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52화 (152/273)

152화 하북팽가와 청성파 (2)

아니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녀석은 발을 삐끗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푸하하! 야! 너, 뭐하냐?”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낄낄대며 웃었다.

넘어진 녀석은 우설금과 동료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안색을 붉히면서 급히 일어났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라고!”

쪽팔림에 버럭 소리친 녀석이 다시 우설금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설금은 주석하를 염려해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감히 이 녀석이 손을 잡으려 하자 내력을 이용해서 발목을 접질리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목을 날려버렸을 텐데 이런 식으로 피해 간 것만으로도 최대한 양보한 셈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소저, 나, 청성사협입니다. 이번 흑검문 토벌에 실권을 쥔 사람이죠. 소저를 용병으로 쓰고 안 쓰고는 나에게 달려…… 크윽!”

열심히 자신을 설명하던 녀석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청성사협이 당황해서 녀석을 부축하다가 우설금의 싸늘한 눈빛을 발견했다.

순간 그들은 지금 이 녀석이 괴로워하는 것과 우설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너, 너!”

그 순간 폭풍 같은 강기가 청성사협에게 몰려갔다.

콰앙-

청성사협 넷과 두 낭자가 강기의 폭풍에 밀려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들은 주단점 밖 길거리에 그대로 내팽개쳐졌다.

“끄악!”

고통에 비명을 지른 청성사협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제야 청성사협은 상황을 파악했다. 눈앞의 아리따운 여인은 엄청난 고수였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여인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어 경계심이 일었으나 그들은 청성사협이란 명성을 더럽힐 수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몰려든 사람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왔다.

“저, 저게!”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청성사협이 다시 주단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콰앙!

“끄아아악!”

들어갈 때보다 더 빠르게 네 개의 그림자가 밖으로 튕겨 나왔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날려가서 쓰레기통과 오물통에 처박혔다.

충격이 컸던 듯 그들은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으으으으.”

신음을 내뱉으며 그들은 다시 주저앉았다.

몰려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청성사협과 두 낭자를 둘러싸고 웅성대던 군웅 중에 정체를 알아본 자가 당연히 있었다.

“처, 청성사협이다!”

“청성사협이 쓰러지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흑도팔군이 나타났나?”

정파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청성사협을 누가 감히 이렇게 망가트릴 수 있는지 사람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르르 주단점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들은 얼이 빠진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매장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

주석하는 우설금의 손을 잡고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덕분에 두 사람은 군웅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다.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청성사협의 무례한 행동이 도를 넘었기에 그도 우설금을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리에서 즐겁게 지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풍운객잔으로 돌아왔다.

대운방 두 남매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미안해요.”

우설금이 먼저 사과했다. 나들이를 망쳐버린 것보다 자칫 주석하가 주목받을 위험에 몰렸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만일 우설금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가 나섰을 것이다. 감히 청성사협 같은 놈들이 우설금을 희롱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니까.

그제야 두 사람은 숨을 고르며 서로를 살폈다.

주석하의 눈에 여전히 우설금이 들고 있는 연노랑 궁장이 보였다.

우설금도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주석하의 옷은 새로 산 청의로 바뀌어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그대로 들고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치 옷 가게에서 옷을 하나씩 도둑질한 것처럼 됐다.

“이거 어떻게 해요?”

“내일 기회 날 때 은자 갖다 줘야죠.”

지금 당장은 그곳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가장 문제가 되었던 주석하의 검은 옷은 진 푸른색 옷으로 바뀌고 우설금은…….

궁장을 한쪽 구석에 두려는 우설금을 붙잡았다.

“우 소저.”

“네?”

“우 소저도 옷을 바꿔 입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입은 붉은색은 너무 눈에 띄어서…….”

오늘 사고까지 쳤으니 주석하의 말이 타당했다.

우설금이 손에 든 궁장과 자신이 입은 옷을 번갈아 살피다가 주석하를 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고민하는 눈치다. 주석하는 그녀가 왜 고민하는지 전혀 몰랐으나 어쨌든 다른 옷을 입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자자, 얼른 갈아입어요.”

그녀가 생각할 여지가 없도록 옷더미를 그녀에게 안겼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우설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요.”

주석하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나가지 말아요.”

우설금의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다만 그는 우설금의 떨림이 단순한 남녀 간의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천하의 단천마령이 옷을 갈아입는 일을 겁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우설금…… 마교수호사령…… 단천마령…… 붉은 옷……. 뭔가 알 듯하면서도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나가지 말고 거기에서…….”

이번에도 확실하게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주석하는 깊은숨을 내쉬면서 다시 문을 닫았다.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요. 여기에 가만히 있을게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얼른 입어봐요.”

우설금의 입가에 떠오른 안심한 미소를 그는 볼 수 없었다.

사르륵-

옷자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주석하는 돌아보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분명히 고문인데…….’

확 돌아본다고 하여 딱히 우설금이 화를 낼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신경이 곤두서고 모든 감각이 우설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무리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려 해도 이것만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주석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문을 바라보고 있기에 굳이 눈을 감을 필요가 없음에도 감아야 했다.

