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돌파 (3)
“내가?”
그때 주석하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우설금이었다.
한때 우설금은 그가 보는 관점에서 마교의 살인마였다. 그녀는 잔인했고 적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전장에서 그녀와 만난 자는 대부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주석하도 적잖게 고민했다. 그런데 그런 우설금의 모습이 지금 자신에게 투영되고 있었다.
과거의 그가 우설금을 그렇게 보았듯이 아마도 지금 유비연은 그를 그렇게 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염려스럽다기보다 주석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우설금의 그런 행동이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단순히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입장 차이라고.
“내가 살인마라고? 흐흐, 그래서 어쩌라고?”
주석하는 유비연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유비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렇다는 뜻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순간 주석하는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사파의 일원이 되어 정파와 싸웠다. 정파가 자행했던 무수한 살겁의 희생양이 됐다. 그리고 그 이후 마교의 칼받이가 되어 정마대전에 나갔다.
주변 사람들이 무수히 쓸려나갔다.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 나갔다. 마지막 순간 그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정파는, 그때의 마교는 분명히 살인마 집단이었다. 아마 그 살인마들은 이번 생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눈앞의 유비연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녀가 정사대전에 참여한다면, 정마대전에 참여한다면 살인마가 되어 적을 벴을 것이다. 정파인 그녀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겠지.
전생에서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던 그이기에 눈앞의 지옥도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설금의 행동에서 느꼈던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무림에서는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다. 한쪽에서는 그를 살인마라 욕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정파의 관점으로 보는 유비연의 시선에 그가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너희가 살인마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유비연이 도리질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사제인 고진을 살려달라는 하소연이다.
물론 주석하도 고진을 죽일 만큼 잔인하지 않다. 고진은 풍운채 사건 때 그의 동료가 아니었던가. 안면이 있는 자를 죽이기는 쉽지 않다.
“고진! 지금 가서 전하라. 우리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앞을 막는 자는 죽는다!”주석하의 경고에 유비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고진은 살았다. 화산십이검수 대다수가 죽었건만 이상하게도 유비연은 화가 나지 않았다.
고진이 눈치를 보다가 유비연에게 말했다.
“사저, 함께 가요.”
유비연은 움직일 수 없었다. 주석하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기에 그녀가 이곳에 남는 것은 좋지 않다. 그녀 본인에게도, 또 남의 눈에도. 그런데도 떠날 수가 없다.
주석하의 시선이 무심하게 그녀를 훑었다.
유비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지 않아. 너 먼저 가.”
의외였던 듯 반색한 주석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봐야 의미 없겠지만 자하검존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무공을 가르치는 사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겠지만 그의 인성은…… 글쎄.”
“사부를 모욕하지 말아요.”
“하나만 알려주지. 네가 천년쌍두사에게 감겨 목숨이 오락가락할 때 자하검존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는 동굴 측벽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때 나와 독군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둘 가운데 한 사람을 죽일 기회를 엿봤지. 어쩌면 둘이 양패구상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주석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차갑게 내뱉었다.
“그는 너를 구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유비연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기절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주석하의 분석이 옳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 유비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진이 그녀를 부축하려 하자 유비연이 강하게 반발했다.
“넌 어서 가! 가란 말야!” 유비연의 서글픈 눈을 마주한 고진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고진의 모습이 동굴 입구에서 사라졌다.
유비연은 슬픔을 삼키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자하검존과 보냈던 과거의 시간이 떠올랐다. 어릴 때 자하검존은 유달리 그녀를 예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가 반항한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녀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주석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한 가지 장담해볼까?”
유비연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조용히 있었다.
“지금 우리가 동굴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화산파와 점창파가 다시 포위망을 형성하며 전의를 불태울까?”
동굴 밖의 참상을 떠올리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주석하의 음공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거기에 정예인 화산매화검수와 점창팔웅이 붕괴했다. 사실상 저지할 인원도 없다.
“어쩌면 살아남은 말단 제자들은 여전히 의욕을 불태울지도 몰라. 하지만 자하검존은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왜인지 알아?”
유비연은 아닐 거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누구보다도 정파를 위한, 정의를 위한 삶을 살았던 자하검존이라면 끝까지 주석하와 독군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저지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하검존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거든. 이곳에서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거든. 물론 그는 뒤에서 딴 변명을 할 거야.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확실하지.”마음 깊은 곳에서 어쩌면 그럴 거라고 슬금슬금 떠오르는 불안을 유비연은 강하게 눌렀다. 이유가 무엇이건 사부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 하지만…….
주석하는 유비연에게서 시선을 뗐다.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독군과 도수가 긍정적인 답을 전해왔다.
“그럼 가죠.”
주석하가 앞장섰다.
그는 동굴 입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점검한 후 힘차게 발을 굴렀다. 어둠 속에서 한 마리의 비조처럼 그는 사뿐히 허공을 날아 시산혈해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
주석하는 독군과 도수, 유비연을 이끌고 유유히 동굴을 탈출했다.
