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3화 (163/273)

163화 운남 운중산 (2)

“허억!”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눈앞에 있자 고진은 우당탕 엉덩방아를 찧었다.

“뭘 그렇게 놀래?”

유비연이 손을 탁탁 털며 빙그레 웃었다. 비록 비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녀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사저! 여, 여기엔 어떻게?”

“내가 못 올 곳 왔어?”

“그, 그게 아니라 잘 오셨어요.”

유비연은 천라지망에 투입된 화산매화검수 중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고진이 있어 안심했다. 적어도 고진이라면 그녀를 이해해줄 테니까.

“사부님은?”

“점창파 분들이랑 함께 있어요.”

“인사드려도 될까?”

“그, 그게…….”

고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유비연이 화산파에서 명을 어기고 사라진 후 자하검존은 유비연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불편한 심사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특별한 엄명도 없었으니 사부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유비연은 그의 어정쩡한 태도에서 분위기를 금세 눈치챘다.

“여기엔 매화검수만 따라왔지?”

“네, 모두 열두 명요.”

“점창파 쪽은?”

“점창팔웅이랑…… 일대 제자 서른 명 정도가 왔어요.”

생각 이상으로 대규모였다. 그만큼 독군을 처리하겠다는 자하검존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증거였다. 주석하를 떠올리자 한숨이 절로 나온 유비연은 고진에게 손으로 인사하고는 자하검존이 머무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포위망 바로 아래의 작은 정자에서 자하검존과 점창파 장문인 낙월우사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유비연은 정자 아래에서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 비연입니다.”

자하검존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낙월우사를 마주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여전히 인사를 받지 않았다. 유비연은 내심 한숨을 쉬며 조용히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쏟아지는 비가 안면을 때리자 설움이 뭉클 올라왔다.

대략 뒤로 열 걸음 걸었을까.

“사천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질책도 응원도 아닌 무심한 어조였다. 유비연은 사부가 반응해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면 사부의 심기가 불편해질 텐데. 하지만 거짓을 보고할 수는 없었다.

“……사천에서는 하북팽가와 청성파가 몰살당했습니다.”

“뭐라고?”

자하검존의 경악한 목소리가 울렸다.

낙월우사마저 심각한 표정으로 유비연에게 시선을 모았다.

“흑검문 토벌 전날 밤에 하북팽가와 청성파가 기습을 받았습니다.”

“누구였지? 흑검문이었나? 아니지, 흑검문은 그럴 능력이 없을 텐데…….”

“밝혀진 바는 없고 아무도 흉수를 모릅니다.”

“끙!”

자하검존이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결과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으니 당연히 골치 아파졌다. 하남과 호북의 흑도 토벌에서는 승전 소식을 들었건만 정작 가장 만만했던 사천에서는 정반대 결과가 나왔다.

“넌 여기에 어쩐 일이냐?”

“전 남궁세가를 통해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운남으로 가셨다고요.”

“남궁세가가 흑검문을 지원했나?”

“그곳에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싸우진 않았습니다.”

“그놈들이 기습했나 보군.”

유비연은 아니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부와 부딪혀봐야 지금 당장에는 좋을 일이 없다.

“다른 말씀 없으시면 물러가겠습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자하검존의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어왔다.

“혹시 주석하가 살아 있느냐?”

놀란 유비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반응에 자하검존의 불편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정말 살아있었군…….”

“그, 그게…….”

“혹시 그 녀석도 이곳에 왔느냐?”

“……네, 오긴 왔는데…….”

“크흠, 알았다. 가 보거라.”

자하검존은 대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유비연은 자하검존의 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다만 자하검존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은 확실했다.

‘사부님이 주 공자를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

유비연은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쏟아지는 비가 안면을 때렸다. 주석하에게 다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화산매화검수와 함께 있어야 할지 그녀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

무성한 수풀에 몸을 숨기고 주석하는 도수와 전면을 살폈다.

