이 없다.

“다녀보셔야 도움이 될 텐데요?”

“여기 객잔에서도 소문이 들립니다. 지금도 옆에서 뭐라고 떠들잖아요.”

옆 탁자에서는 하북팽가를 찬양하고 흑검문을 깎아내리느라 난리였다. 그 건너편에서는 정파의 단합을 강조하고 사파를 비난했다. 대부분 분위기는 비슷했다.

“하긴…….”

“가셨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특별한 목적이 없었으니 되고 말고 할 게 없었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어요.”

주석하는 사운혜의 말에 주목했다.

“청성파에서 참가하려나 봐요.”

구대문파에 속한 청성파는 정파의 대표라 할 문파다. 소림이나 무당파만큼은 아니지만 곤륜파와 비등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 사천성을 곤륜파와 더불어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문파였다.

“청성파에서 왜요?”

“하북팽가에게만 무림 수호를 맡겨놓을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나 봐요. 사천은 청성파라나? 덕양으로 인원을 파견했다네요.”

하북팽가 하나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구대문파인 청성파에서 개입했으니 흑검문으로서는 더욱 불리해졌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내심을 눈치챈 듯 사운혜가 달랬다.

“굳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북팽가에서는 이곳에 온 모든 용병에게 소정의 금액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오늘 그 때문에 말이 많았어요. 청성파가 오면 용병을 내치는 게 아니냐는 항의도 있었고요. 덕분에 백호문에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였죠.”그녀는 주석하가 일당을 받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백호문은 현재 봉문 상태 아니던가요?”

“봉문 맞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문 앞에 몰려 있었어요. 다만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끊임없이 문을 드나들던데요?”

“그게 무슨 봉문이라고…….”

“어차피 중요하지 않잖아요? 봉문도 강호의 도리와 협의에 맞아야 지키는 거죠. 사파인 흑검문이 강제한 것이니 지킬 이유가 없죠.”

주석하는 사운혜의 대답에서 정파와 사파의 고착된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정파 입장에서는 흑도문파와의 약속을 굳이 지킬 이유가 없다. 무림의 대의와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얼른 잠재우고 옆의 우설금을 슬쩍 돌아봤다.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럴 때는 그녀가 엄청 부러워진다.

“어쨌든 용병으로 참가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위기였죠. 돈은 받고 위험은 확 줄었으니까요. 물론 애초에 하북팽가가 나섰으니 위험하리란 생각을 한 사람도 없었지만. 다만…….”사운혜가 한숨을 쉬자 양승이 버럭 소리쳤다.

“좋긴 뭐가 좋아. 사람이 많을수록 공을 세우기도 힘들어. 하북팽가 인물을 만나려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잖아? 이건 황상 만나기보다 더 힘들어.”양승과 사운혜는 대운방의 위명을 떨치려고 왔다. 기회가 줄어들었으니 조바심이 날 수밖에.

주석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자니 다른 탁자에 모인 장한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흑검문 만행을 들었나?”

“무슨 만행?”

“흑검문이 비겁한 수를 써서 덕양을 장악했다고 하더라고.”

“비겁한 수라니?”

“비적을 불러 주민을 위협했다더군.”

“비적? 흑도 놈들이 흑도 놈 했네.”

주석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곳으로 몰려든 외지인들은 덕양의 사정을 모른다. 당시 흑검문과 정파 연합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다. 그렇다 보니 일부가 선동하는 소문이 참인 것처럼 널리 퍼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번 기회에 백호문에서 여론을 반전하려고 작정했나 보다. 백호문의 책사라던 현현자 그 자식은 분명히 하북팽가와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다.

주석하가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거리고 있자니 옆 탁자에서 떠들던 장한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예?”

갑자기 장한이 말을 걸어오자 주석하는 깜짝 놀랐다.

장한이 주석하와 우설금을 비롯하여 이 탁자에 앉은 사람을 유심히 훑었다.

“자네 혹시 흑검문 첩자 아냐?”

“허억!”

난데없이 정곡을 찔린 주석하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시커먼 옷을 입고 있어?”

그제야 주석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놀랍게도 주막을 꽉 메운 사람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유일하게 그뿐이었다. 보통 때는 적어도 이삼 할은 충분히 되었었는데…….

“그, 그거야 때, 때가 안 타니까요.”

“정말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전 외지에서 와서…….”

“흑검문이면 내 손에 먼저 죽어!”

장한이 호기롭게 주먹을 쥐었고 옆의 동료가 만류했다.

“여보게, 참게. 흑검문이 여기에 있을 리 없잖나?”

“그, 그렇긴 하지.”

