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무극천존 (1)
“응?”
정작 더 놀란 것은 주석하였다.
체내에 남은 독기를 완전히 없애주었는데 기절한 이유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다.
본래의 미모를 되찾았으니 당연히 싫지 않겠지만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일으킬 줄은.
주석하는 유비연을 동굴 한가운데 그대로 놓아둘 수 없어 그녀를 끌어다가 동굴 벽에 기대놓았다. 한숨 푹 자고 나면 다시 생생해질 것이다.
동굴 안쪽을 바라보니 독군은 삼킨 내단을 완벽하게 내공으로 바꾸고자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었다. 도수는 피곤했던 듯 한쪽에 시체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지금 이곳에서 온전히 정신을 차린 사람은 그뿐이었다.
주석하는 동굴 입구에 걸터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천년쌍두사가 살던 그 동굴에 비하면 풍경이 별로였으나 덕양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좌우로 빽빽하게 들어찬 숲과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이곳 또한 심산유곡임을 알려줬다.
“이제 단전의 모든 내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건가…….”
회귀한 이후 무척 힘든 여정이었다.
혼군, 악군, 염군, 빙군, 독군. 이 다섯 가지 기운은 모두 강대하면서도 독특했다. 비록 이 기운을 융합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들 각각의 능력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적어도 흑도팔군의 다섯이 연속으로 힘을 내는 그런 고수가 되었다.
달리 보면 마르지 않는 내공을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무림에서는 삼류고수 넷보다 이류고수 둘이 낫고 이류고수 둘보다 일류고수 하나가 더 낫다. 아직 주석하의 무공 수준은 흑도팔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단지 내구력이 더 길어졌을 뿐이다.
흑도팔군보다 더 강한 고수라면? 흑도팔군과 정파십존의 차이는 거의 없다. 물론 정파십존의 최강이라는 무림맹주 무극천존은 만난 적이 없고 반야불존과는 제대로 합을 맞춰보지 못했다.
마교칠왕? 만난 적이 없어 그들의 강함을 모른다. 다만 그가 잘 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우설금과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녀를 이길 수 있나?”
우설금과의 대결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가 그녀에게 가진, 그녀가 그에게 가진 호감이 있으니 싸울 일이 있더라도 서로 피하게 되겠지만 과연 그녀의 강함은 어느 정도일까.
마교수호사령인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걸까? 주석하는 그녀의 신위를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녀는 확실히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보다 강하다. 지금의 그라면? 이길 자신은 없으나 질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비슷한 수준인가.
현재 마교에는 그녀와 동급인 인물이 셋이 더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얼마나 더 강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천마까지.
“하아, 쉽지 않네.”
물론 그가 무림 최강이 될 필요는 없다. 그의 목표는 주변의 간섭 없이 백화루의 주인이 되어 편히 사는 것이니까. 현재 그의 무공이라면 백화루주가 될 자격쯤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부족한 점은…….
“아, 돈이 없네. 돈이!”
딱히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이 돈이 없어 고민하는 경우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데 왜 그의 인생은 이다지도 고달프단 말인가.
백화루를 인수하려면 용병을 얼마나 뛰어야 할지 계산이 서지 않는다. 그게 용병 뛰어 해결 가능한 문제인지부터 의문이다.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고민에 잠기다 보니 우설금이 보고 싶어졌다. 그녀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데도 자꾸 떠오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콩깍지가 씌었다.
이 산중에서 그녀를 볼 방법은 없으니…….
“아!”
만리안석이 생각났다. 배교의 신물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그는 품에서 만리안석을 꺼냈다. 어차피 주변에 볼 사람도 없고 그의 동료는 전부 기절했거나 자거나 운기 중이다.
만리안석의 푸른빛이 매우 강했다. 그동안 쓰지 않아서다.
그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만리안석에 내력을 주입했다. 동시에 우설금을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리안석에서 눈부신 빛이 발해졌다. 구슬 중앙에 흐릿한 장면이 일더니 점차 또렷해졌다.
구슬 중앙에 드러난 사람은 우설금이었다.
“헉!”
주석하는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우설금이 위험해서가 아니다. 지금 우설금은 매우 편안한 상태였다. 다만…….
우설금은 나무통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 중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물 위에 둥둥 떠 있고 물방울이 맺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뜨거운 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물 위에는 붉은 꽃잎이 점점이 떠 있었다.
물 위로 그녀의 하얀 어깨가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다. 아쉽게도 그 아래는 물에 잠겨 사실상 보이지 않았으나 그 장면만으로도 주석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찰랑거리는 물과 물 위로 드러났다 잠기기를 반복하는 긴 팔이 그를 유혹했다.
“으흑!”
이런 장면을 보려던 목적은 아니라고 천지신명께 맹세할 수 있다. 하지만 보는 순간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장면을 엿봤다는 그 나무꾼도 부럽지 않았다.
주석하는 입을 벌리고 만리안석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우설금이 봐도 좋다고 허락했어도 이런 장면을 보라는 것은 아닐 테지만.
확실히 우설금에게는 그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쳤다. 적어도 그에게만은 그랬다.
**
목욕을 마친 우설금은 욕조에서 일어났다.
물방울이 그녀의 몸을 타고 굴곡을 따라 흘러내렸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가 황급히 마른 천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우설금은 물을 털어내며 개운함을 맛보았다.
