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58화 (158/273)

158화 재회 (1)

해가 중천에 다가가고 있었다.

흑검문 앞은 긴장에 휩싸였다.

백호문, 검우방, 하북팽가, 청성파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통보 때문이다. 당연히 흑검문에서는 이들을 상대할 전력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흑검문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재 흑검문에는 이전부터 흑검문 문도로 있던 자들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적혈방과 살검회에서 넘어온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도망친 자가 없었다.

그만큼 현 문주인 주격이 인간적으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정문 앞에서 문도들이 쭉 전열을 형성했다.

“소문주 주석하의 복수를 해야 한다!”

모두가 전의를 불태웠다.

그들의 앞에는 문주인 주격과 신옹을 비롯한 장로 몇몇이 착잡한 표정으로 먼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지어 무공을 모르는 주소은마저 어린 명아를 데리고 한쪽에 대기했다.

주격의 앞에는 흑검문을 구하려고 멀리서 달려온 남궁천과 남궁서란, 유비연, 백화령이 굳은 표정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기에 죽을 각오를 하고 어떻게든 이 위기를 헤쳐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특히 남궁천은 하북팽가, 청성파와 친목이 두텁기에 설득해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말로 안 되면 검을 들어야 한다. 최악의 순간이라도 주석하의 가족만은 지킬 것이다.

남궁서란은 생각이 복잡했다.

“……팽두석이 일을 벌일 줄이야.”

한때 팽두석은 그녀와 가장 가까웠던 남자였다. 팽두석은 그동안 그녀에게 지극정성을 다 했고 중원사룡이나 천상삼화는 팽두석과 그녀의 인연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가까웠다.

물론 아직 혼인을 약속하거나 둘만의 시간을 가진 적은 없다. 다만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남궁서란도 팽두석과 혼인하리란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그날 제갈세가에서 완전히 깨졌다.

주석하의 죽음을 놓고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지금도 그녀는 팽두석의 아집을 잊을 수 없다. 살존의 죽음 때문에 충격 받은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흑검문도 마찬가지 아닌가.

팽두석은 정파의 단합을 주장했고 남궁서란은 원칙과 상식을 고집했다.

‘내가 알던 팽두석이 아니었어.’

그 이전까지 남궁서란은 자신이 주석하의 편을 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제갈세가를 떠날 때는 그녀는 팽두석과 완전히 갈라섰다. 이제 둘 사이에는 남녀 간의 이성적인 친밀감은 사라졌다. 십여 년간의 정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남녀 간의 정은 정말 뜬구름이었던가.

그리고 남궁서란은 주석하를 떠올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주석하는 멋진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었지만. 그때는 소문파여서 그렇게 무시했고 자신과는 격이 다른 놈이라고 천대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모두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앞을 노려보면서 적군이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주석하를 떠올렸다. 이제는 죽고 없기에,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오늘은 소제의 복수전이다!”

남궁천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해가 중천에 떴고 약속한 시각이 오고 말았다.

멀리 산비탈 아래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일순간 모두 긴장했다. 아마도 적의 사자일 것이다.

“최후통첩이겠구나.”

그래도 정파랍시고 기습하지 않고 전쟁을 사전에 통보하는 것이겠지. 남궁천은 이제 정파의 위선에 신물이 났으나 무고한 살상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하북팽가와 청성파의 행동이 다행이라 여겼다.

“어쨌든 마지막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흑검문을 살려야 하니까. 남궁천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유비연과 백화령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산비탈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이 점차 가까워졌을 때 남궁천은 눈을 비볐다.

뭔가 헛것이 보인다.

하북팽가, 청성파, 백호문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팽두석이라 짐작한 모습에서 주석하가 엿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은…….

꽉!

남궁천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헛것을 본 게 아닌지 확인하려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비연 또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석하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요?”

“저 자식이 여기에서 왜 나와?”

“혹시 저승과 이승을 구분 못 해서…….”

“아니, 무슨 불길한 소리를…….”

백화령이 빽 소리를 지르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백변환영보와 화판답공이 동시에 펼쳐지며 꽃이 휘날리는 것처럼 그녀의 신형이 허공에 수를 놓았다.

순식간에 주석하 앞에 이른 백화령은 입을 쩍 벌렸다.

“……주, 주 공자?”

주석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백화령은 와락 주석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살아있었어요?”

“내가 왜 죽어요?”

“상춘원에서…….”

“물론 그때 물을 너무 마셔서 배가 터져 죽을 뻔하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했죠.”

“그런데 왜 지금까지 죽은 척을…….”

“그게…….”

“이, 나쁜 사람!”

백화령이 주석하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한바탕 주석하와 난리를 치던 그녀는 갑자기 싸늘한 기온을 느꼈다. 정오인데 해가 떨어졌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옆으로 시선을 돌린 백화령은 마찬가지로 흑의를 입은, 중구난방으로 생긴 한 녀석을 발견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행태를 보니 주석하의 친구인 것 같긴 한데…….

이 싸늘한 기운은 이쪽이 아니고……. 반대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연노랑의 화사한 궁장을 걸친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살기가 물씬 풍겨왔다. 이것은 단순한 적대감이 아니었다. 그녀를 찍어 누르는, 정말 죽이려는 기운이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힌 백화령은 여인의 놀라운 무공에 기겁해서 주석하에게서 떨어졌다.

다시 여인을 살핀 그녀는 재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니!’

