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재회 (2)
유비연도 주석하와 함께 다닌 시간이 만만찮게 많다.
그동안 연노랑 궁장여인을 본 적이 없었는데……. 다른 옷을 입은 여인이라면…….
유비연은 비마표국에서 용병 일을 하면서 만진장으로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호북으로 같이 움직였던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녀의 뇌리에 한 장면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한 객잔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었다. 그곳을 신창패존과 귀군이 습격했었고 주석하가 그들과 싸웠다.
그날 관련 없는 일반인은 모두 도망쳤지만 유독 신경 쓰지 않았던 세 사람이 있었다. 붉은 옷과 휜 옷과 검은 옷을 입었던. 그때는 평범한 무림인이라 생각하며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의 침착함이 과도했다.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꽤 예뻤었던 것 같은데…….’
유비연의 시선이 다시 우설금에게 꽂혔다.
“당신! 예전에는 붉은 옷을 입지 않았었나요?”
우설금의 그린듯한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확신한 유비연이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알았어! 당신! 그때 비마표국을 열심히 따라왔던! 그때 그 주막에서 태연하게 밥을 먹더라니!”
당연히 우설금이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무려 만리안석 때문에 귀군, 패존과 싸웠던 날이니까. 정작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유비연을 노려봤다.
“그때 당신은 두 녀석과 함께 있었는데…… 그때부터 주 공자를 따라다녔구나? 표행 동안 계속 당신과 마주치기에 이상하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패존이 찾던 그 물건을 당신도 노리고 있었어!”유비연의 추리는 놀라웠다. 붉은 옷을 입은 우설금을 기억해내고 그녀가 수상쩍다고 생각하자 예전에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 봇물 터지듯 떠올랐다.
“그리고…… 아! 화산에서도 본 것 같은데? 명아를 데리고 화산에 갔을 때…….”
유비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우설금과 비슷한 동선을 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는 왜 주석하 주변을 맴돌고 있지? 둘이 무슨 사이일까? 주석하를 노리고 있나?
그녀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폭죽처럼 터졌다.
그때 가적성이 죽었을 때 화산 부근에 있었다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얼핏 느끼기에 우설금은 대단한 고수다. 그런 고수가 당시 그 주변에 있었으니 어쩌면 가적성을 죽인 범인이 혼천교가 아니라 이 여자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유비연은 검을 들었다.
“당신! 정체를 밝혀!”
갑자기 검이 목으로 들어오자 우설금도 당황했다.
“화산에 침입해서 일검신성을 죽이지 않았어?”
유비연이 정곡을 찔렀다.
가적성 이야기가 나오자 남궁서란 또한 눈을 번쩍 떴다. 한때 그녀는 가적성을 도와 사천에서 화산까지 호위했었다. 그 가적성을 이 여자가 죽였다면 이 여자는 정파가 아닌 사파 인물이며 그것도 흉악한 심성을 가진 여자다.
지금 살기를 뿌리는 저 태도만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남궁서란 역시 분노한 표정으로 검을 들이대자 백화령도 가세했다.
순식간에 세 여인이 우설금을 포위했다. 날카로운 검이 우설금의 목을 겨냥했다.
유비연과 남궁서란은 승리를 자신했다. 이미 검이 목에 겨눠진 상황에서 저 여인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저 여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주석하를 요물에게서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천상삼화는 기세등등하게 대치했다.
마침 감격스러운 해후를 마치고 대청을 나오던 주소은이 멀리서 이 모습을 봤다.
“어? 왜 이래? 뭔가 이상한데?”
그녀는 세 사람이 우설금을 둘러싸고 검을 겨눈 장면을 목격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석하 옆에 갑자기 여자들이 바글거려서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저쪽에서 뭔가 작당하고 있었다. 거기에 하필이면 그녀가 눈여겨보는 유연이 끼어있었다. 여자들 틈에 남자인 유연이 왜 끼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녀로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다급하게 주소은이 연무장 쪽으로 달려가는 순간.
