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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56화 (156/273)

156화 출정 전야 (3)

삐리리리-

난데없는 퉁소 소리에 사람들은 사방을 둘러봤다.

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퉁소 소리를 듣는 순간 만진장에서 퉁소를 들고 다니던 주석하를 떠올렸다. 그 녀석이 퉁소를 어떻게 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선이 지붕 위를 향하는 순간 도수는 익숙한 검은 인영을 발견했다.

“석하?”

주석하는 제갈세가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도수는 이를 믿지 않았지만 하북팽가 원정이 현실이 되고 덕양에 온 후에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친구인 주석하를 죽인 하북팽가를 응징하려고 백호문을 습격했다.

도수의 무공은 암습에 최적화되어 있고 암흑단에서 배운 방식도 비슷한 유형이었다. 그 장점을 살려 하북팽가를 치려고 야밤에 이곳에 왔다.

다만 그가 예상한 것보다 적이 훨씬 강했다. 덕분에 큰 성과를 내기도 전에 수세에 몰렸다.

그러던 찰나 주석하를 발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식! 살아있었구나!”

주석하를 본 순간부터 힘이 났다. 심신이 편안해지면서 없던 힘이 솟아났다.

도수의 검이 더욱 빠르게 허공을 가르고 주위를 포위했던 자들이 피 분수를 뿜었다.

퉁소 소리가 고조되면서 강력한 음파가 장내를 휩쓸었다. 음파를 타고 강기의 파편이 뿌려지면서 공력이 약한 자들이 픽픽 쓰러졌다.

주석하가 뿌리는 음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다수를 한꺼번에 공격할 때 이보다 더 위력적인 무공은 없었다.

순식간에 백호문 문하생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냐!”

백호문의 주요 인물들이 지붕으로 튀어 올라왔다.

주석하는 지붕에 걸터앉은 채 조금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삐리리리-

공격해 들어오는 백호문도를 향해 강기의 파편이 폭죽처럼 퍼져갔다.

“으아악!”

다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음파는 파죽지세의 위력을 띠고 거침없이 사람을 공격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에 벤 것처럼 피부가 터져나가고 핏방울이 비산했다. 이 순간 주석하는 죽음의 사신이었다.

아래에서는 도수의 검이, 위에서는 주석하의 퉁소가 서로 호응하면서 지옥도를 그렸다.

한바탕 적을 정리한 후 주석하는 지붕에서 내려왔다.

“사, 살아있었구나!”

주석하를 본 도수가 감격의 일성을 발했다.

“네놈도 살아있었네?”

주석하도 같은 반응으로 응대했다. 그의 눈에 띈 도수는 예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그 얼굴은……. 단지 무공만 강해졌다.

피식 웃으며 주석하가 물었다.

“이 밤에 여긴 왜 왔어?”

“네놈 원수 갚으러.”

“나? 안 죽었는데.”

“그러게…… 왜 왔지?”

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환하게 웃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죽은 자가 절반이고 부상으로 신음하는 자가 절반이었다. 멀쩡한 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약한데?”

“아직 하북팽가의 주요 인물이 안 보여.”

도수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백호문은 두 사람을 위협할 수 없다. 하지만 하북팽가는 다르다.

그때 어둠 속에서 수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주석하! 살아있었구나!”

어째 반응이 하나같이 똑같을까.

주석하는 그나마 귀에 익은 목소리에 안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청운괴도 팽두석. 살존이 죽은 후 팽가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떠오르는 신성. 하북팽가의 흑검문 원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원흉이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주석하는 상대에게 바로 썩은 미소를 날렸다.

“오랜만이군. 못 본 새 가주가 되다니! 신났군?”“뭔 소리야! 네놈이 살존을 죽여서…….”

“후후, 그래. 내가 너를 가주로 만든 일등공신이지. 그런데 감사는 못 할망정…….”

“미친놈이!”

