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7화 (167/273)

167화 독군 (3)

꽈꽝!

자하검존의 검강이 어둠에서 뿜어진 예리한 기운에 부딪히며 목표물을 놓쳤다. 검강은 독군을 스쳐 동굴 바닥을 직격했고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수만 갈래로 쪼개져 뒤엉킨 동굴 바닥이 무너지면서 아래쪽 동굴과 연결됐다.

그 순간 중심을 잃은 독군 또한 아래로 푹 꺼졌다. 독군이 동혈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다급하게 공격을 가하려던 자하검존의 검이 멈칫했다. 목표물을 잃었다.

자하검존은 자신의 공격을 방해한 자를 향해 분노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주석하가 흑검소를 손에 쥔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나를 방해하다니!”

자하검존이 검을 움켜쥐고 주석하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정작 주석하는 여유로웠다. 그는 독군보다 오히려 자하검존이 상대하기 편했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주석하는 상대를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방해한 사람은 당신 아닌가? 내가 독군과 먼저 싸우고 있었는데 말이지.”

“이놈이 뚫린 주둥이라고!”

자하검존이 노기를 일으키며 다짜고짜 주석하를 공격해왔다.

검강이 불을 뿜었다. 주석하는 가볍게 흑검소로 대응했다.

콰앙!

요란한 충격파와 달리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하검존은 갑작스럽게 공격하느라 힘을 온전히 싣지 못했고 주석하 또한 방어에 치중한 탓이다.

흑검소를 빙글 돌리며 주석하가 비웃음을 쏟아냈다.

“크크, 그동안 무척 거슬렸는데 말이지, 제갈세가에서도 음모를 꾸민 게 바로 당신과 만박지존이지? 오늘 그 빚을 갚아주마!” 주석하의 입에서 제갈세가 사건이 튀어나오는 순간 자하검존은 당황했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핍박하는 인물이 처음이었다. 주석하는 지금 이곳에서 처음 대면한 게 아니라 그간 수차례 은원이 쌓였다.

지금까지 독군에게 신경 쓰느라 미처 의식하지 못하다가 주석하가 태세를 정비하자 자하검존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날 상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석하는 살아남았고 무려 십존 셋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이곳에서 홀로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자하검존은 주석하에게 패배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옳다는 생각 또한 갖고 있었다.

검을 겨눈 채 천천히 옆으로 이동하면서 자하검존은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동굴 내부의 작은 광장에서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번쩍!

자하검존의 검강이 공간을 절단했다.

주석하는 혼군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빛처럼 앞으로 질주했다.

검에는 검이다!

암천살검!

암군의 절정 무공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상대의 허를 찔러 순식간에 기습하는 암군의 무공이 자하검존의 검강을 뚫고 들어갔다.

콰앙!

자하검존은 호쾌하게 압박하는 주석하의 검법에 경악했다. 녀석은 볼 때마다 새로운 무공을 선보였다. 게다가 놈의 내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한 번의 공방이 독군과의 전투에서 전력을 다했던 자하검존의 내력을 뒤흔들었다.

강한 충격파를 타고 자하검존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유비연을 슬쩍 본 후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주석하! 네놈은 살아서 동굴을 떠날 수 없다! 과연 천라지망을 뚫을 수 있을까?”

주석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하검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빠르다!”

지금 바로 자하검존을 추적하기는 무리였다. 지친 데다 동굴 밖에는 화산과 점창파 연합군이 버티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독군과 도수, 유비연의 생사가 불분명하다.

자하검존은 훗날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주석하는 깊이 숨을 내쉬며 도수를 살피려 했다.

“네놈!”

뒤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너진 바닥을 뚫고 한 인물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독군이었다.

“네놈은 자하검존과 한패가 아니었나?”

“누차 말했을 텐데요? 그들과 상관없다고.”

