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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54화 (154/273)

154화 출정 전야 (1)

천상삼화 세 여인은 서로 상대를 노려봤다.

비록 그녀들은 천상삼화로 묶여 강호에서 같은 부류로 취급받고 있지만 딱히 더 친하다거나 서먹하지는 않다. 가까우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경쟁하는 관계다.

이미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고 함께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이상했다.

이곳은 정파도 아닌 흑도 문파다. 그런 곳에 정파인 세 사람이 모였다. 그것도 한 사람은 남장까지 하고 나타났다.

남궁서란과 백화령이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유비연은 왜 남장하고 있지?

정작 유비연과 백화령의 의문은 달랐다. 남궁서란은 주석하를 무척 싫어했는데?

남궁서란과 유비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화령은 주석하와 무슨 관계였지?

세 사람 모두 상대방의 흑검문 방문을 이상하게 여겼다. 지금 흑검문은 대단히 위험한 동네다. 단순히 무림 정의를 위해 흑검문을 돕는다고 핑계를 대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렇다고 주석하를 떠올리면 그는 이미 죽었다.

“서로 협력해서 잘해 봐요.”

유비연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녀들끼리 다툼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남궁서란과 백화령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상춘원에서 죽음의 현장을 봤으면서도 속으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주 공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그녀들의 어색한 상봉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주소은이다.

그녀는 명아를 품에 안고 얼핏 이 장면을 봤다. 당연히 그녀는 이들의 역학 관계를 전혀 몰랐다. 다만 모두 오빠 주석하를 위해 이곳까지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

**

주석하는 객방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우설금이 가부좌를 튼 채 운기하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양승과 사운혜가 외출 채비로 분주했다.

“용병 신청하셨어요?”

사운혜가 할 일이 없어 배회하는 주석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엊그제 했습니다.”

“어디에서요?”

“백호문요.”

“어머, 저희는 검우방에서 했는데.”

두 사람은 청성파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사실 주석하는 그날 청성사협과 분란이 있는 바람에 검우방 쪽에는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검우방도 사람들이 많았나요?”

“정말 많았죠. 모두 흑도 문파를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죠.”

“그랬군요.”

주석하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흑검문이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갈휘와 하북팽가의 심계가 대단하다고 할밖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혹시…… 이런 말씀 드리기 이상한데…… 걱정되지 않나요?”

“걱정?”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아, 그거야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원초적인 불안감이죠. 하지만 딱히 겁나진 않아요. 무림 정의를 위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으니까요.”

“그 믿음이 잘못되었으리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글쎄요? 전 무림맹을 믿으니까요. 이번 건은 무림맹의 핵심 사업이니까…….”

사운혜는 조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아마 일반 무림인들은 다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전…… 흑검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네? 흑검문이 당문을 멸문시켰다잖아요?”

사운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당문이라면 엄청난 거대 문파인데…… 이름 없는 흑검문이…….”

“어…… 그렇긴 한데…… 뭐, 나쁜 놈이니 가능했겠죠. 흑검문 소문주가 살존의 죽음에도 관여했다잖아요? 그래서 하북팽가가 들고 일어난 거라고…….”

“그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무려 살존 같은 고수를…….”

사운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깨달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독을 쓰거나 그랬겠죠. 악인이 달리 악인인가요. 시중에 별별 소문이 많아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소문이 돌면 이유가 있는 법이죠. 흑검문이 처신을 제대로 했다면 이런 사태가 벌어질 리 없고요, 또 지금처럼 변명조차 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사운혜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폈다.

주석하는 그녀에게서 일반 무림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대중은 그럴법한 포장에 휩쓸리는 법이다. 무림맹이란 거대 세력 앞에서 흑검문처럼 소규모 문파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흥! 목숨이 아까운가 보구나?”

지금까지 보고만 있던 양승이 비웃음을 던졌다.

주석하의 미간이 확 일그러지자 양승이 재차 빈정거렸다.

“일당만 받고 멀찌감치 뒤에서 빈둥거리는 방법도 있긴 하지.”

“당신은…….”

“우리 대운방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앞에 나가서 싸우지!”

주석하는 양승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사운혜가 먼저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는 먼저 나가볼게요. 오늘 정오에 마을 광장에서 출정식을 연다고 했어요. 구경 가야죠!”

사운혜가 재차 비난하려는 양승의 등을 떠밀면서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게 되자 주석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목숨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전투 때 그가 저들과 반대편에 서기 때문이다. 저들의 무공은 평범해서 절대 그를 상대할 수 없다. 그래도 며칠 같은 방에서 묵은 사람에게 검을 들이대고 싶지 않아서 넌지시 말을 꺼냈던 것이었는데.

“저들을 모두 죽여야 하나…….”

현재 돌아가는 사태를 보면 유혈 참극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흑검문이 조용히 있을수록 저들은 더 심하게 나올 것이다. 어떻게든 저들이 흑검문으로 몰려가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그와 아무런 은원 관계가 없는 자들을 죽이기는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눈 딱 감고 살인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석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운기에 집중하고 있는 우설금을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어떻게 할까. 마교인인 그녀는 스스럼없이 적에게 검을 들이대겠지. 그런 심성을 가진 그녀가 지금은 한없이 부러웠다.

