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51화 (151/273)

151화 하북팽가와 청성파 (1)

제갈휘는 남궁후를 내심 비웃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흑검문이 죄가 없음을 안다. 주석하가 먼저 도발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간의 행적을 바탕으로 주석하가 정파의 위협이기에 손을 써야만 했다는 당위성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십존 가운데 무려 셋이 죽었으니 흑검문은 당연히 그 죄를 치러야 한다.

“하북팽가를 도와 흑검문을 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자하검존의 말투는 온화했으나 내용은 날카로웠다. 제갈휘를 측면 지원하는 핵심을 꿰뚫었다.

제갈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흑검문이 유명 문파라면야 효과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추가로 희생양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정파의 힘을 확실하게 떨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흑도팔군 가운데 한 사람과 유명 흑도 문파 한두 개쯤은 쳐야 우리의 면이 설 겁니다.”

자하검존이 부추김을 계속했다.

‘젠장!’

남궁후는 이 회담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무력도발의 당위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흑검문을 비롯하여 거대 흑도 문파 한두 곳을 제거하면 정파의 우위가 확보된다는 논리가 대체 어떤 머리에서 나왔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제가 고민해봤습니다. 먼저 흑도 문파 가운데 혼군의 혼천교와 암군의 암흑단은 당장 건드리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조궁은 충분히 손볼 수 있지요.”귀조궁은 혼천교와 비슷한 세력을 가진, 꽤 거대한 문파였다. 다만 흑도팔군 수준의 절대 고수를 배출하지 못했고 악행으로 강호인의 지탄을 받았다.

“하하, 좋군요. 귀조궁이라면 흑도에서도 편들기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귀조궁만으로는 형세를 역전하기가…….”

“당연히 희생자를 추가해야지요. 그래서 독군으로 정했습니다.”

“독군?”

“사천당문이 멸문 당하지 않았습니까? 독의 대가인 독군이 살아있으면 우리가 껄끄러울 수밖에요.”

제갈휘의 구상이 모두 나왔다.

제갈휘는 추가설명으로 귀조궁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고수가 연합해서 처리하고 독군은 자하검존과 창궁무존의 손을 빌리겠다고 했다.

당연히 자하검존은 찬성을 표했다.

뜻하지 않게 독군과 싸워야 할 처지가 된 남궁후는 곧바로 반대했다.

“무슨 소리요? 나는 이 다툼에 참여하지 않겠소. 그대는 정파 세력의 확장을 빌미로 불의를 저지르고 있소!”

제갈휘가 비웃음을 떠올렸다.

“창궁무존! 독군이 겁나시는가 보군요.”

“당신의 그 파렴치한 행태가 문제요!”

“무존, 이곳에 참석한 누구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남궁후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다만 그 시선에는 진한 연민이 묻어있었다. 마치 나이가 드니 노망이 왔느냐는 표정이다.

남궁후는 무림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극천존이 굳은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고집을 꺾으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장 연장자인 반야불존의 지원을 구했다. 반야불존은 눈을 감은 채 염주를 돌리며 나지막이 불호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언제 무림맹이, 정파 인사들이 이렇게 불통으로 막혔단 말인가.’

남궁후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렇다고 진흙탕 다툼을 거들 생각은 없었다.

“본 가주는 참여하지 않겠소.”

“남궁가주!”

무극천존이 날카로운 경고를 발했으나 남궁후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남궁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다음날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옷을 고민했다.

흑의를 입고 백호문을 염탐하면 적에게 들킬 위험이 컸다. 예전부터 즐겨 입던 흑의를 바꾸려니 어색했으나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덕양 중심부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두 사람은 외곽에 있는, 옷을 맞추고 파는 주단점으로 갔다. 다행히 주석하는 일대의 지리를 잘 알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단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은 화려한 옷감의 궁장뿐 아니라 다른 옷을 함께 팔았기에 남자 옷도 한두 벌 사기에 어렵지 않았다.

주인이 골라주는 옷을 놓고 결정 장애를 겪고 있자니 우설금이 건너편에 걸린 옷을 가리켰다.