사실상 정파 연합의 포위망이 붕괴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과 마주치자 도망치기 바빴다.
“피, 피해라! 죽음의 사신이다!”
“사, 살인마와 맞서지 마라!”
“하, 하느님 제발 살려주세요!”
유비연은 그런 동료를 십분 이해했다. 지금 화산파나 점창파 사람에게 주석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일 테니.
주석하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주력이 망가진 상황에서 저들을 더 몰아붙이면 말 그대로 살인마가 된다.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화산파, 아니 적어도 점창파는 당분간 홀로 일어서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야밤에 운중산 계곡을 타고 내려온 그들은 옆 봉우리로 넘어갔다. 무림인, 그것도 상당한 고수인 그들에게 이런 야행은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었다.
인근 지리에 익숙한 독군이 마침내 그들을 어떤 동굴로 이끌었다.
“이곳은 안전하다. 다시 저들이 찾아오려면 며칠은 걸릴 거야. 남은 놈이라 해봐야 별놈 없으니 나 혼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고맙네, 소형제.”
독군이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감사를 표했다.
주석하는 가슴이 뿌듯했다. 전생에 십만대산 절벽에서 독군에게 내력을 받은 이후로 그 보답을 완벽하게 완수했다. 사람이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독공을 가르쳐주신 보답입니다.”
“흠, 그런가? 독공은 쓸 만한가?”
“당연하지요. 쌍두의 내단 덕에 내공 또한 급증했습니다.”
주석하의 무공 파괴력을 본 독군이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소형제가 목적을 달성했다니 나도 기쁘네.”
독군과 인사를 마친 주석하는 유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유비연이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자하검존의 등장을 마음속으로 바랐다. 그가 사부라면, 또 정파의 명운에 목숨을 건 자라면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그들을 저지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자하검존은 움직이지 않았다. 부상을 크게 입은 걸까.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주석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하검존의 부상은 크지 않습니다. 그는 나와 불과 몇 합밖에 공방을 벌이지 않았고 독군과 싸우면서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독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그의 내공을 고려하면 타격은 없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그의 실체를 제대로 보라는 겁니다. 물론 사제지간이라 쉽지 않겠지만요.”
이제 유비연도 처음처럼 그렇게 좌절하진 않았다. 사부가 그녀를 버렸음을 받아들였다. 또 정파와 사파의 갈등 또한 답이 없음을 인정했다. 단지 지금은 화산으로 돌아가기에도 마땅찮아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답답할 뿐이었다.
주석하와의 인연도 아마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닐까.
유비연은 대답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갈 거예요.”
“어디로?”
“모르겠어요. 발이 닿는 대로 가야죠.”
그녀의 목소리에 기운이 빠져있었다.
함께 운중산으로 올 때만 해도 주석하는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나리라고는 예상치 않았었다. 사실 그녀가 여자임을 속인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그가 화를 내긴 했지만 그 때문에 딱히 피해를 본 것도 없었으니.
그런데도 왜 그녀에게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주석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넝마가 된 옷 위로 여전히 그의 흑삼을 걸친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옷도 그리 멀쩡하지 않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정말 당당했었고 지금까지 그녀는 정파이면서도 사파인 그를 잘 보듬어 안았었는데.
마치 점박이 강아지처럼 얼룩덜룩하게 변한 유비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여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본판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천상삼화라니 남궁서란이나 백화령에 버금갈 용모일 것이다.
예전에 남궁서란이 독에 중독되어 용모가 망가졌을 때 좌절했던 장면도 기억났다.
지금 유비연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됐다.
“유 낭자, 가부좌하고 앉아 보세요.”
유비연은 거절하지 않고 바닥에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반포기 상태였기에 굳이 주석하와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주석하의 무공이라면 그녀쯤은 한 손으로 죽일 수 있으니까.
주석하는 독군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원래의 내력에 내단이 더해진 엄청난 내력이 단전에서 일어났다.
“편안하게 진기를 받아들여요.”
주석하는 유비연의 몸속으로 진기를 불어넣었다. 독군의 내력이 그녀의 혈맥을 타고 돌면서 몸속에 남은 독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유비연은 약간의 통증을 느꼈으나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그녀는 지금 주석하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그녀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하지 않으리란 믿음은 있었다.
문득 그녀는 주석하라는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그녀는 사부인 자하검존과 주석하 중에 누구를 더 믿고 있는 걸까.
주석하라면 천년쌍두사에게 휘감겨 죽음을 오가는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라면 분명히 그녀를 구하려고 애를 썼겠지. 그런데 그녀의 사부는…….
사람의 본성은 정파인지 사파인지와 상관없다. 그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당연히 정파라고 모두 정의롭고 착할 수 없다. 그 단순한 논리를 이제야 깨달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비연은 운기조식을 마쳤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손을 봐봐요.”
주석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백옥같은 섬섬옥수를 확인한 유비연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