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4화 (164/273)

164화 운남 운중산 (3)

쾅!

의선의 일장이 고목을 찍었다.

푸스스스-

고목에 찍힌 손자국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하면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극독이었다. 나무이건 바위이건 가리지 않고 무향만독장에 닿는 순간 독기에 형체가 사라졌다.

그 장면을 본 주석하도 모골이 송연했다. 비록 그에게 독군의 내력이 있다지만 저 장력을 보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거린다. 그렇다고 시험해보기엔…….

“흐흐, 당문을 적대시했으니 죽음뿐이다.”

앞에서는 의선이 뒤에서는 독선이 공격했다.

이름은 의선이면서 저렇게 독을 잘 쓰다니! 역시 독과 의醫)는 종이 한 장 차이인가.

휘익-

쾅!

주석하가 기대고 있던 바위에 시커먼 장인이 찍혔다. 그는 화판답공을 이용하여 허공에 몸을 띄운 채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의 절정 무공에 주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으나 정작 독선과 의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눈이 뒤집혀 오로지 공격 일변도였다.

“네놈이 만독지체가 아닌 이상 절대 무향만독장에서 무사할 수 없다!”

“허공만 때리는 장력에 누가 죽는다고!”

“이 자식이!”

빈정거리는 주석하를 향해 만독쌍선은 연신 장력을 날렸으나 단 한 번도 적중시키지 못했다.

주석하는 자신이 지금 독인의 경지인지 아닌지 몰랐다. 독군의 내력을 품었으니 독의 내성이 독군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을 터였다. 다만 그 경지가 만독쌍선에 비해 어떨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가 만독쌍선과 접전을 벌이는 사이 정파인들이 모여들었다. 화산파와 점창파의 정예다. 이 상황에서 자하검선이 등장하면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주석하는 절벽 위의 동굴을 쳐다봤다. 일단 독군부터 먼저 만나야 하나.

지금 상황에서 적을 따돌리고 몰래 독군과 조우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아예 번듯하게 독군과 만나 힘을 합치는 것이 차라리 유리하다. 독군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으나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뜻도 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선 만독쌍선만 처리하고…….

무향만독장이 스치자 독군의 내력이 다시 끓어올랐다. 주석하는 무시하고 혼군의 내력을 운기했다. 그의 손에서 혼천십팔지가 펼쳐졌다.

무향만독장이 절정의 장법이긴 하지만 독을 겁내지 않는 주석하에겐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당연히 주석하를 보통 무림인이라 여기고 장법을 펼치는 의선과 독선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재간이 없었다.

“네놈들 독이 얼마나 허접한지 알려주겠다!”

무향만독장이 가슴과 등으로 치고 들어왔으나 주석하는 무시했다. 팔을 내주고 목을 치는 계책을 쓴다. 물론 그는 팔을 내줄 생각조차 없긴 했다.

상대를 압도해서 목숨을 끊는다!

콰앙-

가슴과 등에 무향만독장이 찍혔다. 그 순간 주석하의 혼천십팔지가 상대의 장력을 뚫고 적의 가슴을 찍었다.

푸푹!

주석하의 가슴과 등에 찍힌 장인 주위로 지독한 독이 의복을 태웠다.

푸시시시-

반면 혼천십팔지는 상대의 치명적인 요혈을 노렸다. 의선과 독선의 가슴에 시커먼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렸다.

“크윽!”

양쪽 모두 안면을 일그러트리며 신형을 휘청거렸다. 모두가 양패구상이라 판단했다. 아니 중독된 주석하가 압도적으로 손해 봤다고 여겼다.

독이 침습하는 순간 주석하의 단전에서 맹렬한 기운이 일어났다. 정통으로 그것도 양쪽으로 가격당했기에 버티기 쉽지 않다. 하지만 독군이 누구인가. 독군의 내력은 과연 대단했다. 한차례 혈맥을 일주하는 순간 독으로 인한 고통이 한결 줄어들었다.

반면 독선과 의선의 상황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에 뚫린 구멍을 두 손으로 막으며 주저앉았다. 분수처럼 용솟음치는 피가 손을 적시고 죽음의 그림자가 오갔다.

“흐흐, 내 비록 죽더라도 네놈만은 지옥으로 끌고 간다. 당문의 원한을 이제야 갚는구나! 네놈의 명은 이것으로 끝…….”

순간 주석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옥은 너 혼자 가라!”

푸스스스-

주석하는 몸 외부로 호신강기를 뿜어내며 하얀 연기를 밀어냈다.

만독쌍선은 그 연기가 방금 공격했던 무향만독임을 알 수 있었다. 중독된 녀석이 그 독을 체외로 배출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만독쌍선이 눈을 부릅떴다. 독공의 최고 정점인 만독지체의 경지가 아니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피를 쏟으며 만독쌍선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을 죽이려 했건만 소용없었다. 아직 상대는 멀쩡했고 그들은 죽음 일보 직전에 있었다.

마지막 사력을 다해 독선은 주석하를 항해 손을 휘저었다. 그의 마지막 비기인 무형지독이 살포됐다. 그 사이 의선은 재빨리 가슴을 지혈했다.

주석하는 무형지독을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의 목을 베고자 흑검소를 드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주 공자!”저쪽에서 유비연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주석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유비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짐작했다. 다만 지금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엔…….

“안 돼요!”

장내에 뛰어든 유비연이 만독쌍선의 앞을 막아섰다.

만독쌍선은 이번 작전의 핵심 인물이다. 다급하게 고개를 젓는 유비연을 보니 차마 손이 나가지 않는다.