그들은 운중산 봉우리 곳곳에서 은신 중인 사람을 발견했다. 도수가 아니었다면 주석하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해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도수 덕분에 그들은 들키지 않고 포위망의 안쪽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독군이 포위망 내부에 있다면 빠져나가긴 어렵겠어.”

주석하는 넓은 지역을 적은 인원수로 촘촘하게 포위망을 형성한 화산파와 점창파의 능력에 감탄했다. 저들은 지금 토끼몰이를 하듯이 점차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은 완벽하게 포위망을 좁혀 독군을 몰아붙일 것이다.

독군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면 자하검존과 낙월우사에 화산매화검수와 점창팔웅을 상대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할 거야?”

전방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도수가 결단을 촉구했다.

“어떻게든 독군을 우리가 먼저 만나야 해.”

“좋아! 그렇다면 뚫어야겠네.”

도수가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따라가려는 순간 주석하의 단전에서 독군의 기운이 용트림했다.

“잠깐.”

주석하는 도수의 팔을 붙잡았다. 내부의 기운을 간신히 잠재우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앞에 독이 깔려 있어.”

지금 화산과 점창 연합군이 빨리 포위망을 좁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도 독군이 풀어놓은 독을 곳곳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독을 중화하면서 또 피하면서 전진하다 보니 진행이 느릴 수밖에 없다.

“독? 미치겠군.”

도수가 이를 갈았다. 잠입에 특화된 도수도 독만은 어쩔 수 없었다.

“뒤로 따라와라.”

주석하가 앞장섰다. 그는 독이 뿌려진 지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일 혼자였다면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갔겠지만 면역성이 없는 도수를 배려할 수밖에 없다.

봉우리 진입로 곳곳이 독에 오염되어 있고 일부는 중화된 상태였다. 길이 막혀 주석하도 꽤 애를 먹었다.

“저 자식들도 해독 전문가가 따라왔나 본데?”

부분 해독된 상황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빗속에서 움직이려니 어려움이 한결 가중됐다.

도수가 다시 안면을 찡그렸다.

“당문 사람인가?”

도수도 소문으로 주석하와 당문의 관계를 들었다. 당문은 빙군과 염군에 의해 멸문했지만 주석하 또한 관여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산비탈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다 보니 절벽 아래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절벽 십여 장 위, 암석 사이에 숨겨진 동굴을 노리고 있었다.

그 동굴을 가리키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저기란 말이지?”

“접근이 어렵습니다. 독을 아예 곳곳에 퍼부어놓았더라고요.”

“해독해야겠어.”

“하지만 절벽이라…….”

청의를 입은 젊은이와 흰옷을 입은 신선풍의 두 노인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주석하는 청의를 입은 자가 화산파 사람임을 알아챘다. 저 두 노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동굴까지 중화해야 합니다. 만독쌍선께 부탁드립니다.”

청의 청년이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요청했고 흰옷 노인 두 사람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받아들였다.

“만독쌍선이라고 들어봤어?”

“당문 출신으로 무림맹에서 개 노릇 하던 놈들이 있어.”

도수가 들은 적 있는 인물이었다. 그나마 도수의 강호 경험이 빛을 발했다.

당연히 주석하는 처음 듣는 인물이었다. 관심도 없다. 다만 멸문당한 당문의 생존자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그들이 보고 있는 사이에 만독쌍선이 품에서 흰 가루를 꺼내 곳곳에 살포하기 시작했다. 독군이 독을 뿌려 침입을 막은 지역을 중화하는 행동이다.

주석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만독쌍선이 해독을 끝내면 바로 공격대가 동굴로 투입될 것이다. 좁고 막힌 동굴의 특성 때문에 독군이 무사히 빠져나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어떻게든 저들보다 빨리 동굴로 진입해야 한다. 그런데 동굴 입구에서 저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덤불에 숨어 지켜보고 있자니 이윽고 만독쌍선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쪽 길 보이지? 일단 급하게 다닐 통로만 만들었다.”

