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0화 (160/273)

160화 재회 (3)

덕양 중심가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바로 주석하 일행이다.

흑검문 사태가 원만하게 마무리되자 주석하는 죽었다는 소문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사태에서 흑검문이 관련된 별별 소문이 떠돌았기에 흑검문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모습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주석하가 친구들을 이끌고 백화루에 온 것도 이런 목적에서였다. 물론 이제 떠나야 하는 친구를 위해 마지막 만찬을 열어줄 목적도 있었다.

“여기가 백화루인가요?”

백화령이 꽤 큰 규모의 주루를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이런 표정인지 몰랐던 사람들은 금방 짐작했다. 이름 일부가 같았던 이유다. 덕분에 백화령은 이 주루에서 매우 친밀한 기분을 느꼈다.

남궁천이나 유비연 등은 예전에 이곳에 와 보았었고 우설금도 이곳에서 주석하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제가 왕창 대접하겠습니다. 여기야말로 제 본거지거든요.”

주석하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백화루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가장 번화한 주루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은 잠재워질 것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에서 그가 흑검서생임이 밝혀졌기에 그는 흑검문의 소문주이자 강호를 경동시키는 초강고수로 거듭나게 됐다. 이 모두가 하북팽가에서 흑검문을 칠 명분을 마련하고자 그의 행적을 떠벌린 탓이다. 덕분에 그는 무려 정파십존을 죽인 특출한 고수로 회자됐다.

“흐음, 그래요? 오늘 마음껏 마시고 뻗어도 괜찮은 거죠?”

백화령이 미소를 지으며 주석하에게 눈웃음을 쳤다.

과연 천상삼화답게 그런 그녀의 모습은 상대의 혼을 빼놓았다.

유비연과 남궁서란은 살짝 안면을 찡그렸고 우설금은 갑자기 살기를 뿜어냈다. 그녀들은 천무태평악 합주 이후 백화령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얼른 들어가요.”

백화령이 보란 듯 주석하의 팔짱을 끼고 먼저 들어가 버리자 유비연과 남궁서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설금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들고 있는 홍철산을 바닥에 쿵쿵 찍었다.

마치 진각을 밟은 것처럼 백화루 입구 땅바닥이 쩌저적 갈라졌다.

이만큼 많은 인원이, 그것도 귀빈이면 별채로 가야 한다. 그 대신에 주석하는 이 층 주루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주석하가 나타나자 백화루 총관이 후다닥 튀어왔다.

“오, 오셨습니까?”

격한 반응에 주석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총관이 웃으며 자리를 배치했다. 대충 이런 반응이 이해가 되긴 한다. 그동안 하북팽가에서 흑검문 복수를 주도하면서 공포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특히 출정식 때 흑검문 문도 몇 사람을 죽인 사건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백화루도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흑검문의 보호를 받는 곳이었으니까. 자칫 하북팽가에서 칼날을 백화루로 돌리면 이곳 역시 쑥대밭이 될 가능성이 컸다.

산해진미가 차려지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백화령과 주석하의 묘한 분위기에 괜히 짜증이 난 유비연이 말을 꺼냈다.

“주 공자 목표가 이곳 백화루 주인이라면서요?”

예전부터 주석하가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기에 가까운 사람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하, 그렇지요. 제가 이곳에서 놀고먹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놈팽이라고 욕을 먹었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주석하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흐응, 백화루 주인이라…….”

백화령은 오히려 감탄했다. 백화루 여주인 백화령! 어째 발음이 입에 착착 감기는 듯하지 않은가.

“나쁘지 않네요.”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유비연이 콧방귀를 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천중화께선 백화루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무슨 뜻인데요?”

“그거…… 이 주루에 백 명의 기녀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갑자기 백화령의 안면이 확 구겨졌다. 주루에 기녀가 없을 수는 없지만 무려 백 명이라니! 여인을 백 명씩이나 거느리겠다는 주석하가 천하의 색마로 보였다. 그녀는 주석하를 향해 술을 퍼부을 뻔했다.

백화령이 술잔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매력적인 여인이 다가왔다.

“어머, 공자님!”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주석하에게 눈웃음을 치는 여인은 바로 명월이었다. 주석하가 이곳에 올 때마다 자주 동석했던 여인이다. 예전에 염군과 빙군에게 곤욕을 치렀던 여인이기도 하고.

명월이 등장하자 주석하의 안색 또한 확 변했다. 그렇다고 박대할 수도 없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자, 잘 지냈어?”

“물론이지요. 공자님께서 오실 때만 기다렸지요. 이분들은…….”

“하하! 친구들이야 친구들!”

“오오, 아름다운 분들이 많으시네요.”

여인들이 모두 주석하를 색마를 보는 듯 이상한 눈으로 노려봤다.

은근한 미소를 띠며 여인들을 쭉 훑어보던 명월이 탁자 모퉁이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우설금과 눈이 마주쳤다.

“흐악!”

우설금의 매서운 살기에 기겁한 명월이 후다닥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어? 명월이 왜 저래?”

영문을 모른 주석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술병을 들었다. 그러잖아도 명월 때문에 곤란했었는데 알아서 물러나 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자, 마십시다. 마셔요! 내일이면 떠나셔야 하는데…….”

우설금을 포함하여 모두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원섭섭한 마음에 술잔을 기울였다.

주석하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그는 강호의 무명 소졸이었다. 그런 그가, 아니 그의 사문이 위험에 처하자 천 리가 멀다 않고 찾아와 준 사람들이 고마웠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호에 위명을 날리는 유명인사들이 아닌가. 이런 사람들을 친우로 삼았으니 이번 생은 실패작이 아니었다.

