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68화 (168/273)

168화 독군 (4)

독군은 정파 연합의 공격에 한풀 기가 꺾인 상황이었다.

처음 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그들을 경시했다. 독이란 무서운 것이다. 저들은 독 앞에서 함부로 날뛸 수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만독쌍선이라는 변수가 나타났다. 이들이 둘이나 되다 보니 독을 풀어도 순식간에 해독됐다. 정파가 날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자하검존은 그를 능가하는 고수다. 독을 제대로 활용하면 간신히 평수를 이룰 그런 강자다. 독이 무용지물이 되자 독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거처에서 밀리고 밀려 결국 이곳 동굴까지 쫓겨났다. 이 동굴은 그의 친구인 천년쌍두사가 사는 장소이자 그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이대로면 저들이 곧 다시 들이닥칠 거다.”

“그렇겠지요. 적어도 하루 이내에 몰려올 겁니다.”

“쌍두가 없이는…… 나는 빠져나갈 수 없어.”

독군이 좌절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당연히 주석하는 독군이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독군은 전생에서 그에게 내공을 아낌없이 전수한 은인 아닌가. 그 행위가 순순히 그를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그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외면할 수 없다.

주석하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독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를 도와주면 나도 자네를 도와주겠네. 독공을 가르쳐 달라고? 물론 해주지. 어떤가?”

조건이 붙었으나 예상외로 쉽게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했다.

주석하도 당연히 찬성했다.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니.

“지금 밖에 누가 있는지 아나?”

“자하검존을 위시한 화산파와 점창파가 있습니다.”

“그렇지. 자하검존이라면 우리 둘이 연합해야 간신히 뚫을 수 있네.”

비록 이 동굴에서 자하검존이 주석하와 대립하다 돌아갔으나 독군은 주석하의 무공이 자하검존을 능가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독군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주석하와 자하검존을 연속으로 상대하다 보니 내상의 징후가 있는 데다 자하검존의 검강에 직격당한 등과 가슴의 상처가 예상외로 심각했다.

“지금 포위망을 뚫을까요?”

“하아! 불가능해! 하지만…….”

독군은 토막 난 천년쌍두사를 힐끔 바라봤다. 설명할 수 없는 애잔한 기분이 독군에게서 느껴졌다.

몇 번이고 주저하던 독군이 품에서 작은 비수를 꺼냈다.

“지금 내 상태는 심각해. 회복되려면 꽤 오래 걸리지. 하지만 이걸 먹으면…….”

독군이 비수로 천년쌍두사의 머리 부분을 갈랐다.

도검이 뚫리지 않을 만큼 단단했던 천년쌍두사의 껍질이 의외로 쉽게 잘려나갔다.

징그러운 광경에 시선을 돌렸던 주석하는 독군의 외침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껍질이 벌어진 곳에서 검붉은 빛의 내단이 튀어나왔다. 대충 달걀만한 크기였다.

“이게 바로 천년쌍두사의 내단이야. 이 녀석의 것을 내가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쨌든 이 내단을 먹으면 난 상처를 빨리 회복하고 내공 또한 증진할 수 있어.”이미 천년쌍두사가 죽었으니 내단을 취하는 것은 분명히 합리적이지만 독군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멈칫했다. 수십 년을 함께 지내던 영물의 죽음과 그 내단 섭취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현실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포위망을 뚫으려면 이 내단이 필요했다.

독군이 주석하에게 내단 하나를 주었다.

“들게.”

“예? 어르신이 안 드시고요?”

“난 하나 더 있잖나?”

독군이 그에게 내단을 넘기고 다시 비수로 천년쌍두사의 다른 쪽 머리를 손질했다.

“자네가 독공을 배우겠다니 주는 거야. 이 내단이면 꽤 빨리 독공에 익숙해질 거야. 내가 두 개를 먹는 것보다 자네가 하나를 먹는 게 더 효율적이지. 그걸 먹고 힘내서 포위망 뚫는 것을 도와주게.”천년쌍두사의 내단이 독군의 손에 잡힌 것은 금방이었다.

독군은 내단을 들고 씨익 웃었다.

“지금부터 구결을 알려주겠네. 그리고 내단을 먹고…… 내가 네놈의 진기를 유도해서 속성으로 가르쳐 주지.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부족한 시간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게 했다. 만일 포위망을 뚫기 쉬웠더라면, 적이 조금 약했더라면 독군은 자신의 절기를 이런 식으로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석하는 고마움을 표하고 내단을 삼켰다.

혼군을 시작으로 악군, 염군, 빙군에 이어 독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기인의 무공을 얻게 됐다. 무공이 완성되었으니 앞으로는 훨씬 자유롭게 내공을 사용할 수 있으려나.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점을 주석하는 느끼고 있었다. 제어할 수 있는 다섯 기운을 모두 융합하는 과제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비록 그는 관심 밖이었으나 진정한 절대자로 등극하려면 다섯 내공을 완벽하게 융합해야 한다.

**

비둘기 십여 마리가 돌아다니며 모이를 쪼아 먹었다.

온종일 비둘기를 세심하게 돌보는 일이 최근 명아의 일과였다. 어쩌다 보니 흑검문에 홀로 남게 된 명아가 그날부터 재미를 붙인 일이었다.

“비둘기는 키워서 어디에 쓰게?”

“전서구로 키울 거예요. 오빠랑 서신이 오가면 좋잖아요?”

명아의 대답에 주소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이 아이는 부모가 없다. 이 넓은 세상에서 이 아이와 친분 있는 사람은 한 손가락에 꼽힌다. 그 첫 번째가 아마도 주석하인 모양이다. 그러니 그 먼 곳에서 흑검문까지 왔겠지.

명아에 비하면…… 아버지, 오라버니와 함께 사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주소은은 새삼 깨달았다.