그녀가 흑검문을 구하고자 먼 곳까지 와주었던 의협심을 높이 평가한다. 정파인이지만 그녀는 흑검문의 적이 아니고 주석하의 적도 아니다.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있다. 명아도 맡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는 만독쌍선이 아니다.

주석하는 인정사정없이 흑검소를 휘둘렀다.

서걱-

검강이 뻗어 나가 독선의 목에 금을 그었다. 의선의 가슴에도 길게 자상을 남기는 순간 유비연의 검이 검로를 방해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유비연이 그를 쳐다봤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주석하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쓱 둘러본 후 도수에게 눈짓했다.

주석하와 도수는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십여 장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정파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유비연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꼭 이렇게 죽였어야 할까. 정파와 사파의 차이는 좁힐 수 없는가.

“의선을 살려야 해요!”

독선은 목이 잘려 확실하게 명이 끊어졌다. 하지만 의선은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다만 살더라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게 주석하가 그녀에게 보여준 일말의 자비였을까. 물론 주석하는 그대로 두어도 의선의 명이 길지 않다고 확신했기에 물러섰을 뿐이다.

다급하게 외친 후 유비연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신형이 제비처럼 절벽을 타고 올라 동굴에 착지했다.

“사저! 위험해요!”

이 사태를 지켜보던 고진이 소리쳤다.

유비연은 듣지 못한 것처럼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

동굴은 깊었다.

입구는 천장이 낮고 폭도 좁았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넉넉해졌다. 밝음은 금방 사라지고 어둠이 지배했다.

도수가 재빨리 화섭자에 불을 붙였다. 여러모로 준비가 철저한 녀석이다.

주석하는 동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으면서 안심했다. 이곳에 독이 풀려 있다면 도수가 함께 들어갈 수 없다. 다행히 동굴 내부에는 독이 없었다.

“독군이 여기에 없나?”

목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동굴 깊이가 꽤 되는 듯했다. 불빛이 비치는 지점 너머로 짙은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유 소협이 화가 많이 났을 걸?”

도수가 머뭇거리면서 말을 걸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죽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유비연의 눈치 때문에 만독쌍선을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로 인해 대세를 망칠 수는 없다.

“당문은…….”

“나 때문에 멸문한 것이 맞아.”

주석하는 도수에게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역시 그랬군요!”

뒤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주석하와 도수는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접근하고 있었다.

“유 소협?”

놀란 도수가 시선을 모으며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일장 앞까지 접근한 유비연은 더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주석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석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굳이 따라오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대답 없이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난 후에야 유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은 살인마였어. 하북팽가와 청성파가 출전 전날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당신이 한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잔인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한 짓이지?”그가 한 짓이었을까. 절반은 그이고 절반은 우설금이다. 그렇다고 우설금이 한 짓이라는 어쭙잖은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도수가 후딱 끼어들었다.

“그거 내가 한 일이야!”

유비연의 싸늘한 눈빛이 도수에게 향했다.

주석하는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내가 한 일 맞습니다. 그래서요?”

“역시! 동시에 두 곳에서 사건이 터졌기에 당신이 홀로 저지르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조력자까지 있었어! 사부는 당신이 장차 살인마로 성장하리라 장담했고 난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었는데…… 사부 말이 맞았어.”유비연이 피를 토하듯 절규를 쏟아냈다.

주석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흑검문도가 모두 죽어야 했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만일 그가 하북팽가와 청성파를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반대로 흑검문이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만일 화산파가 그렇게 침략당한다면 그녀는 가만히 있을까.

지금 그녀가 그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단지 그가 정파 인물을 죽였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사파를 그렇게 죽였어도 화를 냈을까.

할 말이 많았으나 괜한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그와 유비연 사이에는 정파와 사파라는 넘을 수 없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만박지존과 사부가 그대를 없애야 한다고 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말렸었는데…… 어떻게 당신이……. 도대체 지금까지 몇이나 죽인 거야? 내 기억만으로도…….”절규하던 유비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를 살인마로 보는 게 확실했다.

“내가 죽지 않아 아쉬운가 보네.”

주석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녀가 그의 편을 들어주었음을 안다. 그렇다고 그녀 때문에 이 행보를 멈출 생각은 없다. 이번 생에서는 인생의 결정권을 본인이 가져야 한다고 결심했으니까.

사실 그는 살인마가 될 생각은 없다. 그의 꿈은 백화루주 아닌가. 세상사에 신경 쓰지 않고 백화루에서 나오는 돈을 받으며 가끔 백화루에서 술 한잔하는 게 꿈이다. 왜 그녀가 그를 살인마로 착각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답이 없자 유비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많이 죽였나 보군요.”

“그래! 상상 이상!”

주석하는 몸을 돌려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를 보던 도수가 화섭자를 들고 그의 옆에 붙었고 유비연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유비연이 왜 따라오는지 그도 알지 못했으나 오든 말든 그녀의 자유이니 내버려 두었다.

하나로 쭉 이어지던 동굴이 어느 순간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동시에 주석하는 피부가 따끔거리면서 단전의 내력이 꿈틀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잠깐! 독이 있어.”

주석하는 도수를 옆에 오게 한 후 여러 갈래 길을 살폈다. 어둠 속으로 깊이 뻗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딱히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독이 느껴지는 방향이 중요하다. 그쪽 동굴 내부 어딘가에 독군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니까.

주석하는 눈을 감고 몸속에서 꿈틀대는 독군의 내력을 음미했다. 그는 손을 들어 동굴 각 방향의 느낌을 점검했다.

독군은 어디에 있을까.

한쪽에서 강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북해빙궁에서, 악군에게서, 혼군에게서 느꼈던 그런 기분이다. 독군의 기운을 가진 자가 저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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