특히 그들은 정파의 핵심이다. 그와 대립 중인 정파에서 이만큼 호응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주석하의 눈에 환하게 웃는 주소은이 보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누이였기에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가 양옆에 두 남자를 끼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으니 속이 시원해졌다.

물론 주소은의 오른쪽에는 남궁천이, 왼쪽에는 유비연이다.

‘그래, 이 오빠가 반드시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짝을 지워주마.’

주소은이 두 사람에게 연정을 품고 있음을 눈치챘기에 주석하는 매파역을 수행하기로 결심을 다졌다.

반면 주소은은 주석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여인들을 주시하며 아미를 살짝 모으고 있었다. 백화령과 남궁서란에다 우설금까지. 마치 세 여인이 경쟁적으로 주석하를 감싸자 그녀는 심각해졌다.

‘모두 예쁘기는 하지만 너무 사나워. 저런 여인과 혼인하면 오빠가 제명에 살지 못할 거야. 절대 안 돼. 특히 저 연노랑 옷 여자는…….’

연신 주석하와 다른 여인을 머릿속에서 연결해보며 주소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각각 다른 묘한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는 흥겹게 계속됐다.

그들은 강호 정세를 안줏거리로 올려 대화를 나눴다. 때로는 손님이 찾아와 주석하에게 인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남궁서란과 백화령의 정체를 알고는 연신 눈을 떼지 못하기도 했다.

모두가 얼큰하게 술에 취했을 무렵 점소이가 양피지가 든 죽통을 들고 왔다.

“창천일룡 남궁천 소협 계십니까?”

남궁천이 손을 흔들자 죽통이 배달됐다. 강호에서는 이처럼 표국을 거쳐 인편을 통해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급한 일이 터졌나 보죠?”

모두의 관심 속에서 남궁천이 죽통을 개방했다. 안에서 양피지 조각이 나왔다.

서신을 읽은 남궁천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부친에게서 온 것입니다.”

남궁천이 남궁서란에게 양피지를 넘겼고 서신을 다 읽은 남궁서란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에 펼쳤다.

- 무림맹 연합군 귀조궁 완파. 풍우방 멸문. 다음 대상은 살귀촌.

- 자하검존 운남행. 그 대상은 독군.

몇 자 되지 않은 소식이었으나 그 의미는 절대 작지 않았다.

“남궁후 가주께서 어디에 계시죠?”

얼떨떨해진 주석하의 질문에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선 하북팽가를 막고자 하남 무림맹으로 가셨어. 아마 그곳에서 접한 소식을 급히 보내신 것 같아.”

“무림맹이 사파를 치기로 했나 보네요. 귀조궁이라면 쉽게 다룰 수 있는 흑도 문파가 아닌데……. 흑련의 반발을 불러올 거예요. 풍우방을 멸문했다는 것은 귀조궁에서 멀지 않아서이겠지만 흑련의 손발을 제거하겠다는 의도도 분명히 있어요.”무림 정세에 밝은 유비연이 상세하게 설명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석하는 정사대전이 발발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대대적으로 세몰이를 하며 양쪽을 주도했으나 이번에는 그들 상당수가 죽어 힘이 약해진 바람에 그때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무림맹 연합군의 세력이 약해져 국지전 형식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과거 대비 정사대전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아직은 흑련에 비해 무림맹의 힘이 더 강력하니 제갈휘가 택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무림맹 연합군이 몰려다니면서 사파의 주요 문파를 치기 시작하면 뇌군도 꽤 골치 아플 터였다.

주석하는 이 정사대전의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이 전쟁이 불러올 파장을 고민했다. 전생처럼 오래지 않아 마교가 끼어들 것이다.

마교는 언제, 어떤 방식을 취할까.

그는 슬그머니 우설금을 살폈다. 그녀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우설금과 눈이 마주쳤다. 우설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런 그녀의 표정은 꽤 귀엽다. 무자비한 살인마라고 하기엔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다.

주석하는 참을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예요?”

심각하던 유비연이 그에게 눈총을 줬다.

급히 상황을 수습하면서 주석하는 양피지를 가리켰다.

“아래 내용은 뭐죠?”

자하검존의 일이니 유비연의 몫이다.

“하아, 아무래도 사부님께서 독군과 결전을 벌이시려나 봐요.”

“혼자라면…… 승부를 장담하기 쉽지 않잖아요?”

유비연의 도끼눈이 곧바로 돌아왔다.

“자하검존께서 독군 대비 불리하다는 말인가요?”

“아, 그게 아니고요. 제갈세가 때를 생각해보면 연합하지 않을까 싶어서…….”

제갈세가의 일을 이 자리에서 꺼내는 것은 부담이었다. 자칫 정파의 부조리를 들추게 될 수 있으니까.

유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명아와 함께 화산을 떠나기 직전에 만났던 사부의 모습은…….

“현재 정파십존 가운데 마땅히 결전에 참여할 분이 안 계셔서일 거예요. 무림맹주나 불존께서 이런 다툼에 나설 수는 없으니까요. 사부가 아니면 맡을 분이 없죠. 대신에 무림맹의 지원은 있겠죠. 운남에 점창파가 있으니…….” 대략적인 상황이 정리됐다.

정파십존의 상황도 좋지 않지만 흑도팔군도 마찬가지다. 독군은 정파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것이다. 특히 사천당문이 사라진 지금이라면.

“독군이라…….”

주석하는 현재 단전에 품은 기운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하나가 독군의 내력임을 안다. 독군은 그가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다. 자하검존이 독군을 해치기 전에 그가 먼저 만나야 한다.

결정은 빨랐다. 운남으로 가기로.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늦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 소협께서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유 소협이란 말에 백화령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유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사부님께서 고생하시니 저도 가봐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유비연이 주소은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주 소저, 명아 좀 부탁해요.”

주소은은 유비연과 인연이 이어진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수락했다.

“다른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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