주석하를 향한 장한의 눈초리가 노골적으로 우설금과 사운혜를 훑었다. 주석하는 그 눈빛에서 여인을 향한 탐욕을 읽었다. 꼬투리를 잡아 여인들에게 수작을 걸려는 낌새가 엿보였다.

양승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장한에게 한소리 했다.

“여보쇼, 우린 호북 대운방에서 왔소. 호북에서 유명한 정파요. 그렇게 사파인을 보듯 하면 기분 나쁘지.”

“아, 그렇소? 뭐, 별로 유명한 곳도 아니구먼. 저 사람 교육이나 잘 시키쇼. 이 판국에 검은 옷이라니.”

양승의 매서운 눈초리에 찔끔한 장한이 눈을 돌렸다.

주석하는 기가 막혀 투덜거렸다.

“왜 검은 옷에 시비를 걸지?”

“석 소협, 지금 덕양에서 검은 옷을 입으면 해코지당합니다. 흑검문 똘마니라고 이곳에 몰려든 용병들이 가만히 두지 않죠. 주민 가운데 멋모르고 흑의를 입었다가 다친 사람도 있어요. 어떤 여자는 흑의 경장을 입었다가 욕을 당하기도 하고……. 이건 모두 흑검문 사람들 때문이에요. 그들이 흑의를 입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죠.”

“하아…….”

주석하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때린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맞은 사람이 문제라니. 그는 정파와 사파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느꼈다. 또 정파의 논리에 물들여진 양승이나 사운혜의 생각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도.

“석 소협도 옷을 갈아입으세요. 어차피 용병 하시려면 검은 옷 입고는 힘들어요.”

사운혜가 점잖게 충고했다.

옆에서 양승이 빈정거렸다.

“어쭙잖게 용병은 무슨 용병? 같이 있는 사람도 욕먹게 하고선…….”

사운혜가 양승을 째려보고선 주석하를 달랬다.

“죄송해요.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괜찮습니다.”

주석하는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흑검문을 욕하는 이들을 응징할 수도 없으니 무시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

무림맹은 중원의 중심이라 할 하남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 무림맹주는 무당파의 무극천존(無極天尊). 그는 지난 십여 년간 무림맹을 비교적 잘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재임 동안 무림맹은 사파 연합인 흑련에 확실한 강세를 유지해왔고 덕분에 정파는 세력을 확장했다.

지금 그 조류에 균열이 일었다.

맹주인 무극천존과 군사 제갈휘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참여 자격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 또는 정파십존을 비롯한 유명인사였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춘원에서의 참사로 정사의 세력 구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제갈휘의 심각한 일성이 발해지자 장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건 군사의 무리한 작전 때문 아닙니까? 위협이 될지 모르는 흑검서생을 무리하게 공격하려다 도리어 화를 입은 것이잖습니까?”

창궁무존 남궁후가 곧바로 반박했다.

“그 문제는 살존을 비롯한 십존 세 분이 죽음으로 증명했습니다. 흑검서생이 위험인물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목숨을 희생할 일이 없었겠지요.”

제갈휘는 능수능란하게 대응했다.

남궁후는 주변에 지원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대부분 그에게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모두 사리판별 할 눈을 잃었구나.’

남궁후는 낙담했다.

지금 이곳에는 자하검존, 만사지존, 반야불존, 무극천존, 창궁무존, 즉 다섯 정파십존이 모여 있었다. 정파십존 가운데 넷이 죽었고 화존은 은거했으니 살아있는 모든 십존이 다 모인 셈이었다.

여기에 구대문파 장문인과 오대세가 가주 또는 이에 준하는 자가 모여 회의실 안이 북적거렸다.

장내의 분위기를 읽은 제갈휘는 의기양양하게 주장을 몰아붙였다.

“이대로 우리가 주저앉을 수는 없잖습니까? 위기가 기회라 했으니 지금 바로 사파를 공략해야 합니다.”

“지금 세력 구도가 어떻게 되오?”

맹주인 무극천존이 넌지시 물었다. 물론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다.

“흑도에는 혼군, 악군, 독군, 뇌군, 암군 등 다섯이 남았습니다. 이 가운데 악군은 은거했으니 실질적으로는 넷이지요.”

오대사. 아직은 약간 정파의 우위라 볼 수 있었다.

“다만 무림의 동요가 문제입니다. 무려 십존 셋이 죽는 바람에 정파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분위기를 빨리 역전해야 합니다.”제갈휘의 주장에 남궁후는 짚이는 바가 있었다.

“설마…… 분위기 역전을 위해 흑검문을 공격하는 겁니까?”

제갈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궁후가 주먹을 꽉 쥐고 버럭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죄 없는 한 문파를 그렇게 낙인을 찍어버리다니!”

“죄가 없지 않지요. 무려 십존 셋이 죽었습니다.”

정파의 세력확장을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제갈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