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돌파 (2)
화산매화검수의 막내인 고진은 유비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유비연이 독군을 찾아, 아니 정확하게는 주석하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 지 한참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자하검존이 동굴로 들어갔다가 부상을 얻고 돌아왔다.
동굴 내부 상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하검존의 상태로 보아 동굴 내부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 추정할 뿐.
고진은 자하검존에게 유비연의 생사를 묻고 싶었으나 감히 사부에게 입을 열 용기는 없었다. 그 때문에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
주석하를 만난 이후 정파와 사파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에 빠진 사저를 이해한다. 그라면 고민 없이 단지 윗선의 명령에 복종했을 것이다. 그런 사저를 한편으로는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했다.
“사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진은 주석하의 음공에 쓰러지는 주변 동료를 부축하며 겁에 질렸다.
예전에 그가 경험한 주석하는 경우가 바른 사람이었다. 산적을 해치우고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애쓰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살인마로 돌변했다. 지금처럼 퉁소를 불며 잔인한 살상을 일삼는 주석하는 상상조차 되지 않던 모습이었다.
으아악-
옆에 있던 비교적 무공이 약했던 녀석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입에서 핏물이 꾸역꾸역 솟구치고 있었다.
“으으! 살인마다! 살인마가 나타났다!”
군웅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진 또한 밀려오는 음파를 간신히 호신강기로 차단하면서 동굴을 쳐다봤다.
동굴 입구에 앉아 퉁소를 부는 주석하는 마신의 강림이었다. 고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지금 고진의 머릿속은 유비연 걱정뿐이었다. 화산매화검수에 들고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순간 강렬한 사자후가 들려왔다.
우우우-
자하검존이 전력을 다해 지르는 음공이었다.
주석하의 퉁소 소리에 영향을 받은 화산파와 점창파 제자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사자후로 대항하는 것이다.
자하검존의 사자후가 잠시나마 퉁소 소리를 압도하자 퉁소 소리가 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퉁소 소리가 사자후를 압박했다.
그 순간 다른 사자후가 자하검존의 사자후와 어울렸다.
우우우우-
고진은 이 사자후가 점창파 장문인인 낙월우사의 목소리임을 간파했다. 무려 정파십존의 일인인 자하검존과 구대문파 장문인인 낙월우사의 합공에 맞서 주석하의 퉁소가 버티고 있었다.
“으으, 주 공자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나?”
서로 부딪히며 발생한 충격파의 한중간에서 고진은 망연자실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주석하 때문인지 아니면 악군의 무공이 대단해서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주석하의 음공이 자하검존과 낙월우사의 합공에 주춤하면서 그나마 화산파와 점창파 제자들은 운신이 가능해졌다. 이미 무공이 약한 자들은 큰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고진! 가자!”
화산매화검수의 맏형인 위곤이 비장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네? 무슨…….”
“검존께서 동굴에 잠입해서 독군을 제압하라 하셨다.”
화산매화검수에게 내려진 특명이었다. 지금 주석하는 음공에 정신이 팔려있으니 이 기회를 틈타 기습하라는 뜻이었다. 독군은 동굴 내부에 있고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석하를 지나가야 한다. 즉 주석하도 함께 처리하라는 뜻이다.
고진은 이 작전에 회의를 느꼈으나 사형인 위곤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무엇보다 유비연을 구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자, 가자!”
위곤을 비롯하여 수 명의 화산매화검수가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고진도 정신없이 그들을 뒤따랐다.
**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에 유비연은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그녀가 상상했던 최악의 전개가 펼쳐졌다.
그녀가 운중산으로 동행한 이유는 어떻게든 양측의 대립을 완화해보겠다는 목적이었다. 자하검존과 주석하가 싸움을 피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수십 명이나 되는 그녀의 동료가 온전한 시신마저 남길 수 없을 만큼 죽어 나가고 있었다.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대참사였다.
“이, 이건 안 돼…….”
넋이 나간 채 유비연은 주석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동굴 입구에 마치 좌선하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작정하고 퉁소를 부는 주석하의 자태는 무척 고상했으나 그 이면에는 악마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시산혈해로 변해버린 포위망이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다시 사부의 경고가 떠올랐다.
- 그 녀석은 훗날 대 살인마가 될 것이다. 그를 제거해야 정파가 살아난다.
그때는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장면을 목격하고 사부가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연은 낙담 속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저지해야 하는데, 동료를 구해야 하는데, 아니 주석하가 살인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지금 그와 그녀의 관계를 고려하면 차마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옆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와 가장 가까운 친구 도수다. 지금 도수의 표정은……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순간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도수는 살검회라는 청부 조직 출신다웠다.
‘역시 사파는 어쩔 수 없나…….’
다시 회의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입을 닫을 그녀는 아니었다. 지금 죽더라도 의미 없는 살상을 자행하는 주석하를 막아야 했다.
“주 공자! 그만 해요! 지금 당신은 죄 없는…….”
퉁소 소리가 뚝 끊어졌다. 동시에 자하검존의 사자후도 사라졌다.
동굴 밖은 어둠만큼이나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죄가 없다고 했나?”
주석하가 힐끗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달빛에 음영이 진 그의 얼굴에서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실로 기괴하여 유비연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당신을 해치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유비연은 뭐라도 말해야 했다. 어쨌든 그가 음공을 중단했으니 목적은 성공했다.