지금 이 아이가 비둘기에 집착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주소은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전서구로 쓰려면 훈련이 필요해.”

“제가 어떻게든 해보려고요.”

명아가 모이를 던지자 비둘기 떼가 모였다. 열심히 비둘기 마릿수를 세던 명아가 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놈이 문제예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흑검문 제자들이 키우는 개다. 흑구라는 이름이 붙은 시커먼 개는 붙임성이 좋아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흑구가 왜?”

“저놈이 자꾸 비둘기를 쫓아버리거든요.”

명아가 흑구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하자 부르는 것으로 착각한 흑구가 냉큼 달려왔다.

왈왈-

“야! 흑구! 저리 가! 비둘기 날아간단 말이야!”

당연히 흑구는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없었다. 명아가 놀아주는 줄 알고 근처로 와서 뛰고 짖고 난리가 났다.

모이를 쫓던 비둘기 떼가 깜짝 놀라 푸드득 날아갔다. 그 모습이 즐거운 듯 흑구가 더욱 열심히 날뛰었다.

“저리 가라니까!”

명아가 참다못해서 흑구에게 돌을 던졌다. 잽싸게 피한 흑구가 잡아보라고 재롱을 떨었다.

“오빠한테 편지 보내야 하는데…….”

명아가 울상이 되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주소은은 어린 그녀의 행동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화제를 돌렸다.

“화산에선 재미있었니?”

명아가 고개를 저었다.

“왜? 누가 괴롭혔어?”

“그건 아닌데…… 화산에서 오빠를 싫어해요.”

“누가?”

“대사부랑……”

“유 소협도?”

“유 소협요?”

“너를 데리고 왔던.”

명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 유…… 소협은 안 싫어하죠.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잖아요.”

명아는 유비연의 당부를 떠올렸다. 여자라는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었는데……. 그렇게 함께 의기투합해서 여기까지 왔었는데 그 유비연이라는 여자는 오빠인 주석하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녀만 이곳에 내버려 두고. 화나게.

어쨌든 유비연이 여자란 사실을 그녀는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다.

“그래, 유 소협은 좋은 사람이니까……. 오라버니도 유 소협도 보고 싶다…….”

주소은이 중얼거리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명아는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주소은은 오빠의 동생이고 자신에게 무척 잘해준다. 그런데 유비연은 그런 주소은을 모른 척하고 주석하와 떠나버렸다.

아무래도 주소은이 가끔 유비연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한데…….

“언니도 전서구 보내고 싶어요?”

“응.”

“누구에게요?”

“오라버니랑…… 유 소협이랑…….”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고민하던 명아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니 유비연이 그녀에게 당부하기를 주석하에게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니 주소은은 상관없지 않나?

“언니!”

“응?”

“이거 비밀인데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그래, 비밀.”

어린아이들은 비밀을 좋아하는 법 아니던가. 비밀을 공유하면 더 친해지는 법이다. 주소은은 명아와 손가락을 걸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진짜 비밀인데…….”

“그래,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꼭이요!”

“그래.”

무슨 비밀이기에 이러는 걸까. 주소은은 아이의 순진함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유 소협요, 이름 아세요?”

“응. 그게 비밀이야?”

“뭔데요?”

“유연.”

“한 글자 빠졌는데…….”

“응?”

“본명이 유비연이에요.”

“유비연?”

무심코 따라 하던 주소은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천상삼화 알아요?”

“알지.”

“남궁서란, 백화령, 유비연.”

“응, 그렇지. 유비연…… 응? 뭐라고?”

주소은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뭔가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여자예요, 여자! 남자 아니고요.”

“어? 그럴 리가…….”

하늘이 무너진 느낌이란 이런 것이다. 주소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거 오빠한테 비밀이니까 꼭 지켜야 해요.”

명아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주소은은 유비연의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유비연은 흑검문에서 유독 남궁서란이나 백화령과 잘 어울렸다. 남궁천에 비하면 과할 정도였다.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두 유비연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여자였기에 남궁서란이나 백화령도 유비연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 세 여인이 주석하를 중심으로 싸고돌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비연이 여자란 사실을 그녀를 제외하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우설금까지.

“아악! 유 소협이! 내 유 소협이!”

그동안 주소은은 오빠를 지키려고 남궁서란이나 백화령을 경계했다. 반면 유비연이 주석하에게 접근해도 내버려 두었다. 이를 노리고 유비연이 거짓말했나?

이런저런 기억이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은 유비연이 그녀를 속였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유비연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귀여운 꽃미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마음을 그런 식으로 기만하다니!

주소은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언니?”

명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흔들었다.

“어? 으응.”

“어디 아파요?”

“아니. 명아야, 유 소협…… 아니 유 낭자 말이야.”

“네.”

“절대 오라버니 옆에 두면 안 될 것 같지?”

명아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두고 보자!”

주소은은 명아랑 의기투합했다. 자신을 기만한 유비연만은 절대 오라버니 옆에 얼쩡거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천지신명께 다짐했다.

**

“제대로 해명해보세요.”

주석하는 싸늘한 눈초리로 유비연을 추궁했다.

유비연은 주석하가 덮어준 겉옷을 여미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사실 특별한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강호 협객행을 하려면 여자보다 남자가 편하기에 남장했을 뿐이다. 그러다 산적을 만났고 그 와중에 주석하를 알게 됐다. 그때만 해도 딱히 여자라고 밝힐 필요가 없어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주석하가 그녀의 몸을 봤으니 오히려 사과 받아야 하지 않나?

“그, 그게…….”

지금 상황에서 추궁을 받게 되니 정말 난감했다.

“그동안 왜 신분을 속이고 따라다녔던 겁니까?”

주석하의 질문을 받고 나니 말문이 턱 막혔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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