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출정 전야 (2)
뇌군의 내력이 분노로 발작을 일으키며 무의식적으로 극양염천신공이 뿌려졌다. 마른 고목 가지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으악!”
이 고목에 올라 광장을 함께 구경하던 무림인들이 기겁해서 뛰어내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석하의 몸을 우설금이 꽉 잡았다.
“참아요. 참아야 해요.”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참아야 하지? 저들이 무고한 흑검문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우설금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주석하는 광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지금 죽은 저 여섯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죽어갔을까. 흑검문을 원망했으려나. 아니면 그를 원망했으려나.
저들은 시신을 묻어줄 사람이 없어 죽어서도 편안하지 못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분노를 표출한다고 하여 사실 달라질 것은 없다. 군웅에게 흑검문을 더 나쁜 문파로 각인시킬 뿐.
분노로 격동했던 그의 마음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었다. 조금은 더 이성적으로, 더 치밀하게 복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좋아! 몽땅 죽여주마!”
그제야 고목에 붙은 불을 의식한 주석하는 극한빙백신공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서리가 하얗게 일면서 불이 꺼졌다.
동시에 주석하는 우설금의 손을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출정식을 더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저들의 헛짓거리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없으니. 계속 구경하다가는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다.
시간은 없다. 내일 저들이 흑검문으로 몰려가기 전에 해법을 찾는다. 흑검문 앞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하북팽가와 청성파, 백호문과 검우방의 목숨은 내일 정오가 되기 전까지 끝장을 내야 한다.
흑검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이다!
주석하와 우설금이 사라지고 난 후 군웅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광장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자가 있었다. 그는 살검회의 소회주였던 도수였다.
**
자연스럽게 객잔은 저녁부터 흥청망청했다. 출정식으로 고양된 용병들의 분위기가 한껏 활기를 띠었다.
결전을 앞두면 모두 긴장하게 마련이다. 내일 운명의 시간을 맞을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일찍부터 술을 찾았다. 아무리 전력이 압도적이라지만 전쟁은 전쟁이니. 특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용병이라면 더욱 그렇다.
긴장을 푸는 최적의 방법은 술이어서 다른 날과 달리 객잔에 모인 용병들은 오늘따라 술을 많이 마셨다.
“흑검문 그놈들을 내가 콱 처발라주지.”
“혹시 흑검문에 금은보화가 많을까?”
“당연하지. 놈들의 악행을 생각해 봐. 창고에 많이 꿍쳐놓았겠지.”
“흐흐, 내일 단단히 한몫 챙길 수 있겠군.”
“난 여자를 챙겨야지. 흐흐, 거기에서 한탕 재미 본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탁자 곳곳에 술판이 벌어지고 급기야 대화는 갈 곳을 잃었다. 돈을 따라 강호를 떠도는 부나방 인생이 바로 용병이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기분이 가라앉은 주석하는 요기를 하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갔다. 도무지 군중 심리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 벌어진 술판과 낮에 본 그들의 광기가 눈앞에서 겹쳐졌다. 그들에게는 재미일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목이 날아간 억울한 사건이다.
방을 함께 쓰는 양승과 사운혜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주석하는 그들과 눈으로 인사하고 이불을 깔았다.
저 두 사람 또한 대낮에 그 광기의 현장에서 환호했으리라 생각하니 그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만…….
“갑자기 왜 그래? 왜 포기하고 돌아가겠다는 거야?”
양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몰라요. 그냥…… 내일 정벌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사파를 처단하자고, 이 원정에 합류하자고 먼저 주장했던 게 너잖아?”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싫어요.”
양승과 사운혜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큰 다툼 없이 지내던 두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저절로 귀가 쏠렸다.
“너도 겁이 났어? 저 새끼처럼?”
낮에 있었던 대화를 소환하는 양승의 말투가 심히 거슬렸으나 주석하는 못 들은 척했다.
“겁이 난 게 아니라…… 마음이 불편해요.”
“흥! 출정식에서 죽은 그놈들 때문에? 그들은 죽을죄를 지었어.”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요?”
사운혜가 목소리를 높이며 따졌다.
“흑검문 소속이란 것만으로도 죄야. 그곳이 나쁜 곳이란 걸 알았으면 재빨리 빠져나왔어야지.”
“그게 말이 돼요? 이곳에 온 후 흑검문에서 나쁜 짓 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요?”
사운혜가 대들며 다그치자 양승이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했다.
“없잖아요?”
“애초에 이곳에 와서 유명인사들과 안면을 트자고 주장한 게 너였어. 지금 와서 왜 이래?”
이후로 시끄러운 다툼이 계속됐다.
주석하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사운혜는 오늘 출정식에서 벌어진 잔인한 처형 장면에 정신이 번쩍 들었나 보다. 반면 양승은 별생각이 없고.
두 사람의 다툼이 쳇바퀴 돌 듯 계속되자 어쩔 수 없이 주석하가 한마디 했다.
“잠 좀 잡시다.”
“뭐야? 이 새끼가?”
양승이 버럭 소리치며 주석하에게 대들려는 순간 사운혜가 아슬아슬하게 그를 붙잡았다.
“사형! 왜 이래요? 참아요. 우리가 시끄럽게 군 것도 맞잖아요!”
“우리가 언제?”
“지금도 시끄럽게 하고 있거든요.”
한동안 양승이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대다가 되돌아갔다.
