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돌파 (1)
그동안 유비연은 사부 자하검존의 명을 받아 주석하 주위를 맴돌았다. 주석하가 만진장으로 가는 길을 함께했고 다시 흑검문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물론 그녀가 원했던 행동이었으나 사부의 권유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자하검존은 사파에서 신성처럼 나타난 주석하를 감시하라고 했었다. 혹시 무한회귀공으로 회귀한 자가 아닌지. 물론 그녀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주석하가 사파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기에 그녀의 감시는 꽤 쓸모 있는 정보를 양산해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주석하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첩자가 되었으니. 물론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하검존과 주석하 사이가 대단히 나쁘다는 점이었다. 만진장에서도 나빴고 제갈세가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곳 운중산에서도 그녀가 기절해 있는 동안 주석하와 자하검존이 다투었다고 했으니 상황이 최악이다.
“나쁜 목적은 절대 아니었어요.”
유비연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니까.
주석하는 할 말이 많았으나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는 흑검문을 구하러 사천까지 와준 고마운 사람이다. 어쩌면 그마저 자하검존의 첩자여서 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녀의 진심을 곡해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야 어떻든 즐겁고 고마웠던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좋습니다. 믿어드리죠. 이제 돌아갈 건가요?”
“네?”
“사부에게로.”
사부란 말이 나오자 유비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 사부와 그녀의 관계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이곳 동굴 안까지 들어오고서도 그녀를 내버려 두고 가버린 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과거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건 좀…….”
“그래요. 이해해 드리죠. 다만 움직일 때 걸림돌이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 알았어요.”
주석하의 싸늘한 말에 유비연은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란 점이 그렇게 잘못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사파가 아닌 정파였어도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었듯 남자가 아닌 여자라 하여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입 밖까지 나오려는 항변을 그녀는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주석하에게 대드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다.
대신에 그녀는 감사를 표했다.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아, 그건 독군에게 감사하면 됩니다. 독군이 해독제를 줬으니까요.”
사무적으로 대답한 주석하가 물러났다.
홀로 남은 유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저쪽에는 주석하와 독군과 도수가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딱히 그녀에게 오지 말라고 하진 않았지만 차마 옆에 낄 수 없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천년쌍두사에게 휘감겼을 때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동굴 어디에선가 나타났던 사부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거의 넝마조각이 된 그녀의 상의와 그 위에 덮인 주석하의 옷을 보고 그녀는 정체를 들켰음을 직감했다.
비록 심한 추궁은 아니었을지라도 주석하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심하게 아팠다.
천년쌍두사의 독에 중독되었다가 살아났어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함께 중독되었다가 살아난 도수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더욱 좌절했다.
도수의 얼굴은 얼룩덜룩했다. 검은 기운이 얼굴 곳곳에 커다란 반점처럼 남아 있었다. 천년쌍두사의 독을 자신도 똑같이 쬐었으니 아마 그녀도 지금 같은 모습이리라.
유비연은 검은 반점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으으으.’
북받치는 설움이 다시 올라왔다.
천상삼화에 속할 만큼 탁월한 미모를 자랑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얼굴이 저렇다면…….
유비연은 소매를 걷어 손과 팔을 살폈다. 역시…… 점박이 개가 보였다.
그녀는 찬란했던 미모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주석하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과 함께 그녀를 좌절로 몰아넣었다. 어쩌면 앞으로 더 험난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쓰라린 패배를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작전 모의가 끝났을까.
주석하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자정에 이곳을 떠날 겁니다.”
“포위망은 어떻게 하고요?”
“정면돌파 해야죠.”
“그건 위험해요!”
물론 그녀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주석하는 그녀를 한편이라 생각지 않으니.
주석하가 표정 없이 담담한 얼굴로 당부했다.
“유 낭자가 함께 돌파하든 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따라와도 마찬가지고요. 동굴을 나가서 적에게 붙더라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세요. 다만…… 오늘 밤 전투는 다소 격렬할지도 모릅니다.”상대는 자하검존이다. 자하검존의 성격을 고려하면 쉽게 끝날 전투가 아니란 것쯤은 유비연도 안다.
“그때까지 쉬시지요.”
말을 끝낸 주석하가 다시 돌아갔다.
유비연은 혼란스러웠다. 주석하와 자하검존이 싸우면 누구 편에 서야 할까. 지금은 사부를 응원할 수도 주석하를 응원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텐데.
“하아…….”
아무리 한숨을 쉬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
자정이 되었을 때 주석하는 조용히 앞으로 나갔다.
얼마 걷지 않아 절벽에 닿은 동굴 끝에 이르렀다. 절벽 아래로 산비탈이 넓게 펼쳐져 있고 곳곳에 경계를 선 화산파와 점창파 사람들이 보였다. 저 너머 막사까지 고려하면 대부분 병력이 코앞에 모여 있었다.
이곳 동굴로 들어올 때는 몰랐으나 반대쪽인 동굴에서 내려다보니 운중산 아래로 쭉 뻗은 험난한 계곡이 장엄하게 느껴졌다.
달이 떠 있어 주위는 어슴푸레 밝았다. 달빛이 탈출에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어차피 인력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고.
“준비됐나요?”
주석하는 뒤따라온 사람들을 확인했다.