주석하의 반박에 독군은 머쓱해졌다. 주석하의 동료 옷차림을 보고 화산파라 지레짐작한 사람이 독군이었다. 화산파라면 자하검존과 칼부림할 이유가 없다.

“그럼 누구 편이냐?”

“누구 편도 아닙니다. 난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렇지, 나를 만나러 왔겠지. 만나서 죽이려고.”

지금 정파에 쫓기다 보니 사고가 편협해진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다.

주석하는 눈을 부릅뜨고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을 만나 독공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그러다 자하검존과 칼부림을 하게 됐고요. 어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독군과 말다툼할 시간은 없었다. 주석하는 재빨리 도수와 유비연을 살폈다.

두 사람의 상황은 처참했다. 천년쌍두사의 독에 중독되어 얼굴을 비롯하여 피부가 시커멓게 변했고 옷도 군데군데 구멍이 뻥뻥 뚫리고 타들어 가서 넝마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급히 호흡 상태를 확인하니 아직은 숨이 붙어 있었다.

“하아, 다행이다…….”

그나마 한시름 놓긴 했으나 둘의 상태에 앞이 캄캄했다. 이들을 해독하려면 독군의 내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물론 어렵진 않다. 독군이 한차례 크게 그를 공격한다면.

주변의 독충과 여기저기 묻은 천년쌍두사의 독으로는 단전에 숨은 독군의 내력에 기별만 갈 뿐 이들을 치료할 만큼 대량으로 내력이 일어나지 않았다.

독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뒤를 돌아봤다.

“으흐흐흑! 쌍두야! 쌍두야!” 이건 대체 무슨 소리지? 거구의 털북숭이 사내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으며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자하검존의 검에 토막 난 천년쌍두사는 이미 죽어 있었고 독군은 뱀을 끌어안고 슬피 울었다.

웃으면 안 되는 장면인데 왜 이렇게 웃길까. 거구의 사내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하는 장면에 주석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간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려보니 독군의 심성이 대충 이해됐다. 독군은 성질이 급하고 거칠지만 정이 많고 어수룩하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영악하지 않고 직선적이었다. 속으로 능구렁이를 백만 개쯤 키우는 자하검존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순진무구하다고 할까.

“저, 독군 어르신!”

몇 차례 불러도 반응이 없던 독군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를 쳐다봤다.

“제 동료가 천년쌍두사 독에 중독되었는데 혹시 방법 있습니까?”

찜찜한 표정으로 쓰러진 두 사람을 살피던 독군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화를 냈다.

“그놈들은…… 화산파 제자 아니냐? 쌍두를 죽인 원수를 왜 살려?”

“화산파지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들은 어르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저를 따라 들어왔습니다. 해약이 있으면 얼른 주세요. 곧 죽을 것 같습니다.”

“흥! 죽든지 말든지.”

“그러시지 말고요. 지금은 어르신과 제가 힘을 합쳐야 할 상황 아닙니까?”

주석하는 동굴 입구 쪽을 열심히 손가락질했다.

독군도 입구를 지키는 화산파와 점창파 연합 병력이 밀고 들어온다면 상황이 쉽지 않음을 이해했다.

“으흐흑, 쌍두야…….” 하아! 이 어린애 같은 늙은이를 어찌해야 할지. 주석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독군을 기다렸다. 가망성이 없다면 독군을 도발해서라도 내력을 일으켜야 한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독군이 품을 주섬주섬 뒤졌다.

“그래도 소형제가 자하검존을 쫓아냈으니 도와주지. 다만 이 해약으로 완전히 치료할 수 없어. 목숨만 붙여놓을 뿐이야.”

독군이 그에게 넘긴 것은 검은색의 작은 단약이었다.

“감사합니다.”

일단 목숨만 살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주석하는 도수와 유비연을 한쪽 벽에 기대어 눕혔다.

먼저 도수의 입을 벌려 단약을 먹였다. 다음에는 유비연.

단약을 먹인 후 무심코 유비연의 상태를 살피던 주석하는 깜짝 놀랐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헉?”

