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2화 (162/273)

162화 운남 운중산 (1)

“당연히 있지요. 사천당문의 지원을 받을 겁니다.”

“사천당문은 멸문했다고…….”

“물론 그렇습니다만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던 분들이 있지요.”

사천당문의 장로 두 사람이 당시 무림맹에 머무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만독쌍선으로 알려진 이들은 의선, 독선으로 불렸다. 의선은 독을 치료하는 쪽으로, 독선은 독을 하독하는 쪽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독군을 상대하기 가장 좋은 조합이다.

“당문이 빙군과 염군에 의해 멸문되었다지요?”

“하하, 그렇지요. 그만큼 만독쌍선 두 분은 흑도에 원한이 깊습니다. 그래서 이 원정에 두말없이 참여하셨지요.”

자하검존에 당문의 만독쌍선까지. 독군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조합이다.

지금까지 말을 돌리던 낙월우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독군은 운남 운중산에 머문다고 알려졌지요. 그곳과 가장 가까운 구대문파가 바로 우리 점창파입니다. 저희가 주력을 보내겠습니다.”

“허허, 주력이라면?”

“제가 친히 원정을 가도록 하지요. 점창팔웅과 일대 제자 이십여 명을 데리고 말입니다.”

점창파도 이처럼 손쉬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럴 때일수록 제대로 무림맹을 돕는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 장문인에 점창파 최고 고수집단이라는 점창팔웅點蒼八雄), 거기에다 가장 노련한 일대 제자 다수이니 사실상 점창파 전력 전부라 할 수 있었다.

‘점창파가 명리에 욕심을 부리는군.’

만독쌍선이 참전한다는 소식에 태도를 바꾼 낙월우사가 괘씸했으나 어차피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자하검존은 개의치 않았다.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이미 하남과 호북 등에서는 사파 토벌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천에도 하북팽가와 청성파가 원정을 갔지요. 우리도 바로 떠나야 합니다.”

무림 정세에 어두웠던 낙월우사는 이 소식에 더욱 확신을 얻었다. 지금이야말로 점창파의 위상을 높일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지요.”

낙월우사의 확답에 자하검존은 느긋하게 차를 비웠다.

오늘따라 차 맛이 별로인 것은 점창파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마땅치 않아서일 것이다.

**

구름에 덮인 높은 산을 보면서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기를 올라가야 한다고?”

멀고 먼 북해도 다녀왔는데 그에 비하면 비교적 가까운 곳이건만 한숨부터 나온다. 험난한 산을 타려니 보기만 해도 다리가 아프다. 그가 인상을 팍팍 쓰고 있자니 유비연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산 안 타봤어요?”

“산이야 많이 타봤죠. 우리 집 뒷산도…….”

숲이 와장창 불타고 깎여 민둥산이 되어버린, 흑검문 뒤의 나지막한 야산을 떠올린 유비연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녀에 비하면 주석하는 산을 거의 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기암괴석이 널려 있는 화산을 동네 마실 다니듯 올랐으니 눈앞의 운중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렇게 높아 보여도 별것 아니거든요.”

대충 주석하를 달래며 유비연은 울창한 산세를 살폈다.

“저기에 독군이 숨어 있다고 했죠?”

“숨어 있다고는 안 했는데요?”

“어쨌든! 이래저래 찾기 쉽지 않을 듯한데…….”

두 사람의 말다툼을 도수가 묘한 눈길로 관찰했다.

백화루를 다녀온 다음 날, 사람들을 배웅하고 주석하와 유비연, 도수만이 운남으로 넘어왔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주석하와 유비연은 신경이 날카로운 듯 말다툼을 벌였다.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못 본 틈에 두 사람 사이가 이상한 쪽으로 발전한 듯했다.

“아아, 또 난리네. 내가 싸우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도수가 버럭 소리 지르자 두 사람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도수 또한 산세를 훑으며 물었다.

“지금 우리가 독군을 찾아야 하는 거야? 아니면 자하검존을 찾아야 하는 거야?”

“독군!”

“자하검존!”

