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출정 전야 (4)
우설금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바로 청성사협이었다.
마침 그날 주단점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그 옷을 우설금이 입고 있으니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들은 여인 한 명이 검우방의 문을 깨고 들어왔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옷 가게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해서 망신을 샀다. 그때 그들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분노였다. 청성사협이란 명성이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만큼 그들은 강호를 돌면서 여러 공적을 세웠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날 망신을 톡톡히 당했지만 그 이유가 무공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우아한 양갓집 규수라고 믿었던 여인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기에 당했을 뿐이다.
그날도 그들이 다시 주단점 내부로 쳐들어갔을 때 도망치고 없지 않았던가. 이것은 그들의 무공과 배경을 겁냈기 때문이라고 정신 승리를 했었다.
“으흐흐, 네년이 다시 왔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우설금을 다시 본 순간 청성사협은 눈이 뒤집혔다. 그날 당했던 수모를 백배로 갚아줄 것이다!
지금 이곳은 검우방이지만 어차피 검우방은 청성파 아래다. 이번에 원정 온 청성파 사람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자 총괄을 맡은 장로를 제외하면 청성사협을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저 여인을 잡아 어떻게 처리하든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기고만장한 청성사협은 소리 높여 윽박질렀다.
“네년은 누구냐?”
당연히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손에 쥔 홍철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렸다.
어둠 속에서 분홍빛 모란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그 광경에 주변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우설금의 아름다움과 자태가 모두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당연히 청성사협도 그녀의 미모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름도 못 밝힐 만큼 부끄러운가 보구나.”
청성사협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들은 우설금을 독 안에 든 쥐로 여겼다. 그녀가 십존 급의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니 오늘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누구도 우설금이 자진해서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우설금의 미모에 홀려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서히 우설금의 입가에 싸늘한 서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잡아라!”
청성사협이 소리치자마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장한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푸아악-
우설금의 몸에서 분출된 강기의 벽에 달려들던 사람들이 마치 폭풍에 맞은 듯 날아갔다.
“으아악!”
순식간에 십여 명이 바닥을 나뒹굴자 사람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사람을 현혹하는 아름다움 뒤에 숨은 무자비함을 발견했다. 눈앞의 고운 여인이 실제로는 잔인한 마두임을 그제야 알아본 것이다.
“상대는 하나다! 얼른 잡아라!”
다시 청성사협이 소리쳤다.
“우와아!”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고 믿은 포위 무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우설금의 반응이 달라졌다. 그녀는 홍철산을 돌리며 커다란 원을 그렸다.
홍철산에서 붉은 강기를 날카롭게 뿌리는 순간 달려들던 사람의 목이 날아갔다. 부나방처럼 생각 없이 달려들던 사람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벌써 십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처음에 그들은 여인을 가소롭게 여기며 희롱하듯 덤볐다. 한차례 실패한 후에는 이전보다 한결 진지한 태도로 상대했다. 그때도 상대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악마를 보는 듯 눈을 피했다. 덤벼들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우설금에게서 피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저년을 잡아라! 잡는 자에게 큰상을 내릴 것이다!”
청성사협이 다시 소리쳤으나 아무도 우설금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우설금에게서 가소로운 비웃음이 피어났다.
악마의 미소를 보았다고 사람들이 여기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모란꽃이 화려하게 그려졌다. 대체 어떤 무공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그들은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포위망이 무너지고 검우방 앞마당은 시체가 쌓이고 피로 물들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누구도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눈앞의 이 여인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고수였다. 설사 정파십존일지라도 이런 무위를 보이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우설금의 연노랑 궁장이 공간을 뒤덮었다. 몸이 굳은 사람들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참한 살육!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피의 제전이 전개됐다.
연노랑 궁장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분홍빛 모란꽃이 어둠 속에서 피어났다. 그 꽃은 죽음의 꽃이었다. 모란꽃을 목격한 자 가운데 숨이 붙은 자는 없었다.
지옥도!
청성사협은 겁에 질려 이 잔인한 장면을 계속 볼 수 없었다. 희대의 살인마를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에 그들은 전각 내부로 숨었다.
콰아앙-
그들이 대청 내부로 달려가기도 전에 전각 지붕이 날아가며 기둥이 뿌리째 뽑혔다. 이게 대체 무슨 무공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그래도 목숨은 아까운 법. 그들은 무너지는 전각 더미를 뚫고 앞으로 질주했다.
쿠르르르-
그들이 다른 전각으로 피신하는 순간 그 전각마저 균열이 번지더니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 인간이 아니다!”
청성사협은 절규하며 앞으로 달렸다. 발에 뭔가가 걸리고 그들은 바닥을 뒹굴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삶의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엉금엉금 기어 전진하다 보니 눈앞에 예쁜 노랑색 신발이 보였다. 모란꽃이 수놓인 포혜였다.
별생각 없이 그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드는 순간 청성사협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굳었다.
연노랑 궁장을 입은 우설금이 싸늘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청성사협은 다시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뭔가가 가슴을 후벼팠다. 홍철산에서 뿌려진 산강傘罡)의 파편이었다.
“크으윽!”
단 한 번 제대로 반격조차 못 하고 청성사협은 치명적인 죽음 앞에 직면했다. 그것도 네 사람 모두가.