사운혜가 조심스럽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물론 주석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그는 흑검문에 있을 아버지와 누이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
모두가 잠이든 축시 무렵, 주석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온종일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적들이 흑검문으로 몰려가기 전에 무조건 친다. 저 많은 인원이 흑검문으로 쳐들어가면 대책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용병까지 모두 죽일 수는 없다. 그런 짓을 자행하면 그 또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은…….
주석하는 조용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설금이 잠들어 있고 맞은편에는 열심히 싸우던 두 사람이 꼭 붙어서 자고 있었다. 그새 화해를 한 건지. 아니면 잠결에 몸이 밀착된 것인지.
주석하는 개어두었던 옷을 확인했다.
평소 입던 흑의와 새로 산 서생 차림의 청의. 몇 번 망설이던 그는 흑의에 손을 가져갔다.
밤에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검은 옷이 유리하고 지금부터는 흑검문의 이름으로 나서는 것이기에 굳이 흑의를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조용히 재빨리 흑의를 입은 그는 한쪽에 세워 두었던 흑검소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비장한 결의가 엿보였다.
주석하는 방을 떠나기 전 우설금과 두 사람을 쓱 훑었다.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주석하가 사라지고 난 후 갑자기 우설금이 눈을 번쩍 떴다.
옆자리를 살펴본 우설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조용히 일어나 개어놓은 옷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녀가 평소 입던 붉은 옷과 새로 산 연노랑 궁장이다.
몇 차례 망설이던 그녀는 연노랑 궁장을 꺼냈다.
금방 단장을 마친 그녀는 홍철산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객방에는 여전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양승과 사운혜는 주석하와 우설금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
어둠을 타고 주석하는 재빠르게 백호문으로 이동했다.
그가 생각한 작전은 단 하나였다.
이들은 내일 낮에 흑검문을 칠 예정이니 전날인 오늘 밤에 이들을 단죄한다. 지금 백호문에 모인 사람은 평범한 용병이 아닌 백호문 문도와 하북팽가 사람들이니 죽더라도 억울할 자는 없다. 적의 핵심이 모인 이곳을 박살내면 내일 원정은 한풀 꺾이지 않을까.
백호문으로 향하는 길을 너무 잘 알기에 그는 거침없이 달렸다.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고 사위는 어두워 그림자도 남기지 않았다.
백호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예상치 못한 광경과 부딪혔다.
“잡아라!”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부가 소란스러웠다. 백호문 전체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백호문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 주석하는 내부의 동정을 주시했다.
백호문 전체가 잠에 빠져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모두가 깨어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젠장!”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으니 접어야 하나? 물론 잠이든 백호문을 그가 습격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겠지만 막상 이 상황에서 백호문에 뛰어들려니 김이 팍 샜다.
문득 어쩌면 그와 같은 마음으로 백호문을 습격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하는 담을 넘어 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금 백호문 전체가 낯선 침입자에게 시선이 쏠려 있어서 오히려 잠입이 용이했다.
지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모든 정황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 전각 앞마당에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을 포위한 상태였다. 복면을 쓴 흑의인의 무공이 상당한 듯 주위에는 십여 구의 시신이 널려 있고 포위한 자들은 쉽사리 공격하지 못한 채 포위망만 유지하며 시간이 흘렀다.
“네놈은 누구냐?”
흑의인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세우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쥐새끼 같은 놈이!”
“네놈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흑검문 사람이냐?”
“정체를 밝혀라!”
흑의인을 가운데 두고 무수히 많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점점 주석하도 의문에 휩싸였다.
누굴까? 흑검문에는 감히 이런 일을 벌일 자가 없다. 현재 흑검문에서 가장 강한 혈혼도객도 이곳에 잠입해서 저렇게 사람을 죽일 능력이 없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포위한 자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흑의인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은 날카로웠고 대단히 빠르며 간결했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졌다.
낯익은 그 놀라운 무공에 감탄하기도 잠시 주석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도수구나!’
암군의 독문무공, 암천살검을 어찌 모를까. 도수의 체형을 어찌 잊을까. 흑의인이 몇 차례 휘두른 초식만으로도 주석하는 그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뿌듯한 감격이 밀려왔다.
암흑단에서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있어야 할 도수가 이곳에 등장했다.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도수는 하북팽가의 원정 소문을 들었을 테고 흑검문을 도우려고 암흑단을 떠났을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그는 흑검문을 위해 최고의 방법을 찾았을 테니……. 그 방법은 주석하와 같았다. 도수 또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을 노려 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심전심이다.
‘고마워…….’
눈물이 차올랐다. 흑검문을 도와주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도수는 그에게 특별한 인물이기도 했다.
불과 일 년 남짓한 사이에 도수는 크게 바뀌었다. 지금 도수의 무공은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다. 저 포위망 속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검을 뿌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강해졌는지 추측 가능했다.
쉽게 도수를 잡을 수 없자 푸른 줄무늬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재차 포위망을 형성했다. 주석하는 그들이 하북팽가임을 금방 알아챘다.
도수를 잡기 위해 하북팽가의 주요 인물들이 나선 것이다.
곧바로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의 수준이 달라진 이번 싸움에서는 도수도 쉽지 않아 보였다. 초반 몇 수 동안 잘 버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열세를 드러냈다.
주석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안색이 점점 싸늘해졌다.
이제 시간이 됐다. 도수를 구하고 이곳에 모인 자들을 무차별로 살상할 시간이.
그는 흑검소를 입에 물었다. 전각의 지붕 위에서 죽음을 부르는 퉁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진혼곡鎭魂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