독군이 바로 뒤에 있었고 그 뒤로 도수와 유비연이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견이 없자 주석하는 천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제 다섯 가지 내력을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어차피 동시에 그 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실제 그의 내력은 십존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다. 하나의 내력이 소모되면 다른 내력을 끌어낼 수 있어서 무려 다섯 명에 해당하는 지구력을 발휘한다는 것뿐.
천년쌍두사의 내단을 먹음으로써 독에 대한 내성과 독군의 내력이 한층 강화됐다. 이번 생에서 흡수한 빙군의 내력을 구양상에게 전했기에 전생에서 얻은 내력보다 급증한 내력은 염군의 내력과 독군의 내력 둘이었다.
어쨌든 몸속의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에 주석하는 기분이 매우 좋았고 자신감 또한 넘쳤다. 그 충만한 자신감으로 바로 지금 포위망을 뚫을 것이다.
“으하하, 가능하겠지? 힘들면 비켜라! 내가 하마!”
독군이 우려를 표시했다.
작전 모의에서 주석하는 자신이 모두 감당할 테니 독군은 뒤에서 지원만 해주면 충분하다고 당부했었다. 독군은 주석하가 화산파와 점창파 모두를 감당할 수 있다고 절대 믿지 않았으나 강경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상태였다.
동료의 준비를 확인한 주석하는 조용히 포위망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처리할까. 예전이라면 그는 희생을 줄여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했을지 모른다. 특히 상대가 유비연의 사문인 화산파였으니까.
다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적어도 자하검존에게 만큼은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제갈휘와 작당하여 그를 해치려던 자였으니까. 어쩌면 유비연에게 느낀 배신감 때문에 더 미워하는 것일지도.
“시작하겠습니다.”
주석하는 굳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유비연은 오늘 주석하가 예전과 확실히 다름을 깨달았다. 어떤 차이인지 명확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와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차이가 제법 컸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꺼냈다.
넘치는 게 내공이다. 그 내공으로 적에게 죽음을 내릴 것이다. 예전이라면 상상치도 못했을 방식이다.
주석하는 가부좌를 틀고 흑검소를 가볍게 불어 소리를 냈다.
삐리리-
적막을 깨우는 퉁소 소리가 멀리 퍼져나갔다.
난데없는 음률에 화산파와 점창파 제자들이 몰려왔다. 절벽 아래에 모인 수십 명의 군중을 향해 주석하는 소리 질렀다.
“이곳을 떠나라! 거부하면 죽음뿐이다!”
내공을 실은 그의 목소리가 퍼지자 사람들은 대뜸 욕을 했다.
“저 자식이 뭐라 씨부리는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군!”
“날 밝으면 네놈부터 포를 떠버린다!”
어둠 속에서 와글거리는 비난이 들려왔다.
주석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익히 예상했던 바다. 이럴 줄 알고 있었음에도 경고한 이유는 자신의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서였을까.
주석하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흑검소를 입에 댔다.
유비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주석하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주석하는 음공의 대가인 악군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주석하가 연주하는 흑검소를 몇 차례 접한 기억이 났다. 특히 백화령과 합주한 장면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음률을 연주하는 것이니 고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이 아님을 유비연은 꿰뚫고 있었다. 악군이 누구인가. 음을 다루는 그녀는 사파인 흑도팔군에 속해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음공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한때 그녀는 여러 문파를 멸문시켰었다. 음공을 이용해서.
“설마…….”
문득 사부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주석하는 향후 천하를 경동시키는 대 살인마가 될 거라고.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사부가 잘못 보았다고 확신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바로 지금 이곳에서 대참극이 발생할까?
유비연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자신의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았던, 앞으로 만날 주석하는 절대 살인마가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삐리리리-
나지막한 퉁소 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천무태평악이 아닌 진혼곡이었다. 최근에 주석하가 따로 공부한 평범한 곡이었다.
욕을 하던 군웅들은 순식간에 음악에 빠져들었다.
점차 소리가 커지고 음률이 격렬해졌다. 곡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포악한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 파- 파- 파-
음파를 타고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뿌려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주변의 아름드리 나뭇가지가 폭풍을 맞은 듯 흔들리며 부러졌다.
“허억!”
드디어 사람들은 퉁소 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죽음의 음파! 한때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악군의 음공이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모두를 짓눌렀다.
파- 파- 파- 파-
놀랄 틈도 없이 강기의 파편이 사람들을 공격했다.
강편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둠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보이지 않았다. 뭔가 접근한다고 느끼는 순간 피부를 베고 지나가는 음파에 팔과 다리가 잘렸다.
“으아악!”
순식간에 장내는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많은 다수를 한꺼번에 공격하는 최강의 무공이 바로 음공이다. 그만큼 내력 소모가 심하지만 어차피 주석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장점을 유감없이 살린 오늘의 작전이었다.
퉁소 소리가 점점 강렬해지고 비명이 산을 메웠다.
“피해라!”
“놈은 인간이 아니야!”
죽음을 눈앞에 본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푸아악-
그들이 음공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강한 내공과 호신강기로 맞서지 않는 한 죽음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한층 강력해진 퉁소 소리에 포위망을 구성했던 사람들은 육편이 되어 장렬하게 산화했다. 피와 살이 튀는 죽음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