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1화 (161/273)

161화 재회 (4)

주석하는 남궁천과 남궁서란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저희도 세가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부친께서 이런 서신을 보내신 것은 얼른 돌아오라는 뜻이거든요. 정사대전이 일어났으니 어떤 식으로든 도와야죠.”남궁천은 대답하면서 주석하의 눈치를 살폈다. 정파와 사파를 나누는 것 같아 미안했다. 정사대전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애매한 위치가 바로 흑검문이고 주석하였다.

백화령도 아쉽지만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무공 수련에 전념하겠다나.

주석하가 짐작하건대 그녀는 비무를 신경 쓰는 듯했다. 자신의 무공이 주석하에게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더 열심히 수련에 매진할 모양이다.

우설금이야 어차피 말이 없는 사람이라 아무도 묻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백화령을 비롯하여 모든 여인이 그녀의 거취에 관심을 가졌다.

주석하는 우설금이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맡은 임무가 끝났기에 그녀는 마교로 돌아가야 한다.

“저도 갈 겁니다.”

주석하의 돌발적인 발언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동안 외부로 떠돌았고 흑검문이 안정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집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떠나겠다니.

“어디로 갈 건데?”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운남요.”

유비연은 감정이 복잡해졌다. 주석하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고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다. 주석하는 자하검존과 사이가 좋지 않다. 만진장에서 그러했고 제갈세가에서도 그랬다고 들었다.

그가 운남에 가겠다는 말은 자하검존을 돕겠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독군을 도울까? 그 경우 사부를 도와야 하는 자신과 적이 된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녀는 차마 묻지 못하고 안면만 굳혔다.

남궁천 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설마 독군을 도울 생각이야?”

“독군을 돕는다기보단 만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독공을 익히려고요?”

주석하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무공을 익히는 것으로 보였기에 백화령이 목적을 물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한데…….”

“주 공자는 이미 독에 웬만큼 내성이 있지 않았어요?”

예전에 독을 치료했던 일을 기억한 남궁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죠.”

당문처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독공에 보통 손을 대지 않는다. 독공은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희생해가면서 익히는 무공이다. 정파의 생리에도 어긋난다.

독공을 익히겠다는 주석하의 선언에 대부분 반대를 표명했다. 물론 그들은 주석하가 독군을 만나더라도 독군이 무공을 전수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두 사람이 함께 운남으로 떠나겠네요.”

백화령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남궁천이 조언했다.

“소제, 독군을 만나는 것은 좋지만 조심하기 바라.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그래야죠.”

물론 주석하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백번 양보해도 그가 자하검존과 같은 노선을 탈 일은 없을 것이다.

**

술에 취해 얼핏 잠이 들었던 주석하는 새벽에 눈을 떴다.

창으로 부드러운 달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제법 싸늘해진 바람이 불었다.

그는 저녁에 있었던 백화루에서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헤어지기 전날이라 모두가 술에 취했다. 넓은 중원에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심정이 격해지기도 했고.

흑검문의 위기를 듣고 목숨을 걸고 모였던 사람들이기에 그 감정이 남달랐다. 그는 모두에게 감사에 감사를 더했다.

그 와중에 단 한 사람만이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었다.

조용히 침상에서 일어나 기감을 펼치던 주석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어제 마시려고 가져왔던 술병이 보였다. 독한 죽엽청이다.

술병과 적당한 사발 하나를 들고 그는 처소 밖으로 나왔다.

“흐음.”

주석하는 머리 위를 쳐다봤다.

그의 처소 지붕 용마루에 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연노랑 궁장을 입고 은은한 달빛 속에서 그 자태를 선명하게 드러낸 우설금이었다.

지금 저 모습만 본다면 그녀는 천상의 선녀였다. 아마도 그 누구도 그녀보다 지금 이 분위기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주석하는 발을 도약하여 지붕 위로 올라갔다.

우설금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만월이었다.

“뭐 해요?”

그녀의 옆에 앉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잠시 그에게 돌렸던 시선을 다시 달로 향하면서 우설금이 조용히 대답했다.

“달 봐요.”

그건 그도 아는데……. 달을 왜 보는 걸까. 이 밤에.

“달에서 뭘 봐요? 토끼라도 있어요?”

“아뇨. 달을 보면 얼굴이 보여요.”

“누군데요?”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묻기도 어색해서 주석하는 조용히 옆에 앉아 달을 쳐다봤다. 달을 보고 있자니 그도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붉은 머리띠를 질끈 묶은 아름다운 얼굴, 지금 옆에 있는데 달에서도 보였다.

그녀는 누구의 얼굴이 보이는 걸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려는 찰나 우설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달을 보면 항상 보였어요.”

‘나는 아니구나.’

주석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항상 외로울 때면 달을 봤죠. 달 속의 그 얼굴이 달빛을 타고 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복수를 결심했어요. 무공에 몰두할 때면 몸은 괴로워도 마음이 편안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요.”그제야 주석하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우설금의 부모일 것이다.

“물론 난 실제로는 기억 못 해요.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얼굴이 보여요. 십만대산에서 보든 중원에서 보든 항상 같은 모습이.”

예전에 그녀는 중원 무림을 향해 복수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부모님이 마교의 전사라고 했었나? 정파와 사파를 향해,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을 향해 복수하겠다고……. 문득 그들의 진전을 이은 그도 복수의 대상이 되는지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대신에…….

