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하북팽가와 청성파 (3)
백호문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비록 백호문이란 현판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이곳이 백호문임을 누구나 안다. 주석하에 의해 봉문된 지 일 년을 훌쩍 넘어 이 년이 다가오는 시점에 문이 활짝 열렸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덕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봉문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문을 연 백호문을 비난했다. 그들은 최근 들어 백호문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실 무림과 동떨어진 주민들이라 백호문에 관심이 없기도 했다.
반면 이를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용병을 자원하여 백호문을 방문한 낭인들이다. 그들은 오늘 문이 열린 사건을 정파의 도약으로 보았다. 사파에 억눌려 움츠렸던 정파가 다시 제힘을 찾은 날이었다.
백호문 중앙 전각에서 문주인 선우청과 책사인 현현자는 귀빈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석하가 파괴했던 전각은 말끔하게 보수되어 있었다. 백호문 어느 곳에서도 핍박받은 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치 경사를 맞은 집안처럼 흥청거렸다.
“어서 오시지요.”
문주인 선우청이 팽두석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청운괴도 팽두석은 중원사룡으로 협명을 날렸을 뿐 아니라 최근에 가주였던 살존이 죽은 후 가주 자리를 승계했다. 팽두석의 나이는 약관에 불과했으나 무림인 누구도 그를 얕잡아 볼 수 없었다. 하물며 시골의 작은 문파인 백호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갑자기 하북팽가에서 흑검문을 손봐주겠다고 했으니 백호문으로서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팽두석은 거만한 표정으로 답례하고는 마련된 좌석에 가장 먼저 앉았다.
선우청과 현현자가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자리를 잡고는 눈치를 봤다.
대청에서 내려다본 앞마당에는 하북팽가 제자들 이십여 명이 진을 쳤고 그 옆으로 백호문 제자 수십 명이 도열해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밖에서 환호성을 터트리는 용병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열띤 분위기에 흡족해진 팽두석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덕양은 백호문 천하가 될 겁니다. 사파가 날뛰도록 내버려 둘 수 없지요.”
“하하, 정말 고맙습니다. 흑검문에게 당한 핍박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청성파에서 오늘 검우방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보냈습니다. 이제 언제든 흑검문을 단죄할 수 있습니다. 길일을 잡으시지요.”
팽두석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선우청은 연신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대 문주가 주석하에 의해 죽고 갑자기 문주가 된 선우청은 한때 엄청 후회했었다. 주석하에게 이리저리 시달림을 받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니 역시 문주 자리가 좋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길일은…… 이미 알아봤습니다. 사흘 뒤 정오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선우청은 하루라도 빨리 복수하고 싶었다. 다만 역관에게 알아보니 그날이 제일 좋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미루게 됐다.
“흑검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요즘 거의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사실 움직여봐야…… 벼룩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비굴한 웃음을 띠며 선우청은 연신 고개를 읊조렸다.
선우청도 팽두석도 이미 대세가 결정 났다고 생각했다.
팽두석은 죽은 살존을 떠올렸다. 울컥 슬픔이 올라왔다. 주석하 녀석을 직접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 녀석은 이미 상춘원 호수 아래에 묻혔다니 방법이 없었다. 남은 흑검문을 잘근잘근 밟아 복수할 생각이었다.
“우리의 승리는 당연하니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은근한 말투에 선우청이 귀를 세웠다.
“덕양에 앞으로 흑도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일반 사람들에게도 단단히 경고해야겠지요. 그래서 공격 하루 전날 출정식을 하려고 합니다.”
하루 전이면 이틀 후다. 출정식을 하면 사기가 오른다. 적을 제압하는데 확실한 효과가 있다. 게다가 마을 주민에게 확고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선우청은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출정식을 하면 어찌 되었건 마을에서 백호문의 인상을 강력하게 심을 수 있다.
“좋습니다.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그 출정식에서…….”
팽두석이 목소리를 낮춰 지시를 내렸다.
선우청은 깜짝 놀랐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백호문 앞에서는 용병 지원자 신청을 받았다.
지원자들은 입이 찢어지도록 환호성을 질렀다. 예상보다 많은 일당과 위험이라곤 거의 없는 전투라 사기가 올라갔다.
지원자 줄 뒤편에 주석하도 서 있었다. 그는 우설금과 나란히 용병 신청을 기다렸다.
줄이 줄어드는 동안 그는 백호문 안쪽을 염탐했다.
과거에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지금 대청에서 흘낏 보이는 한 녀석이 눈에 거슬렸다. 문주인 선우청 옆에 있는 패기만만한 청년. 바로 팽두석이었다.
‘저놈이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놈이란 말이지…….’
주석하는 팽두석을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저들이 흑검문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리라. 감히 흑검문을 노린 죄를 물을 것이다.
주석하는 신청란에 ‘호북성에서 온 석하’라고 써넣었다. 졸지에 석씨 가문으로 바뀌었다.
주변에서 신청을 마친 용병들의 떠들썩한 대화가 들려왔다.
“흑검문이 발리겠네.”
“지금 검우방에도 엄청난 인원이 모여서 용병을 신청하고 있다네. 그곳에선 청성파가 주도하고 있지.”
“이 인원이면 흑검문을 열 번을 쓸고도 남을 것 같군.”
마치 벌써 승리한 것처럼 모두가 떠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주석하는 팽두석을 향해 전의를 불태웠다.