어차피 둘 사이엔 대화가 불필요했다. 두 사람의 사고방식은 정과 사로 구분된 이상으로 그 간극이 넓었으니까.

주석하는 사자후를 날렸다.

“자, 내가 왔다! 흑검문에 복수하겠다며? 나에게 복수해보아라!”

팽두석이 몸을 움찔했다.

제갈세가에 있을 때 주석하의 고강한 무공을 경험한 바 있다. 상춘원에서 벌어진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으나 무려 십존 셋이 덤볐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았다면 대체 주석하의 무공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그제야 잊고 있었던 공포가 팽두석을 잠식했다. 몸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커지던 공포가 주석하를 의식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지배했다.

‘이런!’

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절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이래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순식간에 팽두석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됐다.

“겁이 나나? 와라! 팽두석!”

쿵!

한발 앞으로 내딛는 주석하의 진각에 땅이 움푹 팼다.

주석하의 도발에 팽두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 복수를 하겠다고 몇 만리를 건너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막상 원수를 앞에 두고 주저하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감이 충만했었다. 그 자신감은 주석하가 없는 껍데기뿐인 흑검문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나.

자괴감 속에 팽두석은 주석하를 뚫어지라 노려봤다. 상대의 기에 오히려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과연 제갈세가에서 접했던 주석하와 지금의 주석하는 천지 차이였다. 지금 주석하는 그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고 있기에 그 기를 정면으로 받은 팽두석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렇게나 차이가 났었나…….’

팽두석은 중원사룡의 한 사람으로 강호에서 촉망받는 기재다. 이제는 오대세가인 하북팽가를 당당하게 이끄는 가주다. 앞으로 십 년이 흐르면 그는 정파십존에 오를 만큼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주석하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쿵!

죽음의 사신, 주석하가 다가온다!

팽두석은 강호를 함께 누볐던 애도를 꽉 쥐었다. 어차피 기호지세다. 시작한 이상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난다면 내일 흑검문을 치러 갈 것이고 죽으면…….

“하압!”

팽두석은 도를 치켜들고 전광석화처럼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도를 든 일곱 인영이 한곳으로 몰렸다. 바로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하북 팽가의 최강 무력인 팽가무적팔도진彭家無敵八刀陣)이었다. 팽두석을 포함한 이들 여덟 명이 형성하는 도진刀陣)은 소림의 십팔나한진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주석하와 도수는 사방에서 억누르는 무시무시한 압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해후의 감상에 젖어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오랜 세월 강호를 휘어잡았던 하북팽가의 저력이 어찌 무기력할 수 있을까. 순식간에 주석하와 도수는 위험에 빠졌다. 강력한 도기가 사방에서 엄습했다.

“수! 몇 명?”

“몽땅 다?”

“하나는 양보하지?”

“그러지!”

작전은 섰다.

주석하는 도수가 팽가무적팔도진을 상대하게 내버려 두었다. 암군의 진전을 이었다면 비록 도진을 압도하진 못하더라도 허무하게 패하진 않을 것이다.

주석하는 쉼 없이 휘몰아치는 여덟 인영 사이에서 정확히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진의 핵심을 차지한 저놈부터…….

도진의 공격을 백변환영보를 이용해서 가볍게 피한 주석하는 순식간에 팽두석과의 간격을 좁혔다.

“헉!”

팽두석이 놀랄 틈도 없이 주석하의 흑검소가 벼락처럼 검강을 뿜었다.

콰앙!

검강과 도강이 부딪혀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팽두석이 펼치는 초식의 위력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역시 중원사룡인가!’

강호에서는 중원사룡을 미래에 꽃을 피울 후기지수라 평가한다. 아직 그들은 정점에 이르지 못했고 강호 최강의 자리와는 꽤 떨어져 있다고 여겼다. 정파십존과 중원사룡의 차이는 그 세월만큼이나 격차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파십존과 겨뤄봤던 주석하는 이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지금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중원사룡은 정파십존에 미치지 못하지만 사실상 그 격차도 크지 않다. 거의 대등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청운괴도 팽두석의 무공은 전대 가주였던 살존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어린 그가 바로 가주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이유다.