“술 마실래요? 오늘 술을 거의 안 드시던데…….”

우설금의 시선에 희미한 미소가 담겼다. 그녀가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발을 그녀에게 넘기고 술병을 열었다. 시큼한 죽엽청 냄새가 술맛을 자극했다.

“흔하고 독한 술이지만……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잖아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우설금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제갈세가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북해빙궁까지 먼 여정을 그렇게 즐겁게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하북팽가와 청성파를 깨고 흑검문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그녀가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그의 옆을 지켜준 덕분이었다. 생각할수록 그녀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술병에서 술이 흘러나와 사발을 채웠다.

우설금이 사발에 담긴 술을 바라보다 쭉 들이켰다.

“컥!”

격하게 기침을 헤대며 인상을 팍 썼다.

“설마…… 술 마신 적 없어요?”

“누가 처음이래요? 나 술꾼인데…….”

급히 고개를 저으며 반박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바로 진실이 보였다.

뜻밖이었다. 그 나이에 술을 처음 마신다니. 어쩐지 오늘 술잔을 받고 거의 마시지 않더라니. 생각해보니 함께 다니는 동안에도 우설금은 식사 반주로도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처음 마시는 술치고 죽엽청은 너무 독한가?

안면을 찡그리며 몸을 떠는 그녀를 보니 귀엽기 짝이 없었다.

“나도 한 잔 줄래요?”

머뭇거리던 우설금이 사발을 넘기고 술병을 받았다.

우설금이 조심스럽게 술을 따라주었다. 술병을 든 가느다란 손가락이 무척 곱다.

“크-”

주석하는 단숨에 술을 마시고 마치 술꾼인 것처럼 소리를 냈다.

“오늘 많이 마셨잖아요?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어째 잔소리도 귀엽게 들렸다.

“자, 한잔 더 하시죠?”

주석하는 술병을 뺏어 우설금에게 따라주었다.

우설금이 사양하지 않고 술을 받았다. 다시 한 잔을 들이켠 우설금이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중원에 나오기 쉽지 않겠죠?”

그의 질문에 우설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앞으로 만나기 힘들 것이란 예상 때문이다.

“우 소저, 하나 부탁할까요?”

“네.”

“얼마 후면 마교는 대대적으로 중원에 들어올 거예요. 그렇겠죠?”

우설금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도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원에 오면 부모님 복수를 할 계획이죠?”

대답은 없었지만 확실하다. 예전에도 오늘도 그녀는 원수를 이야기했으니까.

“복수하지 말라고는 않겠지만…… 최소한으로 끝내요. 무고한 살상은 가능한 줄여 줘요.”

그동안 우설금과 다니면서 그녀의 무자비한 살수에 무척 많이 놀랐다. 최근에만 태성문 혈겁, 북해빙궁 대사형 혈겁, 거기에 청성파 혈겁……. 그 모두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 대살겁이었다.

그녀가 중원 무림의 반대편인 마교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손에 피를 묻히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심성을 조금은 부드럽게 바꾸고 싶었다.

우설금의 대답은 없었다.

한참 달을 바라보던 우설금이 천천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주 공자, 정말 백화루를 인수하려는 이유가 기녀 백 명 때문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예상치 못한 황당한 질문에 주석하는 숨이 콱 막혔다.

“……저도 하나 부탁할까요?”

“네, 우 소저 부탁이라면…….”

“나…… 잊지 말아요.”

그녀의 부탁도 예상 밖이었다.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그녀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것이라면…… 앞으로 보기 힘들 거라는 암시가 들어있달까. 마교와 중원의 싸움이 시작되면 두 사람은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 피해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 두 사람은 절대 더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에 빠져있을지도.

가슴이 콱 막혀 다시 술을 마시고는 우설금에게 술잔을 넘겼다.

주거니 받거니 마시다 보니 예상보다 꽤 많이 술잔이 오갔다. 술이 처음인데 괜찮으려나?

어느새 우설금의 머리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우설금의 시선은 달로 돌아갔다.

주석하의 시선 또한 달로 돌아갔다. 달 속에서 우설금이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자주 달을 쳐다볼 것 같다.

**

사천성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운남성이다.

운남은 고지대이면서 무더운 동네다. 삼림이 울창하고 각종 야생 동식물의 천국이기도 했다.

흑도팔군의 일인인 독군이 운남에 거주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독충이나 독초를 포함한 각종 독극물을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접어든 날씨임에도 운남은 비교적 포근했다.

자하검존은 운남에서 가장 큰 거대 문파인 점창파를 찾았다. 점창파 또한 화산파와 같은 계열인 도가 문파였기에 손쉽게 의견일치를 봤다.

자하검존은 점창파 장문인인 낙월우사落月羽士)와 차를 마시며 회담의 결론을 지었다.

“도움을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저희 점창파는 이번 작전에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검존께서 친히 오셨는데…… 무림맹주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앞장섰을 겁니다.”

“정파 모두가 점창파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겁니다. 점창파와 함께라면 독군을 어렵지 않게 도모할 수 있겠지요.”

자하검존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으나 내심 불만족스러웠다. 도움을 준다면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가 간을 보는구나.’

최근 정파의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으니 간을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기분이 별로였다.

어쨌든 상관없지 않나. 독군의 무위는 확실하게 예상한다. 그가 단독으로 싸우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다만 독이 껄끄럽기는 하지만…….

그때 낙월우사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독공 대비책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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