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무극천존 (2)
질문을 던진 묵천마령의 어조는 조심스러웠다. 우설금의 복수에 대한 집착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야죠. 마교가 중원에 입성하는 순간 저는 소림사로 달려갈 겁니다.”
우설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럴 줄 알았소. 당신은 오로지 복수만을 생각하며 정진했으니까. 중원 최강고수인 반야불존도 당신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요. 그는 당신의 원수가 된 것을 후회할 거요.”묵천마령은 그동안 사심 없이 우설금을 밀어주었었다. 금천마령이나 은천마령은 지나치게 천마의 총애를 받는 그녀를 경계했으나 묵천마령만은 그렇지 않았다.
우설금은 반야불존을 떠올렸다. 득도한 고승의 흉내를 내는 그 얼굴 뒤에 위선이 숨어 있었다. 그런 자비로운 얼굴로 그녀의 부모를 죽였다고 했었지.
불존을 떠올리는 순간 우설금에게서 걷잡을 수 없는 마기가 피어올랐다.
묵천마령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원한을 삭일 줄 모르는군. 이제 나이가 들어 진중해졌나 했더니. 어쨌든 조만간 중원으로 달려갈 일이 생길 듯하니 준비 잘해두시오.”
“감사합니다. 소식 고마워요.”
우설금은 묵천마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미소를 머금고 묵천마령이 대청을 떠났다.
반야불존은 그녀의 삶의 최종 목표였다. 부모를 죽인 원수,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녀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마교가 중원에 입성하는 날, 마교칠왕이 정사 연합군과 결전을 벌일 때 그녀는 소림사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천마도 분명히 이를 허락할 것이다.
이 순간 중원이 그녀에게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원수인 불존이 거주하는 곳이자 그녀의 연인인 주석하가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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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낯설었다. 길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운남으로 갈 때 주석하는 도수, 유비연과 함께했다. 돌아가는 귀갓길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유비연과의 관계다.
가는 동안 비록 그들은 견해가 달랐으나 즐겁게 의견을 나누고 모든 행동을 함께했다. 지금은 함께 움직이는 게 전부다. 유비연은 입을 다물었고 주석하도 말을 걸지 않아 매우 서먹서먹해졌다. 애꿎은 도수만 이를 해결해보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씨! 오늘 또 노숙이야?”
불평을 쏟아내는 도수에게 주석하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경공을 써서라도 객잔까지 부리나케 뛰어가서 편한 잠을 잤을 것이다. 지금은 그게 힘들었다. 그들에게서 몇 걸음 축 처져서 따라오는 유비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이 경공으로 뛰어가면 그녀도 죽자사자 따라오긴 하겠지만 어쨌든 한 사람이 처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동 속도가 느려졌다. 솔직히 바쁜 일도 없기에 서두를 생각도 없었다.
“근처에 객잔이 없어.”
“그게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걸어서…….”
불평을 쏟아내던 도수가 저쪽에 멈춰선 유비연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이가 틀어진 두 사람 사이에 기름을 부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도수는 유비연의 의사를 물었다.
“여기에서 노숙할 건데…… 괜찮아요?”
“네.”
유비연이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주석하와 유비연을 번갈아 보며 도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다.
유비연이 어떤 여인인가? 무려 천상삼화 아닌가. 어디에 내놓아도 절대 미모가 떨어지지 않는 여인이다. 거기에 그녀는 성격도 나쁘지 않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흑도인 주석하를 잘 이해한다.
게다가 지금 유비연은 남장을 완전히 벗고 여장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숨겨진 미모가 활짝 폈다.
무려 그런 여인을 주석하가 왜 마다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독군과 헤어진 후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다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박하는 수준이다. 그걸 고스란히 감내하는 유비연도 이해할 수 없고.
‘이래서 남녀 사이는 답이 없구나.’
도수는 이해를 포기하고 잠잘 곳을 마련했다.
그래도 모닥불은 피워야겠지. 무림인이라 딱히 필요하지 않더라도 모닥불을 피우면 운치가 살아나는 법이다. 혹시 주석하와 유비연의 관계개선에 도움이 될까 하여 도수는 재빨리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다.
“하아! 친구인 게 죄다, 죄!”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내리고 그들 앞에서는 따뜻한 불꽃이 바람에 춤을 췄다. 주위는 고요하고 오가는 인적은 없었다.
“분위기 좋고…….”
도수는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 앉은 두 사람을 힐끔 보며 한참 고민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워주면 혹시나 둘이 조금은 붙어 앉으려나?
‘크크, 내가 자리를 비워주면…… 야밤에 단둘이 사고 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지.’
도수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났다.
“주변에 먹을 과일나무 있나 둘러보고 올게.”
도수는 두 사람이 대답하기도 전에 서둘러 떠났다.
제법 멀리 떨어져서 감나무 위로 올라갔다. 물론 겨울이라 가지에 매달린 감은 없다. 도수는 기감을 끌어올려 염탐했다. 둘이서 부둥켜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없고 하다못해 분위기만 좋아져도…….
“여전히 제 사부를 미워하시나 보네요.”
“자하검존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사부님이 과도하게 정파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어서 그렇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도란도란 두 사람의 논쟁이 들려왔다.