주석하와 유비연의 말이 또 엉켰다. 도수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알았다. 둘 다 찾지 뭐.”

도수가 먼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석하는 앞으로의 상황이 염려됐다. 반드시 독군을 구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쨌든 독군이 죽기 전에 만나야 한다. 그러려면 자하검존이 독군을 발견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찾아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하검존과 한판 붙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종종 그는 유비연의 의견을 떠보았다. 당연히 유비연은 사부인 자하검존의 편이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닥쳐올 그녀와의 대립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로 인한 계획 수정은 절대 불가하니.

운중산이라는 이름답게 과연 구름 천지였다. 높은 봉우리는 구름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그들도 구름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안개와 구름에 싸여 앞뒤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으으, 쉽지 않겠어.”

주석하의 반응과 달리 도수는 콧노래를 불렀다.

“이런 환경이 암습에 제격이지.”

과연 자객다운 말이었다.

울창한 고목 아래에 도착했을 때 도수가 바닥을 열심히 살폈다.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이 꽤 많아.”

과연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점창파가 연합했네요.”

유비연이 바로 상황을 파악했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도수가 앞장섰다.

“내가 먼저 주변을 훑어보고 올 테니까 두 사람은 여기에서 쉬고 있어.”

“안개 속인데 다시 찾아올 수 있어?”

“물론이지. 날 뭐로 보고.”

예전에 둘이서 다닐 때 도수가 길을 잃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가끔 목표물을 엉뚱하게 잡아서 문제지.

주석하의 염려를 뿌리치고 도수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주석하는 가슴을 펴고 안개를 휙휙 저어보며 날씨를 가늠했다.

“비 오면 골치 아픈데.”

하릴없이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주변을 살피던 주석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를 만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제가 사부 명을 어기고 사천으로 온 거라…… 처분을 기다려야 해요. 독군과 맞서 싸울 준비는 되어 있고요. 인원이 많이 필요한 지형이니 적극적으로 도와야죠.”독군을 잡으러 앞장선다는 말에 주석하가 안면을 찌푸렸다.

그의 반응을 의식한 듯 유비연이 설명을 덧붙였다.

“독군은…… 나쁜 살인마예요. 왕년에 독으로 여러 문파를 전멸시켰었죠.”

“최근엔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과거의 잘못이 씻기지는 않죠.”

유비연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하지만 그가 흑도여서 그럴까. 독군이 그리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파 인사 중에도 혈겁을 일으킨 살인마는 많다. 다만 그 인사들은 영웅으로 대접받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안개 속이라 보이는 것이 없다. 산을 오를 때 구름이 자욱했으니 어쩌면 비가 올지도…….

“독군을 구하려는 거죠? 왜 하필이면 독군 같은 사람을 구해요?”

유비연의 날 선 질문이 이어졌다.

주석하는 대답하기 곤란했다. 사실을 밝힐 수는 없고 그렇다고 독군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서도 아니다. 그렇기에 유비연에게는 주석하가 단순히 사부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대답이 없자 다시 유비연이 다그쳤다.

“난 당신이 그래도 협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 일은 절대 아니거든요? 당신…… 독군에게 빚진 거 있어요?”

“아뇨, 없어요. 만난 적도 없는데 빚은 무슨. 내가 독군에게 빚진 게 있다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주석하가 손을 들고 맹세하는 순간이었다.

우르르쾅!

갑자기 사위가 번쩍하면서 벼락이 떨어졌다.

쏴아아아-

그뿐이 아니다. 폭우가 쏟아지며 운무가 피어올랐다. 그들이 앉은 나무 아래에도 비가 떨어져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허억! 이게 아닌데…….”

그가 독군에게 내공을 받았음을 하늘이 아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공교로운 순간에…….

신경질이 난 주석하는 하늘을 째려보며 투덜댔다.

우르르쾅!

이번에는 더 요란하게 하늘이 번쩍거렸다.

“으악!”

피할 자리가 없다. 주석하는 급히 유비연 아래에 쪼그리고 앉았다.