문득 주석하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을 자려나? 설마 만리안석으로 훔쳐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어이없는 생각이 든 그녀는 안면에 홍조를 띄웠다.
주석하를 떠올리면 왠지 가슴이 설렜다.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도 모른다. 이런 감정이 낯설기도 하고 당황스럽다.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그것도 그녀의 홍철산에 죽어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데 주석하를 떠올리면 자꾸 온몸이 간지러워진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일 있으세요?”
그녀의 미소를 본 시녀가 몸을 닦아주며 물었다.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단천마령이 미소를 지어 놀란 모습이다.
“좋은 일? 글쎄…….”
우설금은 대답을 흐렸다.
마교에서 이런 감정은 낯설다. 마교는 강함을 추구하며 타인보다 위로 올라서려는 자들의 집단이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녀도 다른 마교인에게 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있다면 오직 천마……. 그녀를 어릴 때부터 길러준 부모 같은 존재니까.
“밖에 묵천마령께서 오셨습니다.”
“언제?”
“방금 오셨어요.”
우설금은 서둘러 옷을 입고 대청으로 나갔다.
유달리 피부색이 어두운 묵천마령이 대청에 앉아 화롯불을 쬐고 있었다. 십만대산은 고산지대라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벌써 밤이 되면 기온이 확 떨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우설금은 딱딱한 어투로 물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중원 정세 변화를 알려주러 왔소.”
묵천마령은 마교수호사령의 셋째다. 단천마령이 넷째이니 공식 서열로 따지자면 그녀보다 한 단계 높다. 다만 수호사령의 서열은 현실에서 사실상 의미가 없다. 무공 순서는 공식적으로 겨룬 적이 없으나 금천마령이 최강이고 단천마령이 가장 아래라고 알려져 있었다.
“요즘 자주 오시네요.”
다른 자들에 비해 그나마 우설금이 가까이 지내는 자가 바로 묵천마령이었다. 천마를 제외하고는 마교에서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묵천마령은 사십 대 초반의 남자로 우설금이 어릴 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특히 무공 수련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 때문에 우설금은 항상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었다.
“방금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묵천마령이 묵직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정파연합군이 호북과 하남 등지에서 흑도를 격파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비슷한 정파 승전보가 계속되었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흑련의 주요 근거지가 뿌리째 뽑혀나가고 있어서 세력 균형이 깨지고 있소.”
어차피 상관없는 일 아니던가? 우설금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운중산 전투가 끝났소.”
운중산은 독군과 자하검존의 싸움이다. 마교에서도 꽤 관심을 두던 곳이다. 물론 우설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주석하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였다.
다만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묵천마령의 말을 기다렸다.
“아쉽게도 독군도 자하검존도 죽지 않았소. 그들의 싸움은 불발되었고 독군은 유유히 포위망을 탈출했소. 화산파와 점창파는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본 듯하지만.”마교가 원치 않던 결과였다. 마교에서는 둘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죽기를 바랐다. 화산파와 점창파의 세력이 무뎌졌으니 그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려나.
우설금은 주석하의 안위를 묻고 싶어 애가 달았다. 그의 무공으로 보면 별다른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 아닌가. 특히 자하검존이라면 심기가 보통이 넘는 자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를 관찰하던 묵천마령이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포위망 탈출 일등공신은 흑검서생이었소. 정파 연합에서는 흑검서생을 전혀 막지 못했소. 최근의 결과로 보면 흑검서생의 무공은 이미 흑도팔군의 경지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고. 자네는 흑검서생을 직접 봤었지? 그대의 평가는…….”
“그는 강해요. 흑도팔군보다.”
우설금은 분명하게 의견을 밝혔다.
묵천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천마께서도 같은 생각이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소? 그런 강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데 그 연유를 잘 모르겠단 말이지. 게다가 천마께선…… 그를 주목하면서도 현재까지 전혀 제재하지 않아. 자유롭게 놀도록 내버려 두고 있단 말이오. 이유가 뭐라 생각하오?”우설금도 생각에 잠겼다. 주석하의 안위와 관련되어 있으니 어쩌면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주석하는 천마가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피라미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피라미가 아닌 잠룡이 됐다. 적이라면 슬슬 목을 칠 시점이고 아군이라면 오른팔로 끌어들일 시점이다.
- 당분간 녀석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다만 그를 잘 살펴 보거라.
과거에 그녀에게 떨어졌던 천마의 명령이 생각났다. 그때 이후 그녀는 북해를 함께 여행하면서, 덕양에서 흑검문을 보호하면서 계속 주석하와 관련된 보고를 올렸다. 물론 천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천마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주석하가 염려된다. 천마의 눈 밖에 나면 주석하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보호하고 싶었다.
내면의 감정이 격동을 일으키는 상황에도 우설금의 안면은 고요했다.
“이상하게도 천마께서 그 녀석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소.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없는데.”
“천마의 뜻을 읽으려는 것은 불충입니다.”
우설금이 딱 잘라서 말했다.
묵천마령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물론 알고 있소. 하여튼…… 조만간 마교칠왕이 중원으로 나가게 될 것 같소. 아마 중원과 마교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거요. 당연히 우리가 이기겠지. 지금 중원에는 변변찮은 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예전에는 우설금도 이를 바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약간 머뭇거려진다. 마교가 중원을 치는 순간 주석하와 그녀는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와 부딪히기는 싫었다.
“……당신은 복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