푸아악-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음과 함께 우설금을 둘러쌌던 세 사람이 추풍낙엽처럼 밀려 사방으로 날아갔다.
강력한 기운에 손쓸 틈도 없이 수 장을 날아가서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세 사람은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천상삼화의 무공은 절대 낮지 않다. 특히 화산파에서 자하검존에게 수련을 받은 유비연과 남궁세가의 진전을 이은 남궁서란의 무공은 중원사룡과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완벽한 패배를 당했다. 그것도 세 사람이 한꺼번에.
그녀들은 우설금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설금은 무심한 표정으로 세 여인을 쓱 훑어본 다음 관심 없다는 듯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주소은이 세 사람에게 다급하게 달려갔다.
“왜 그래요? 땅바닥에 주저앉아 뭐해요?”
물론 그녀는 유비연을 제일 먼저 챙겼다.
**
백화령은 작전을 바꿨다.
최근 며칠간 흑검문에서 머물면서 주석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묘한 분위기를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는 우설금 한 사람을 두고 천상삼화 세 사람이 경계하는 모양새였으나 실상은 천상삼화 세 사람 간에도 묘한 경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여인들에 비해 백화령 그녀는 인연이 미미했다. 먼저 주석하를 알게 된 기간이 가장 짧았다. 그녀가 주석하를 만난 것은 제갈세가에서 단 며칠에 불과하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엄청 길다. 남궁서란은 전대부터 양 가문이 알던 사이였고 유비연은 이미 주석하와 강호를 종횡했고 우설금은…… 무려 북해까지 둘이서만 여행을 다녔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백화령이 아니지.’
사실 그녀도 왜 이 경쟁에 뛰어들어 이러고 있는지 잘 몰랐다. 굳이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분명히 천상삼화라는 자존심 때문인 것 같긴 한데…….
어쨌든 그녀는 기회를 엿봤다.
주석하의 처소에 모여 한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주석하를 비롯하여 주소은에 남궁천과 천상삼화까지. 당연히 우설금마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해빙궁에서 빙군의 무공을 얻었습니다.”
주석하가 그동안의 행적을 설명했다. 모두가 궁금하다고 물었기에 주석하도 어쩔 수 없이 일부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소제는 지금까지 몇 사람의 무공을 익힌 거야?”
남궁천의 질문에 주석하는 손가락을 꼽았다. 그가 털어놓은 무공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무공만 제대로 익혀도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무공들이 주석하 한 사람에게 집약되고 있다니.
이는 무림 역사상 없던 일이었다.
다소 심각해진 남궁천과 달리 천상삼화는 입만 벌리며 주석하를 다시 평가했다.
그 틈을 백화령은 놓치지 않았다.
“주 공자, 악군 사부님의 무공을 익혔잖아요?”
“그, 그렇죠.”
심상찮은 표정의 백화령을 보고 주석하는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그럼 우린 사형제 사이잖아요?”
“그, 그게…….”
“그때 분명히…….”
“아, 비무요?”
“네.”
“그건 청산에서 사부님과…….”
“그러니까요.”
백화령이 야릇한 미소를 띠고 주석하에게 눈짓했다.
구석에 홀로 앉아 있던 우설금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 모습을 힐끔 본 백화령이 의기양양해져서 더욱 진한 미소를 띠었다.
“지금 여기에서 합을 맞춰봐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주석하를 내버려 두고 백화령이 주소은에게 요구했다.
“주 소저, 여기 거문고 있어요?”
“당연히 있어요. 가져다드릴까요?”
주소은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후다닥 가지러 갔다.
주석하는 무슨 의도인지 금방 눈치 챘다. 악군은 거문고나 퉁소로 음공을 펼쳤다. 백화령이 거문고를 요구한 것은 악군의 음공을 겨뤄보자는 뜻이다. 아직 백화령은 내공이 얕아서 주석하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만…….