유비연이 황당한 눈빛으로 주석하를 째려봤다.

“역시 뭔가가 있군요?”

“있긴 뭐가…….”

반박하려다 주석하는 말을 닫았다.

우르르쾅!

“젠장!”

아무래도 하늘이 유비연의 편을 드는 것 같다.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자니 우설금의 홍철산이 그리워졌다. 그녀와 함께 다닐 때면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몸을 맞대고 홍철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재미도 쏠쏠했었는데…….

“잘 있으려나…….”

“누구 생각하는데요? 설마 독군?”

유비연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주석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뇨. 며, 명아요.”

“명아야 주 소저가 잘 돌보고 있을 거예요.”

뭔가 수상쩍다는 듯 주석하를 노려보던 유비연의 시선이 운무 가득한 산골짜기를 향했다. 끝없는 수림 사이로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확실히 이곳의 울창한 산림은 타지방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유비연은 문득 자신의 몰골을 살핀 후 몸을 웅크렸다. 옷이 물에 젖어 자칫 남장했다는 사실이 발각될 가능성이 있었다. 최대한 몸의 굴곡을 숨기려고 쪼그려 앉은 채 두 팔과 다리로 전면을 가렸다.

잠시 후 도수가 비에 쫄딱 맞은 채로 돌아왔다.

“앞에 천라지망이 깔려 있어.”

앞쪽을 탐색한 도수는 점창파와 화산파 인원이 산봉우리를 포위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들은 독군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포위망을 구축했다.

심각한 주석하와 달리 유비연은 오히려 기운을 냈다.

“화산에서도 왔어요?”

“몇 명 왔어요. 누군지는 모르겠고…….”

도수도 일전에 화산파를 방문했었기에 화산파 사람을 잘 구분했다.

자하검존만 왔으리라고 예상했던 유비연에게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제가 가서 상황을 파악할게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도 전에 유비연이 벌떡 일어나 황급히 빗속으로 사라졌다. 남장을 들키지 않으려는 궁여지책이었으나 주석하나 도수가 이를 알 리 없었다.

“사문 사람들이 왔다니 엄청 좋은가 보네.”

도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못 말린다는 듯 손을 저었다.

주석하는 유비연 걱정을 일단 머릿속에서 지웠다. 독군 문제만은 그녀와 한배를 타기 어렵다. 자하검존보다 독군을 먼저 만나려면 저 포위망을 뚫고 봉우리 높이 올라가야 한다. 확실하게 독군이 저곳에 있다면.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겠어?”

“당연하지! 내가 그런 일 한두 번 해봤겠냐? 뚫어주랴?”

주석하는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수! 가자!”

“유 소협은?”

“알아서 하겠지.”

두 사람은 비가 쏟아지는 울창한 산림 속으로 사라졌다. 운중산의 높은 봉우리가 머리 위에서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화산파의 고진은 풀숲에 숨어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운무가 자욱한 산속에서 비를 맞으며 은신하는 일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며칠 고생을 거듭하다 보니 차라리 신나게 적과 싸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유비연과 둘이서 강호를 유람하던 때가 생각났다. 풍운채에서 명아를 구한 일까지.

“사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유비연이 자하검존의 명을 어기고 명아와 함께 흑검문으로 떠난 사건은 충격이었다. 유비연은 자하검존이 누구보다도 아끼던 제자였기에. 유비연이 최근에 정파에 회의를 품은 사실을 짐작하고 있으나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이곳에서 비를 맞다 보니 유비연 생각이 간절했다. 아마도 사저가 그때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곳에서 같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고진의 신분은 화산매화검수華山梅花劍秀). 모두 십이 명으로 이루어진 화산파 최정예다. 그는 최근에 매화검수가 된 막내로 자하검존을 호위하여 이곳까지 따라왔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화산파 내에서도 당당한 입지를 가지게 되어 자랑스러웠다.

“사저가 무사해야 할 텐데…….”

“뭐야? 내가 안 무사하면?”

갑작스럽게 들려온 대답에 고진은 고개를 확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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