청성사협은 여인의 아득한 무공에 절망했다.
“으으으.”
검우방 제자가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다. 불과 일 장도 채 달리기 전에 그 제자는 허리에서 피를 뿜으며 꼬꾸라졌다.
도망치려던 사람들의 안색에서 핏기가 가셨다.
진정 대 살인마인가? 강호에 이런 여자가 존재했던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오늘 처음으로 우설금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치는 자! 여기 남는 자! 모두 죽는다!”그 목소리는 청아하고 맑았으나 그 차가운 냉혹함을 지우지 못했다.
“으으으!”
당연히 그 말을 시험해보려는 자가 있다. 서너 명이 눈치를 보다가 검우방 정문으로 냅다 달렸다.
“끄아악!”
그들은 두 걸음을 걷기도 전에 등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졌다.
“물론 이곳에 있어도 모두 죽는다!”
그제야 사람들은 도망갈 재간이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곳에 있어도 죽고 도망쳐도 죽는다. 그럼 어떻게?
사색이 된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며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아, 악마구나!”
쓰러진 청성사협 한 명이 우설금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다른 청성사협도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너, 넌 왜 사람을 죽이지? 설마 그날 우리와 시비를 벌였다고 이런 참상을…….”
우설금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물론 우설금은 그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홍철산을 접어 가볍게 아래로 찍자 처절한 비명이 일었다.
“끄아악!”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청성사협 하나가 고개를 떨궜다. 남은 세 청년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뒷걸음치며 기는 순간 다시 홍철산의 끝부분이 그들을 찔렀다.
푹! 푹! 푹!
강호에서 위명을 날리던 청성사협이 어이없는 최후를 맞았다. 압도적인 무공 격차 앞에서는 청성사협도 강호 무명 소졸과 차이가 없었다.
공포에 질려 구경하던 사람들이 벌떡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는 순간.
붉은빛의 강기가 그들을 습격했다.
“으아악!”
어둠 속에서 우설금의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무도 검우방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검우방에서 머물던 청성파와 검우방 사람들 모두,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심지어 검우방의 전각마저 완전히 파괴됐다. 목불인견의 참상이었건만 목격자가 없기에 누가 이런 살상을 저질렀는지 아무도 몰랐다.
**
주석하는 늦게까지 잠을 잤다. 새벽까지 돌아다녔으니 당연했다.
그는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잠을 깼다. 맞은편에 합숙했던 일남일녀가 얼이 빠진 채 앉아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주석하는 주변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설금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나?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오늘이 흑검문 원정날인 점을 고려하면 신기한 현상이다.
“무슨 일 있어요?”
주석하는 하품하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숨만 연발하던 사운혜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가 생겼어요.”
“잠만 처자는 놈이 뭘 알겠어.”
양승이 적의를 지우지 않고 핀잔을 줬다.
영문을 모르는 듯 멀뚱거리는 주석하에게 사운혜가 상세히 설명했다.
“변고가 발생했어요. 어젯밤에 백호문이 습격당했데요.”
“백호문요? 거긴 하북팽가가 주둔해 있었잖아요?”
주석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랬는데…… 놀랍게도 어제 자객 두 사람이 나타나서 백호문을 휘저었데요. 백호문 사람들과 심지어 하북팽가 사람들마저 몰살당하고……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예요.”어젯밤에 그와 도수가 저지른 일이 퍼져나간 모양이다.
“대단한 자객이었나 보죠?”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른 데요.”
“그럼 오늘 흑검문을 치는 일은 어떻게 된데요?”
“하아,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같은 시각에 검우방 쪽도 끝장났데요. 그쪽은 목격자도 없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우 소저도 밤에 나갔던가?’
주석하는 잠이 든 우설금을 슬쩍 바라봤다. 이럴 때 그녀의 모습은 천사 그 자체다. 밤새 일어난 사건은 우설금이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사운혜의 안색은 창백했다. 하북팽가와 청성파는 절대 작지 않은 무력이다. 그런 문파 두 곳의 주력 부대가 박살이 났으니 일대 사건이라 할 만했다.
“그래서 난리가 났어요. 흑검문을 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난 듯 주석하가 화들짝 법석을 떨었다.
“허억! 그러면 참전 수당은 어떻게 되죠?”
“이 자식아! 너는 돈만 눈에 보이냐?”
다시 양승이 핀잔을 늘어놓았고 사운혜도 고개를 저었다.
“일당요? 이 판국에 일당이 나오겠어요? 지금 그 때문에 난리예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용병으로 뛰어든 대부분은 인근 객잔에 투숙했고 밥값과 숙박료를 외상으로 달아놓았을 것이다.
객잔 주인도 당연히 이 싸움의 승리를 예상했으니 하북팽가가 장담한 이상 수당을 못 받을 일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동안 외상이 쌓여도 별반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마지막에 문제가 생겼다.
흑검문 원정은 없어졌고 돈을 주겠다던 하북팽가도 사라졌다. 싸움이 없으니 수당도 없다. 당연히 대부분 용병은 지불 능력이 없어 객잔에 낼 돈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온갖 고함과 소란이 들려왔다. 외상 갚으라는 소리였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다더니…… 정말 그러네요.”
사운혜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주석하는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이곳에서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흑검문 가족의 마음고생이 심할 테니 얼른 가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