다른 무공에 비해 음공은 특이하다. 두 사람이 연주하면서 서로 무공을 겨룰 수도 있고 서로 화합해서 합공을 펼칠 수도 있다.
지금 백화령의 요구는 명백하게 비무가 아니라 서로의 조화를 확인해보자는 뜻이다.
주석하도 그녀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에게는 사문의 사형제가 없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백화령이다. 그녀와 무공 호흡을 맞추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다. 마치 없던 사저나 사매가 생긴 꼴이니까.
거문고가 백화령 앞에 놓이고 주석하도 흑검소를 입에 댔다.
벡화령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확인하며 만족했다. 대부분 호기심과 부러움이 가득한 눈이다. 우설금마저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쭐한 마음속에 백화령은 가볍게 거문고를 튕겨봤다. 이제 저들의 시선은 곧 부러움으로 바뀔 것이다.
“주 공자? 천무태평악 알죠? 그거 같이 연주해봐요.”
조용한 거문고 음이 깔렸다. 그 위로 퉁소 소리가 호응했다. 두 악기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구슬픈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띠디디딩-
삘리리리-
처음에는 평범한 연주 같았다. 거문고와 퉁소의 어울림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겼다. 그들이 음악에 빠져들 때쯤 악기 소리가 점점 변화를 일으켰다.
음공音功)이다.
음파를 타고 날카로운 강기가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주소은에게는 평범한 합주처럼 들렸지만 무공을 익힌 사람들에게는 이 연주 곳곳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기파의 파괴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여파는 무공이 강할수록 강렬했다.
연주가 고조되면서 거문고 소리를 퉁소 소리가 교묘하게 떠받쳤다. 거문고 소리는 더욱 강력한 음파를 타고 주변 사물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강기의 파편이 빛처럼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만일 이 기운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면 설사 정파십존 급이라 할지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주석하는 정신없이 천무태평악에 빠져들었다.
처음에 백화령은 주석하와 합주하는 다정한 모습을 다른 여인들 앞에서 자랑하려 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자신은 주석하와 이렇게 가깝다고, 이렇게 조화롭게 어울린다고 과시하려 했다.
그런데 천무태평악이 고조되면서 그녀는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그녀와 주석하가 함께 연주하는 천무태평악은 그녀에게 음공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고 있었다.
자신이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에, 주석하가 연주하는 퉁소 소리에 빠져들면서 그녀의 음공은 한 단계 발전하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을 의식했던 그녀는 지금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천무태평악에 몰입했다. 마치 지금은 그녀의 무공 수준이 정파십존 급으로 바뀐 듯했다.
파- 파- 파- 파-
거대한 무형의 음파가 주석하의 처소에서 밖으로 발산했다. 그 강기의 파편은 멀리 흑검문 주변의 숲을 강타했다.
서걱- 푸가각-
숲을 이룬 나무가 마치 날카로운 검에 베인 듯 잘려나가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순식간에 흑검문 뒷산 숲이 초토화됐다.
그 위력을 주소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위력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음파의 힘이었고 지금 전각 외부, 숲에서 발생한 사건을 꿈에도 몰랐다.
우설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천무태평악에는 상춘원에서 위험에 빠졌을 때 그녀와 주석하가 힘을 합친 추억이 담겨 있었다. 또 북해에서 함께 무공을 시험하며 연마했던 즐거운 기억도 남아 있었다. 그 곡을 지금 주석하와 백화령이 함께 연주하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우설금은 알 수 없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백화령을 향해 미묘한 질투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홍철산은 거문고가 아니었다. 완패다.
기가 막히게 호흡이 일치하는 연주에 백화령은 무척 만족했다.
합주가 끝났다.
“과연 악군의 무공은 대단하구나!”
남궁천을 비롯하여 모두가 칭찬을 연발했고 백화령은 더욱 우쭐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주격이었다.
“석하야, 큰일 났다! 불이 난 후 간신히 가꾼 숲을 누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 땔감이 필요했는지 나무를 죄다 베 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