잠시 후 우설금이 운공을 끝냈고 주석하는 그녀와 함께 객잔에서 끼니를 때웠다.

밥을 먹고 있을 때 객잔 안으로 몇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가 귀를 자극했다.

“들었어? 오늘 출정식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다더군.”

“하북팽가에서 작정하고 기획한 거니까 당연히 모일 수밖에.”

“흑검문도 참 안됐어. 오늘 출정식에서 본보기로 몇 놈을 죽일 거라던데…….”

“벌써?”

이게 뭔 소리지? 주석하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벼락을 맞은 듯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석하는 벌떡 일어나 급히 객잔을 나섰다.

우설금도 바로 그를 따라갔다.

**

마을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주석하가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의 광기 어린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얽혀 무엇을 진행하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광장을 빙 둘러선 사람들의 장막을 뚫고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접근이 어려워 멈춰선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물었다. 당연히 고개를 젓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자 주석하는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광장 곳곳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고목이 자라고 있고 그 고목 위에서 구경하는 몇몇 무림인들이 보였다. 나무 위 높은 곳이라면 광장 전체를 쉽게 구경할 수 있다.

마침 딱 좋은 장소에 서 있는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고목에도 서너 사람이 올라가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소란이 점점 가중됐다. 주석하는 재빨리 고목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무공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우설금도 곧바로 그의 옆에 착지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색달랐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중앙은 비교적 넓었고 질서정연했다.

주석하는 금방 주요 인물을 알아봤다. 백호문, 검우방, 하북팽가, 청성파의 주요 인사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몇몇은 주석하가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출정식을 주관하는 청운괴도 팽두석을 금방 발견했다.

정작 주석하의 눈을 의심하게 한 것은 다른 장면이었다.

주요 인사들이 착석해 있는 맞은편에 모두 여섯 사람이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은 포승줄에 묶인 채 마치 죄인처럼 취급받았다.

“누구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 무엇인지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한 인물이 앞으로 나와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들은 그동안 흑검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단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와아! 죽여라!”

군웅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흑검문에서 호의호식이라니? 그런 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석하의 몸에 분노로 힘이 들어가는 순간 옆에 있던 우설금이 소매를 꽉 잡았다.

그다음 벌어진 일은 순식간이었다.

한 인물이 나오더니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고 목이 떨어졌다. 관아에서 죄인을 처형하는 모습이 재현됐다.

“이, 이건…….”

그제야 주석하는 묶여 있는 여섯 사람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유난히 눈에 익었다. 바로 백화루의 경비를 맡은, 흑검문에서 파견한 자였다. 그가 백화루를 자주 드나들었기에 그곳에 파견된 흑검문도는 눈에 익었다.

말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들 여섯 명은 흑검문에 소속되어 흑검문에서 맡은 주루나 객잔을 관리하던 자들이었다. 하북팽가에서는 그런 인물 여섯을 잡아 와서 흑검문 소속이라는 핑계로 단죄한 것이다.

사실 흑검문 소속이라지만 저들의 무공은 보잘것없고 대부분 적혈방이나 살검회가 무너지면서 흑검문으로 소속이 바뀐 자들이다.

“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가 얼이 빠져있는 사이 순식간에 처형이 끝났다. 단상 위에는 떨어진 머리 여섯 개가 뒹굴고 주변이 피로 얼룩졌다.

사람들의 광기 어린 외침이 점점 고조되고 하북팽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흐뭇한 표정으로 군웅에게 화답했다.

“무림맹은 승리한다!”

“흑검문을 처단하라!”

군웅들의 환호가 광장을 메웠다.

갑자기 출정식이 계획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국가 간 전쟁에서도 잡은 포로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그런 기본마저 지켜지지 않았다. 단지 흑검문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됐다.

이것이 정파가 할 짓인가?

주석하는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단상에서 떼지 못했다.

이곳에 모인 군웅은 대부분 정파를 지지하는 평범한 무림인들이다. 평소 무림 정의를 외치며 불의에 항거하던 그런 자들이다. 적어도 말로는 그랬다.

같은 객방을 사용하는 양승과 사운혜도 정의감에 불타 있었다. 그 두 사람도 지금 이곳 어디에선가 저 장면을 보며 환호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군중 심리가 일방적으로 흐른다지만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던가. 정파 상층부만 썩은 게 아니라 그 아래층까지 모두가 썩었던 건가.

“으으으…….”

주석하는 신음을 토했다.

흑검문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한 저들에게 미안했다. 그가 사고 치지 않았다면 저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이 죽은 이유는 순전히 자신 때문이었다. 그가 십존을 죽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죄책감과 동시에 무림맹과 하북팽가를 향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일었다.

주석하는 단상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고목에서 몸을 날리려는 순간 우설금이 그를 꽉 붙잡았다.

“안돼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주석하는 우설금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우설금도 단호했다. 그녀는 주석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단상으로 뛰어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설금보다 주석하가 더 잘 안다. 그의 이성은 내면에서 참으라고 소리치면서도 감성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화르르르-

갑자기 주석하가 앉아 있던 고목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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