놀란 주석하는 유비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넝마가 된 그녀의 옷을 뒤적였다.

“허억! 여자였어?”

그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유 소협 이름이…… 유연? 화산파 자하검존의 제자……. 그때야 주석하는 천상삼화 세 사람을 떠올렸다. 천상삼화에 화산파의 유비연이라는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설마 이 여자가 설매검화 유비연?

그동안 유비연과 보냈던 시간이 다시 소환됐다. 생각해보니 유비연은 흑검문에서 남궁서란이나 백화령과 유달리 잘 어울렸다. 그때는 곱상하게 생긴 서생에게 두 여인이 호감을 품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셋이 천상삼화였기에 친했었다.

“하아…….” 그는 유비연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함께 노숙도 하고 한방에서 숙박도 하고. 그녀를 남자라 생각했기에 거리낌 없이 지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안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곧 그녀가 자신을 속인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유비연은 왜 그동안 그와 함께 다녔을까. 비록 첫 만남은 우연이었을지라도 이후로는 의도가 없지 않았겠지.

그가 유명하지 않을 때부터 함께 다녔으니…… 무엇 때문일까?

주석하는 배신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정파와 사파의 간극 때문에 고민하던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중독된 채 쓰러져 있으니.

문득 남궁서란이 독 때문에 피부색이 검어졌을 때 좌절하던 기억이 났다. 지금 유비연도 그런 상황이니 불쌍하긴 한데…….

“하아, 소은이는 어떡하지…….”

자신보다 더 타격받을 인물이 있었다.

동생 주소은이 유비연에게 꽤 관심이 컸지 않던가. 유비연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 한바탕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주석하는 정신을 잃은 유비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겉옷을 벗어 그녀를 덮어주었다. 그의 옷도 멀쩡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그녀의 넝마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차피 상관없으려나?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몰골이 대동소이하니.

조치를 끝낸 주석하는 독군의 옆에 주저앉았다.

독군은 천년쌍두사의 옆에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통곡을 그쳤으나 여전히 눈물짓는 모습은 강아지를 잃은 아이를 연상케 했다.

“쌍두랑 친했나 보네요.”

“으흐흑,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어.”

“그래도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존재였다니까. 쌍두를 죽인 그 자식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독군이 자하검존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굳이 독군을 말릴 이유는 없기에 주석하는 내버려 두었다.

죽은 천년쌍두사를 어루만지던 독군이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곳에 왔다고 했지?”

“독공을 배우려고요.”

“독공은 아무나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야. 다른 무공에 비해 수 배는 더 괴롭고 힘들지. 보통은 시작하자마자 죽어 나가니까. 자네도…… 어?”

독군이 그를 훑으며 관찰했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는 왜 중독되지 않았지? 쌍두의 독에도 나의 독공에도…… 뭔가 이상한데?”

“독공 어르신, 제 몸에는 이미 독으로 중첩된 공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독에 내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 공력을 다루지 못해서…… 그래서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게 말이 되나?”

독군이 화들짝 놀라 주석하의 손을 잡았다.

독군이 곧바로 진기를 불어넣으며 주석하의 내부를 살폈다. 실로 위험할 수도 있는 행동이고 반드시 상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행동이건만 주석하는 내버려 두었다.

독군의 행동은 악의가 아님이 명확했고 사회성이 뒤떨어짐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으음, 이럴 수가!”

독군이 고개를 젓더니 탄성을 터트렸다.

“이게 사람이냐? 희귀체질이야. 희귀체질!”

사람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내버려 두었다. 독군이 어떻게 믿든지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으하하! 그래서 독공을 가르쳐 달라고?”

“그렇습니다. 엄밀하게는 내력을 운용할 수 있는 독공이 필요합니다.”

독군이 주석하를 빤히 쳐다보면서 고민에 잠겼다. 독문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요구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자네…… 나를 이 동굴에서 탈출시켜 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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