주석하가 팽두석을 공격하자 도진을 구성한 다른 자가 급히 주석하를 향해 도기를 뿌렸다. 그 도기는 도수의 반발에 바로 막혔다.

주석하는 무시하고 도수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팽두석에게 몰두했다. 분노한 팽두석이 내력을 도에 싣고 전력을 다해 공격해왔다.

어둠을 가르는 도강이 빛을 발했다. 그 위력에 하늘과 땅이 호응하여 천지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가히 도신의 경지에 이른 공세였건만 주석하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미 그는 팽두석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가 흑검문을 압박했다는 것만으로도, 복수라는 핑계로 사악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와라! 네놈은 끝이다!”

백변환영보를 펼치자 주석하의 잔영이 백여 개로 불어나고 흑검소가 춤을 췄다.

“넌 내 가족을 건드리려 했으니 억울할 게 없다!”주석하가 포효했다. 흑검소도 수백 개의 환영을 형성했다. 그 많은 흑검소의 잔영이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몰려갔다. 전력을 다한 일검이 팽두석에게 집중됐다.

절정에 이른 암천살검이었다.

팽두석은 최강의 도법으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하려 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빛처럼 쏘아지는 공격은 너무 빨랐고 너무 많았으며 너무 강했다.

콰아앙-

검강을 차단하려던 수많은 도영刀影)이 위력적인 쾌검 앞에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지는 검강과 도강의 충격파가 어둠을 수놓았다. 그 여파가 순식간에 팽가무적팔도진을 뒤흔들었다.

여덟 사람이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절진이 한 방에 깨졌다. 도진을 재정비하기도 전에 도수의 검이 사방을 휩쓸었다.

쓰러진 자는 모두 여덟. 그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 사지 가운데 하나가 잘렸고 입으로는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으며 똑바로 서 있는 자가 없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자는 바로 팽두석이었다. 그의 가슴을 수백 개의 검강이 잔인하게 내부를 후벼 파고 지나갔다. 팽두석은 목 아래로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감탄의 눈으로 팽두석은 주석하를 쳐다봤다.

죽음을 앞에 두자 이제야 주석하의 실체가 보였다. 주석하가 어떤 사람인지,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이전에 알고 보았던 것은 실체가 아닌 그가 만든 허상일 뿐이었다.

살존이 죽어서 가문의 복수 때문에 흑검문을 도모하려 했었나? 이제야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팽두석은 깨달았다.

그는 갑자기 강호에서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과 같은 명성을 얻은 흑검서생을 시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모하던 여인, 남궁서란이 주석하를 눈여겨보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그런 옹졸한 마음이 흑검문 원정을 주도하게 했고 그러니 이 패배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네놈을 지우고 싶었는데…….”

팽두석은 울컥 선혈을 뱉어내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 돌고 눈이 감긴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북팽가라는 짐도 지금은 훌쩍 벗어던진 기분이다.

주석하는 무너진 도진 한중간에 서서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으으으! 사, 살려주시오!”

포위했던 놈들이 검을 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팽두석이 쓰러지는 순간 이곳에서 주석하는 죽음의 사신과 동급이었다.

흑검문을 노리던 녀석들을 단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투리다.

“도망치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백호문에 남은 자는 모두 죽는다. 딱 다섯까지만 세겠다!”

도수와 눈빛을 교환한 주석하는 포효를 터트렸다. 적어도 오늘만은 주저하지 않고 피를 뿌릴 것이다.

**

콰직!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검우방의 정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아니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쪼개졌다.

잠이 들었던 검우방과 청성파 사람들은 불난 집처럼 후다닥 뛰쳐나왔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연노랑 궁장을 걸친 우아한 여인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붉은 홍철산을 들고 있었다. 비도 오지 않고 햇빛도 없는 야심한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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