강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여인을 손꼽아 천상삼화라 부른다. 다만 백화령은 천상삼화 가운데에서도 단 한 사람을 고르라면 그 사람은 분명히 자신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미모로 타인에게 밀려본 기억이 없었다. 유비연이나 남궁서란을 만난 이후에도 그 자부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비록 그녀의 무공과 배경이 이 두 여인보다 떨어졌으나 미모만큼은 압도한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그녀에 필적할,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우위에 있는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주석하의 옆에서? 대체 주석하와 무슨 사이지?

백화령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남궁천을 비롯하여 유비연과 남궁서란이 몰려왔다. 그들 또한 주석하를 확인하고 야단법석이었다.

“살아있었어?”

“염라대왕이 돌려보냈죠.”

“이쪽 분은?”

“여긴 도수라고…… 제 친구죠. 덕양 살검회 소속으로 있다가 지금은 흑검회 소속이고요.”

“아하!”

“그리고 이쪽은…….”

무심코 우설금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사람들은 그녀가 뿜어내는 살기에 한결 같이 몸이 굳었다.

특히 우설금은 백화령과 남궁서란, 유비연을 향해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유비연이 남장 여인임을 단숨에 알아봤다. 예전에 만진장으로 가던 길에 여러 번 봤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남궁천은 우설금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뿜어내는 살기에서 그녀의 무공이 평범함을 넘어 어쩌면 자신을 훨씬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누구지? 정파 인물? 사파 인물? 아니…… 현 강호에 이런 여인이 있었던가?’

우설금의 살기에 남궁천 등은 주춤거리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주석하와 거리가 벌어지자 우설금의 살기도 한결 줄어들었다.

주석하의 등장에 주격과 주소은, 명아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주석하는 명아를 얼싸안았고 주격에게 머리를 숙였다.

“소자, 다녀왔습니다.”

“에이, 고얀 놈!”

한바탕 환호성과 감격의 해후가 지나가고 남궁천이 산비탈 아래를 살피며 물었다.

“하북팽가 연합군은 왜 안 오지?”

주석하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안 온 데요.”

“왜?”

“어젯밤에 백호문과 검우방이 멸문 당했거든요.”

“어?”

난데없는 소식에 사람들이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흉수가 대체 누구래?”

“글쎄요. 소문만 무성해서…….”

“그게 뭔 말이야?”

“산 사람이 거의 없데요.”

하북팽가와 청성파가 주축이 된 연합군을 섬멸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단체가 누구일까? 남궁천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 급이라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는…….

남궁천은 의심의 눈으로 주석하를 노려봤다.

“설마 소제가?”

“에이, 그럴 리가요.”

“흐음, 그래?”

뭔가 어색한 주석하의 반응을 감지하면서 남궁천은 무심코 그 옆의 우설금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조금도 표정 변화 없이 백화령 등을 노려보고 있는 우설금을 보는 순간 남궁천은 다시 숨이 턱 막혔다.

‘설마 이 여자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때문에 남궁천은 다시 움찔했다.

**

흑검문 대청에서 주석하가 가족과 감동적인 상봉을 하는 사이 연무장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설금을 둘러싸고 백화령, 유비연, 남궁서란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우설금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자세로 본인 특유의 싸늘한 기운을 풍길 뿐이었지만 다른 세 여인은 이것을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당연히 혼자였으면 우설금이 무서워서 근처도 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셋이나 되니 용기를 내어 우설금에게 따지고 들었다.

“이름이 뭐예요?”

백화령이 대표로 나서서 물었다.

“우설금.”

“출신은요?”

“…….”

이후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 무시하는 거예요?”

“…….”

“나이는?”

“…….”

“언제부터 주 공자랑 같이 다녔어요?”

“…….”

“하! 답답해! 진짜 이러기예요?”

화를 벌컥 내던 백화령은 우설금의 살기에 바로 입을 다물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백화령은 다른 두 사람과 눈빛을 교환한 후 다시 따졌다.

“우리 세 사람은 천상삼화라 불러요. 천! 상! 삼! 화!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만하면 신분 확실하죠? 그런데 당신은 누구예요? 누군데 주 공자 옆에 붙어 있어요?”우설금이 무심한 눈빛으로 세 여인을 쓱 훑었다. 호랑이는 옆에서 강아지가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배가 부르다면.

지금 우설금이 딱 그런 상태였다.

어쨌든 흑검문의 위험을 해결하고 주석하에게 도움이 되어서 기뻤다. 흑검문으로 가자는 말에 별생각 없이 따라왔었는데…….

문 앞에서부터 주석하를 둘러싼 세 여인 때문에 기분이 완전히 상했다. 게다가 한 여자는…… 무려 주석하에게 안기기까지 했다. 그냥 죽여버리려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자중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주석하 옆을 맴도는 장면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녀들이 주석하와 함께 있는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예전과 마음이 달라졌다. 우설금은 자신의 이런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강아지 세 마리가 자꾸 호랑이 코털을 건드린다.

우설금의 싸늘한 눈빛에 백화령은 바로 찌그러져서 뒤로 물러났다.

한참 살피던 유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 않아요?”

무심한 우설금의 눈빛이 이제 유비연으로 옮겨갔다.

“그때는 조금 다른 옷을 입었던 것 같은데…….”

유비연은 예전의 기억을 마구 헤집었다. 분명히 그녀를 본 기억이 있다. 어디에서였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