“저걸로 하세요.”

그녀가 선택한 옷은 서생들이 입고 다니는 진한 청색 옷이었다. 흑색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짙은 색이어서 그나마 어색함이 덜어졌다.

옷을 갈아입은 그의 훤칠한 모습을 본 우설금의 표정이 밝았다.

“괜찮아 보여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설금의 의견이 딱히 중요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보다는 보는 눈이 있으리란 생각에 주석하도 만족스러웠다.

그가 옷을 바꿔 입고 보니 우설금의 옷이 눈에 거슬렸다. 이 여자도 항상 진한 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붉은 옷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얼핏 그녀의 별호가 단천마령이란 생각이 났다. 붉을 단丹)이니 붉은색을 입는 건가?

“우 소저도 고를래요?”

우설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판매하는 옷을 둘러보던 주석하는 묘책을 꺼냈다.

“저 옷 한번 입어 봐요.”

주석하가 가리킨 옷은 밝은 연노랑의 화려한 궁장이었다.

“난 다른 옷은…….”

당황한 우설금이 버벅대는 사이 주석하가 재빨리 옷을 우설금에게 안겼다.

“이 옷 입으면 맛있는 것 사줄게요. 내가 이 동네 지리 훤하다는 거 잘 알죠?”

“그래도…….”

“얼른 갈아입고 나와 봐요.”

주석하의 재촉에 우설금이 몇 번을 망설였다. 마치 옷을 바꾸면 큰일 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때 마침 수 명의 젊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남이녀. 나이는 그들과 비슷했다.

“여보게, 주인장! 이곳에서 제일 비싼 옷을 가져와 보게.”

“어떤 종류를 원하십니까?”

지금까지 주석하 쪽에 붙어 있던 주인장이 황급히 그들을 상대했다.

“여기 두 낭자에게 딱 맞는 옷이면 좋겠는데…….”

네 청년은 나름 호탕하게 생긴 무림인이었다. 두 여인 또한 예쁘장하게 생긴 미녀로 검을 쥔 것으로 보아 무림인이었다.

주인장이 옷을 꺼내는 사이 낭자와 청년들이 벽에 걸린 옷을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주인장이 꺼낸 옷을 본 두 낭자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별론데? 역시 시골이라 어쩔 수 없나 봐.”

두 낭자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가게를 험담했다.

네 청년이 웃으며 권유했다.

“그래도 골라보세요. 원하는 건 모두 다 사줄 테니.”

네 청년이 재력을 드러내며 두 낭자에게 권했다.

주석하는 대충 상황을 눈치 챘다.

아마도 저 청년들은 저 낭자들을 오늘 처음 만났을 것이다. 낭자의 미모에 반한 청년이 낭자에게 옷을 사서 선물하려는 듯했다. 어쩌면 낭자들이 이런 상황을 유도했을 수도 있고.

두 낭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일더니 옆에 서 있는 주석하와 우설금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낭자의 눈동자가 우설금이 손에 든 연노랑 궁장에 멎었다.

“소협, 저걸 사줘요.”

“예? 저건 저 낭자가 먼저 고른…….”

“뭐든지 다 사준다고 했잖아요?”

우설금이 든 옷을 지적한 낭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청년들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이 사겠다고 먼저 집은 옷을 차마 뺏을 수 없어서다.

“그래도 저건 저분들이 먼저…….”

“흥! 천하의 청성사협이 두말하시는군요?”

당황한 청년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여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도 잠깐, 방향을 정한 청성사협이 주석하와 우설금을 둘러쌌다.

한 녀석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소저, 저희는 청성파의 청성사협입니다.”

청성파는 구대문파에 들어갈 만큼 거대 문파이고 청성사협은 청성파에서 가장 잘 나가는 후기지수다. 그들은 청성파의 미래라 불리는 자들로 평소 불의를 참지 못하고 널리 협의를 행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북팽가와 흑검문의 다툼에 청성파가 합류한다더니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주석하도 청성사협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특히 이번 생보다 전생에서 많이 들었었다. 청성사협은 그 당시 정사대전에서 이름을 날렸었다. 그들은 곤륜십이검수와 유사한 자들이다. 전생에서 그들의 마지막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교와의 전쟁이 아니었을까.