“예, 충분합니다. 이제 침투해도 되죠? 노선배님께서도 같이 가셔야죠?”

“흐음, 그럴까?”

주석하의 긴장된 얼굴을 힐끔 본 도수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똥줄 타냐?”

“내가 왜?”

“저들이 동굴로 들어가면 독군이 위험하잖아?”

“그렇긴 한데…….”

“일단 저지르고 보자고!”

지금 기회를 놓치면 천추의 한이 될지도 모른다.

주석하가 결심하기도 전에 도수가 번개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얼떨결에 주석하도 뒤따라갔다.

대책 없는 놈! 때로는 이처럼 무대포로 저질러 실마리를 만들기도 한다지만.

“어? 누구냐!”

화산파와 점창파로 보이는 몇 명의 청년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수가 검을 날리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당연히 마다할 주석하가 아니었다. 그 또한 몰려드는 적을 향해 흑검소를 휘둘렀다.

챙-

주석하와 도수의 강한 공격에 청년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검을 부딪친 자들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그나마 두 사람이 살의를 품지 않고 검을 휘두른 덕분에 부상자는 없었다.

주석하가 돌파를 노리는 사이 독선이 싸움에 개입했다. 하얀 가루가 도수를 향해 날아왔다.

순간 주석하는 도수의 앞을 막으며 허공에 뿌려진 독을 호신강기로 튕겨냈다.

“흐, 흑검서생이다!”

그와 안면이 있었던 어떤 화산파 제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갑자기 독선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당문의 원수! 저놈을 죽여라!”

비록 주석하가 당문에 직접 손을 쓰진 않았지만 당문과는 원수지간이 확실하다. 주석하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는 도수를 눈짓으로 물러나게 한 뒤 독선을 향해 일갈했다.

“내가 할 소리! 네놈들은 독암쌍로와 닮았구나!”

“독암쌍로? 독암쌍로도 네놈이 죽였다니!”

분노로 길길이 날뛰면서 독선과 의선이 주석하를 포위했다.

순식간에 독선과 의선을 양쪽에서 맞이하게 된 주석하는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다면 빨리 죽이는 게 답이다. 더구나 이 둘을 살려두면 독군이 위험해지니 그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주석하가 아니었다.

독선과 의선이 양쪽에서 그를 공격해왔다. 둘의 손에서 흰 독연이 피어올랐다.

“과연 네놈이 얼마나 버티는지 보겠다!”

순식간에 독연이 주석하를 감쌌다.

주석하는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거머쥐었다. 독이 감지되자 그의 단전에서 독군의 내력이 잠을 깼다. 그 내력은 혈맥을 따라 일주천하며 빠른 속도로 몸에 침투한 독을 흡수했다.

“흐흐, 감이 오느냐? 이 독은 십보단장산十步斷腸酸)이란 절독이다! 열 걸음을 채 걷기 전에 쓰러질 만큼 독성이 강력하지. 이제 네놈도 열을 센 후면…….”의기양양했던 독선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잠시 일그러졌던 주석하의 안면이 평온해졌다.

“어?”

“네, 네놈! 도, 독인이냐? 어떻게 된 거지? 씨펄, 독이 상했나?”

독선이 급히 재차 손을 저었다. 다시 하얀 독연이 주위로 확 퍼졌다.

이번에는 그 양이 제법 많았기에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마저 뒤로 물러나야 했다. 도수 또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푸스스스-

독연에 노출된 피부가 잠시 따끔거리더니 다시 평범한 연기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주석하는 손을 휙휙 저으며 빈정거렸다.

“이게 독이냐? 아니면 연기냐?”

“이 썩을 놈이!”분노를 참지 못한 독선과 의선이 주석하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강호에 악명을 날렸던 무향만독장無香萬毒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