그의 놀라운 감각은 뒤에서 나는 소리를 종합해서 지금 우설금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시 눈앞에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우설금을 원하고 있음을.

잠시 후 주석하는 연노랑 궁장을 입은 우설금을 볼 수 있었다. 예전의 붉은 옷도 예뻤지만 연노랑 궁장은 한결 풋풋한 싱그러움을 빛나게 했다. 지금 우설금은 제 나이를 찾은 모습이다.

천상의 선녀였다. 미녀를 뜻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그 어느 문구도 지금의 그녀를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주석하를 본 우설금의 안면이 홍조로 물들었다.

“예뻐요. 당분간 이걸로 입어요.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천하절색인 그녀는 어떤 옷을 입더라도 눈에 띌 수밖에 없지만…….

주석하는 연신 그녀를 훑어보며 칭찬했다. 새 옷을 입으니 마음도 새로웠다.

이 순간 우설금은 단천마령의 모습을 완전히 털어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 없으나 주석하는 우설금의 변신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그녀는 마교에서 벗어난 모습이었다. 어쩌면 외양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그 사실이 그를 안심하게 했다.

**

마교에서는 천마가 금천마령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천마는 홀로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그래서 최근 정파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구대문파 연합 병력이 귀조궁으로 몰려갔습니다. 이곳은 이변이 없을 겁니다. 귀조궁은 하루를 채 버티지 못할 테니까요. 문제는 귀조궁을 친 후 구대문파의 병력이 해산하지 않으리란 점입니다. 그들이 다른 흑도 문파까지 건드리게 되면…….”

“급격히 무게추가 기운다는 뜻인가?”

천마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나른한 권태로움이 어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상관없잖아? 우리가 중원에 입성하기 전에 정파든 사파든 쪽수를 줄여놓아야지.”

애초부터 천마는 정파와 사파가 서로 양패구상하기를 노렸다. 만사지존과 뇌군을 열심히 옆에서 자극했더니 뜻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덕양의 흑검문을 치려고 하북팽가와 청성파가 손을 잡았습니다.”

“흑검문이라…… 신경 쓸 필요 없는 곳이잖나? 거기에도 변수는 없겠어. 이렇게 흐르면 양쪽에서 정파가 압승하겠군.”

천마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금천마령이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지금 단천마령이 덕양에 있습니다.”

“흐음?”

천마가 옥좌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으며 흥미를 보였다.

“북해를 떠난 후 돌아오라고 전갈을 넣지 않았나?”

“이미 전했습니다. 다만 사천은 오는 길목인 데다 지금 주석하와 함께 움직이고 있어서…….”

“아! 덕양이 주석하의 고향이었지.”

다시 생각난 듯 천마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최근 단천마령의 행동에 이상한 점이 있었나?”

“없습니다. 제갈세가에서도 북해에서도 정사에 분란을 일으켜 균형을 맞추고 주석하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천마도 그간의 보고 내용을 다시 되새겼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덕양에 있는 두 사람이 하필 우설금과 주석하라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그 둘은 무한회귀공과 엮여 있는 핵심 인물이다. 그 둘의 교감이 단순한 우연일까.

‘그래 봐야 나의 장난감인 것을…….’

천마의 시선이 눈앞에 놓인 바둑판을 향했다. 가끔 일상이 무료하고 권태로울 때 그는 바둑을 뒀다. 우설금이든 주석하든 그에게는 저 바둑돌과 다르지 않다.

우설금은 그가 무한회귀공으로 회귀하면서 키워낸 인물이다. 마교의 핵심 인물이자 그를 즐겁게 하는.

주석하는 이번 회귀에서 흥미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흑도팔군이 키운 인물이고 이 세상에서 그와 함께 단 둘뿐인 회귀자다. 녀석이 아직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지난번보다 이번 회귀가 더 흥미롭다. 수차례 회귀를 반복하면서 무공이 극에 이른 그에게 이런 재미마저 없다면 어쩌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절대자가 될수록 고독하고 인생의 흥미를 잃어버린다. 역대 황제 가운데 성군보다 폭군이 더 많은 점이 이해가 됐다.

이미 절반에 가까운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목숨을 잃었다. 아직 마교의 전력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교 최고의 전력인 자신을 제외하더라도 마교수호사령과 마교칠왕이 건재하다. 지금 당장 정사 연합군과 맞서 싸워도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다.

‘그래도 마교 천하를 대대손손 유지하려면 완벽한 승리를 거둬야 한다. 정파와 사파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망가져야 하지.’

천마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뜻은 자연스럽게 금천마령에게 전달됐다.

“정사가 서로 상잔하도록 잘 조율하겠습니다.”

“그래, 다만 언제든 우리 마교가 중원에 입성할 수 있도록 마교칠왕에게 준비하라고 전해라.”

“예, 하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단천마령에게 덕양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빨리 돌아오라고 다시 연락하라.”

금천마령이 사라지자 천마는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판 위의 바둑돌이 사람으로 보였다. 저 바둑돌은 제갈휘이고, 저 돌은 뇌군이다. 그리고 저기에 붙은 두 돌은…… 주석하와 우설금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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