청성사협의 인사에 주석하는 과거의 단상에서 깨어났다.

그와 우설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쓰고 있자니 청성사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그 옷을 우리에게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 원래 옷도 맞는 주인이 있는 법이지요. 예쁜 옷은 우리처럼 예쁜 아가씨들이 입어야…….”

기가 막힌 주석하는 우설금의 기분을 살폈다.

우설금은 손에든 노랑 궁장을 살피다가 말없이 앞으로 내밀었다. 어차피 그녀는 옷을 바꿀 생각이 없었기에 별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청성사협이 옷을 건네받으려고 우설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가 안면이 뻣뻣하게 굳었다. 석상이 된 녀석의 시선은 우설금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몰랐다.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 우설금을 살피던 녀석이 이번에는 함께 온 두 낭자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주석하는 청성사협의 머릿속에 무슨 상상이 굴러가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했다. 아마 두 낭자를 보고 이미 떨어진 꽃잎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한 낭자가 얼어붙은 듯 굳어 있는 녀석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해요? 나, 저 옷 사고 싶다니까요.”

“흠흠, 낭자, 저 옷은 이미 저 소저가 찜한 것 같습니다. 다른 옷을 고르시지요.”

“난 저 옷이라야만 돼요!”

여인이 소리를 빽 질렀다.

여인 또한 우설금의 외모에 눈이 휘둥그레진 상황이었다. 그녀는 굴욕감을 느끼자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청성사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두 낭자의 말을 들어주려니 우설금의 외모가 너무 뛰어났다.

괜한 불똥이 주석하에게로 튀었다.

“네놈은 이번에 용병으로 참전하려고 왔느냐?”

갑작스러운 반말에 주석하는 안면을 찌푸렸으나 이들과 다툼을 벌여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이 소저는?”

“그녀도 마찬가집니다.”

“아하, 용병!”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청성사협이 우설금에게 말을 걸었다.

“소저, 저희가 바로 그 유명한 청성사협입니다. 이번 흑검문 전투를 하북팽가와 함께 저희 청성파에서 주관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용병 사용 권한도 저희 청성파가 갖고 있습니다. 저희 말 한마디면 용병으로 참전은 물론 일당을 두 배로 받을 수 있고요. 반면 저희가 반대하면 용병은커녕 자칫 흑검문 잔당으로 몰려…….” 흑검문이란 말이 나오자 우설금의 안색이 살짝 심각해졌다.

자신의 말이 먹힌다고 생각한 청성사협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원래 문파 간 전쟁이란 무척 위험하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만 소저가 성의만 표시하면 일선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일당을 챙길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소저는 아주 조금의 성의만 보이면 충분하지요. 그 옷도 소저가 원하면 제가 사드리지요. 소저는 그저 성의를…….”우설금의 표정이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팔을 붙잡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주목받으면 좋지 않다. 특히 그가 흑검문 소문주임이 발각되면 최악이다. 우설금이 마교인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 여러모로 저들과 부딪히지 말아야 한다.

그의 심정을 읽은 듯 우설금의 표정이 다시 풀렸다.

우설금이 옷을 내밀자 청성사협이 손을 내저었다.

“그 말이 아니라…… 옷은 제가 사드립니다. 대신에 차라도 한잔…….”

옆에 있던 두 낭자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예요? 그 옷은 내가…….”

그러자 다른 청성사협이 조용히 타일렀다.

“낭자, 우리는 넷이고 낭자는 둘 아니오? 하나 더 낀다고 해서 문제 될 것 없잖소?”

두 낭자는 신경질이 확 올랐으나 감히 청성사협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때 다른 녀석이 다시 우설금에게 수작을 걸었다.

“소저,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면 만사형통할 겁니다.”

녀석이 노랑 궁장을 만지는 척하며 우설금의 손을 덥석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