“자, 보라! 누구인지.”
주석하가 퉁소로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어떤 기시감에 유비연은 주석하 옆으로 달려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화산매화검수와 점창팔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동굴에 잠입하려는 듯 풀숲에 숨어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기습을 감행할 태세였다.
“내가 힘이 없다면 저들의 손에 죽었다. 무림은 그런 곳 아니던가. 나의 살상은 허용되지 않고 저들은 허용되는가. 나는 살인마이고 저들은 영웅인가?”주석하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지금까지 유비연은 주석하에게서 이런 태도를 본 기억이 없었다. 지금은 마치 강림한 대마두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저들은 당신에게 해가 될 수 없는 존재여요.”
“그들 개개인은 그렇겠지. 하지만 화산매화검수 연합진의 위력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점창팔웅 또한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내가 음공으로 자하검존과 대결 중인 상황이라면 얼마나 기습에 취약한지 누구나 알지 않나? 저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이해 못 할 바보는 아니겠지.”유비연은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힘의 논리일 뿐이었다. 그녀의 항변은 주석하가 강하기에 사정을 베풀어 달라는 호소였다.
“지금 저들이 동굴을 기습하는 순간 나는 저들의 목을 벨 것이다.”
“그, 그건…….”
유비연이 머뭇거리는 순간 아래쪽에 있던 화산매화검수와 점창팔웅이 신형을 날렸다.
“안 돼!”
유비연은 다급하게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당연히 그녀의 경고는 무시됐다. 화산매화검수 십이 명과 점창팔웅 여덟 명이 순식간에 동굴 입구까지 접근했다.
당연히 입구에는 주석하가 오연하게 앉아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오는 적들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주석하의 흑검소가 빛을 발했다.
서걱-
검강이 촘촘한 그물망처럼 동굴 입구를 차단했다. 화산매화검수와 점창팔웅은 신형이 허공에 떠 있는 데다 주석하가 반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들은 주석하가 방금까지 무리하게 음공을 펼치면서 내력을 소모했기에 쉽사리 대응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완전한 오판이었다.
“남의 목을 노리면 자신의 것도 내놓아야 하는 법이다!”
서걱-
피가 튀고 살이 베어졌다. 팔다리가 잘리고 허리에 자상이 그어졌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화산매화검수와 점창팔웅은 몸이 굳어 대응하지 못했다. 그 순간의 차이는 컸다. 상대의 검강이 무자비하게 그들을 도륙했다.
유비연은 얼이 빠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제야 명확하게 와 닿았다. 그녀의 저지 때문이 아니라 주석하는 의도적으로 내력이 소진된 것처럼 음공을 중단하고 저들을 유인했다. 저들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노려 목숨을 빼앗았다. 그가 음공을 계속했어도, 아니 저들이 동굴 아래에 모였을 때 경고만 했어도 이런 식의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인마야…….’
주석하를 탓할 수 있을까. 더 효율적으로 적을 제거하고자 전술을 펼쳤을 뿐. 어차피 전쟁터는 모든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곳 아니던가.
지금 주석하를 살인마라 욕해 본들 그것은 단순한 정파의 논리일 뿐이다.
그녀의 눈앞에서 화산매화검수의 수장인 위곤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따랐었고 수시로 그녀를 지도해 주었던 사형이다. 그 사형이 주석하의 검강에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속에서 울컥 울음이 치밀었으나 그녀는 기를 쓰고 참았다. 친한 사람이 죽는 장면은, 그것도 그녀가 친했다고 믿는 사람의 손에 의해 죽는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서걱-
그녀가 부들부들 떠는 사이 검강이 어둠을 가르고 다시 수명의 사람들이 잘려나갔다.
그녀가 보기에 마치 생명을 도외시한 부나방을 처리하는 장면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걱-
화산매화검수의 놀라운 무공도, 놀라운 합격진도 속수무책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허공에 몸이 뜬 상황에서는 어떤 임기응변도 통하지 않았다. 점창팔웅도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
그녀의 눈에 고진이 보였다. 화산파에서 그녀와 가장 친한 사제가 아니던가. 함께 강호를 주유하면서 협객을 자처했던, 풍운채에서 주석하와 함께 사람들을 구했던 바로 그 사제다.
“안 돼!”
순간 유비연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정신없이 고진의 앞을 막아섰다. 고진을 노렸던 주석하의 검강이 유비연에게 날아왔다.
이렇게 죽는 걸까.
유비연은 고진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제 곧 검강이 그녀를 벨 것이다.
푸아악-
검강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멎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아픔이 없었다. 감각이 모두 사라진 건가.
유비연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주석하의 퉁소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는 저 퉁소 끝에 시퍼런 검강이 뻗어 있었겠지.
“비켜라!”
주석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유비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부터 살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몇 명이 살아남았을까.
유비연은 자신이 안은 고진 옆에서 간신히 숨이 붙은 화산매화검수 한 명과 점창팔웅 한 명을 확인했다. 비록 그 둘도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살아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몰살이었다.
순식간에 열아홉이나 되는 정파의 고수가 목숨을 잃었다. 대참사였다.
유비연은 고진을 등 뒤에 감추고 주석하를 향해 돌아서서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살인마가 아니잖아요.”
울음이 섞인 유비연의 하소연에 주석하는 한바탕 광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