**
그 시각 흑검문에서는 불안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주인 주격과 장로인 신옹, 흑검자와 혈혼도객까지. 네 사람이 모여 머리를 짜내고 있었으나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소문주인 주석하가 제갈세가에서 죽었다는 비보를 들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문은 그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하북팽가가 몰려오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하북팽가가 왜 등장하는지 그들은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번에는 청성파도 참전한다고 했다.
하북팽가든 청성파든 흑검문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하루가 멀다고 모여서 회의를 거듭했지만……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소문은 점점 암울해졌고 그들은 사실상 포기 상태에 빠졌다.
“이제야 알았네. 부친이 왜 덕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주격은 부친 흑풍검신의 규제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그 규제가 오십 년 만에 해제되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제는 아들마저 잃었으니 가문의 맥도 끊어졌다.
그는 주석하를 덕양 밖으로 보내지 않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물론 후회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흑검자, 어떤가?”
흑검자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작전이든 무엇이든 엇비슷한 상대라야 뭔가를 할 수 있다. 이 싸움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뒤집기 어렵다. 당연히 맥이 빠져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방법은 있습니다!”
“뭐지?”
“그냥…… 야반도주하시죠.”
“끙!”
신옹과 혈혼도객도 마찬가지였다.
혈혼도객은 혼천교가 멀리 있음을 한탄했다. 가까이 있었다면 혼군에게라도 알렸을 텐데 거리 때문에 방법이 없다.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문주님 가족만은 지키겠습니다.”
흑검자가 결의를 다졌다.
주격이 한숨을 쉬며 모두를 달랬다.
“난 괜찮네. 문도들이 살아남아야지.”
그들이 다시 울적한 감상에 빠져있을 때 밖에서 한 제자의 전언이 들려왔다.
“문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곧 멸문할 문파에 손님이?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
주소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린 소녀를 힐끔거렸다.
갑자기 흑검문을 찾아온 낯선 손님은 유비연과 명아였다. 유비연은 예전처럼 남장하고 있었고 명아는 이제 아홉 살 난 어린 소녀였다.
“유 소협!”
주소은은 정말 감격했다. 이런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유 소협이 찾아주다니! 이것은 유 소협이 그녀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도 유 소협이 여자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주소은은 유비연을 얼싸안고 해후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차마 그러지 못했다. 대신에 유비연이 데려온 명아를 감싸 안았다.
‘유 소협에게 애가 있었나? 설마?’
살짝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유비연이 명아를 소개했다.
“그, 그래요? 오라버니가 명아를 구해줬었다고요?”
“주 공자가 명아를 정말 아꼈었죠.”
“아아, 이럴 수가!”
유 소협의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속에 주석하와 친한 아이라 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안녕하세요. 명아인데요, 화산파에 입문한 지 일 년 되었고요…….”
한바탕 인사가 오간 후 주소은은 그들이 온 목적을 물었다.
“명아가 흑검문을 도와야 한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이번 사태는 하북팽가와 무림맹의 아집에서 비롯된 일이라 절대 굴복할 수 없어요.”
“여긴 목숨이 위험할 텐데요.”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유비연이 결의를 내보였다.
“저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명아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냈다.
주소은은 다시 감격했다. 역시 유 소협이 있으니 세상은 살만했다. 그녀는 내일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온 주격이 유비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친우가 찾아왔으니 주석하는 사람을 잘 사귄 모양이다.
그들이 정문 앞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나타났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주소은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궁천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동생인 남궁서란과 처음 보는 여인이 함께 오고 있었다. 그 여인은 남궁서란의 외모에 필적할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주소은은 남궁천을 보고 뛰었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오히려 불안해졌다.
“주 소저, 잘 있었어요? 아! 제가 인사를 잘못했네요. 주 공자를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남궁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남궁천은 주격을 비롯한 흑검문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괜찮네. 운명 아닌가. 그런데 이곳에는 웬일인가?”
주격의 물음에 남궁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북팽가의 도발을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비록 제 무공만으로는 상대하기 쉽지 않겠지만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하지만 자네들도 목숨을 아껴야 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북팽가와 무림맹의 불의에 더는 눈감을 수 없습니다.”
남궁천이 입술을 꽉 다물고 의지를 불태웠다.
“이쪽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주소은이 먼저 물었다.
남궁서란 옆에 있던 여인이 발랄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천중화 백화령입니다. 강호에서는 천상삼화로 알려져 있어요.”
“아! 천상삼화…….”
주소은은 자신감이 팍 식었다. 남궁천을 놓고 그녀가 대적하기엔 너무 강적이었다.
실망감에 우울해지려는 찰나 들려온 말에 다시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제가 제갈세가에서 주 공자에게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주 공자의 사문인 흑검문이 핍박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어요.”
남궁천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고? 주소은은 안도감 속에 격렬하게 백화령을 환영했다.
갑자기 남궁천과 유비연이 가담하면서 흑검문의 전력이 급상승했다. 물론 그래 봐야 하북팽가와 청성파 연합에 견줄 바는 아니었으나.
침울했던 흑검문이 잠시나마 활기를 띠었다.
주소은은 행복했다. 그녀가 마음에 두었던 두 소협이 죽음을 무릅쓰고 와주었으니까. 다시 이 두 사람을 놓고 골라야 한다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비록 사흘 후에 죽을 목숨이지만 이렇게 기쁘게 죽을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녀와 달리 다른 여인들은 묘한 긴장감에 빠졌다.
남궁서란처럼 백화령도 유비연을 바로 알아봤다.
무려 천상삼화가 한곳에 모였다. 왜 이곳에 집결했는지 세 사람 모두 어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