도수는 앙상한 감나무 가지를 노려보며 태평스럽게 중얼거렸다.
“남녀 사이란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이니까…….”
목소리를 낮춰 나지막이 들려오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주 공자도 다르지 않아요. 그날 몇 사람이나 죽였는지 알아요? 당신이 퉁소 소리로 죽인 대부분 사람은 문파의 말단이었어요.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당신이 죽였다고요.”
“정파는 다른 줄 아십니까? 덕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출정식을 열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흑검문도라고 참수당했어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게 청운괴도 팽두석이 한 짓이라고요!”
“주 공자! 그래서 백호문과 검우방을 박살 낸 건 잘한 짓이고요?”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살인마!”
“살인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아요!”
“대체 당신이 덕양에서, 운남에서 죽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세어 봤어요?”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젠장! 저 인간들 답 없네. 왜 사랑의 밀어와 육두문자를 구분 안 하냐고!”
아무래도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 도수는 역시 남녀 문제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무를 내려가려 할 때 갑자기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감히 네놈들이!”
“흐흐! 너희는 이제 독 안에 든 쥐야!”
“우리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공터에 대충 열 명가량 되는 자들이 세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조용한 곳이라고 노숙 장소로 잡았더니 그마저 실패한 듯했다.
‘으아, 이건 또 뭐야? 되는 일이 없어!’
허탈한 한숨을 푹푹 내뱉으면서 도수는 나무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붉은 적의를 입은 세 사람은 이남일녀였다. 대충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고 꽤 반듯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그들을 포위한, 청의인들은 연령대가 다양했다. 그들은 세 사람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흐흐, 우리도 네놈들을 그냥 살려둘 생각이 없다. 당금 무림에서 우리가 네놈들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욕할 자는 아무도 없어!”
“간악한 놈들!”
“흐흐, 그게 모두 네놈들이 평소에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지.”
“절대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지금은 사파를 처단하는 시대다. 정파의 이름으로 너희를 단죄해주마!”
청의인들이 중앙의 적의인 셋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무공이 비슷했는데 숫자가 청의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도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이놈들도 정사로 갈라져 싸우는 모양인데? 요즘은 어딜 가나…….”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지금 주석하와 유비연이 정파 사파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데 이들마저 같은 문제로 싸우고 있으니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그냥 모른 척 이들이 떠나줬으면 좋겠는데 싸움 양상을 보니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소곡주! 도망쳐요!”
적의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막는 순간 여인이 순식간에 포위망을 뚫었다.
청의인 일부는 계속 상대를 압박하면서 일부는 도망친 여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망했군.”
여인이 도망치는 방향을 확인한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얼른 주석하에게 달려갔다.
“사, 살려주세요!”
모닥불은 본 적의 여인이 주석하와 유비연에게 뛰어들었다.
말다툼을 벌이던 주석하는 뜻밖의 침입자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적의 여인은 주석하와 유비연의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전 광천곡 사람이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몰려든 청의인들을 피해 주석하의 뒤에 숨으면서 정신없이 여인이 말을 내뱉었다.
주석하는 안면을 찡그렸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기 싫어서다.
반면 유비연은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적극적으로 적의 여인을 감쌌다.
“낭자 이름이?”
“광천곡의 악홍아예요.”
“아, 악 낭자…….”
유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쭉 늘어선 청의인을 노려봤다. 물론 그녀는 광천곡을 전혀 몰랐다.
“당신들은 누구죠?”
“우리는 사마세가 사람들이다. 광천곡을 처단하러 왔다!”
“아! 사마세가…….”
유비연은 사마세가를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오대세가에 들 만큼 큰 세력을 가진 곳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파에서 꽤 유명했다.
유비연이 알아보자 청의인들이 기세등등해졌다.
“알면 꺼져라! 개입하면 사파를 돕는 것으로 알고 함께 죽이겠다!”
그제야 주석하는 상황을 꿰뚫었다.
최근에 무림맹에서는 대대적으로 사파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귀조궁을 무너트리고 하남과 호북 일대를 평정했다. 그 여파가 이곳까지 번졌다.
곳곳의 정파 문파들이 부근의 사파 문파를 공격했다. 무림맹에서 명분을 제공했기에 정파에서는 평소 눈엣가시였던 사파 문파를 처리할 기회를 잡았다.
지금 사마세가와 광천곡도 유사한 상황이었다. 같은 지역에서 서로 경쟁하다가 최근의 조류를 타고 사마세가가 광천곡을 공격한 것이다.
주석하는 유비연의 다음 행동이 궁금했다. 과연 그녀는 누구의 편을 들까.
광천곡의 악홍아는 덜덜 떨면서 주석하의 뒤에 숨었다. 지금 이 두 사람이 정파인지 사파인지에 따라 악홍아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그 사이 사마세가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들은 적의인 두 남자를 포박하여 끌고 왔다. 기세가 오른 사마세가 사람이 악홍아를 향해 외쳤다.
“악홍아!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다!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소곡주! 절대 안 됩니다! 얼른 도망가세요!”
붙잡힌 적의인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악홍아의 신분이 예상과 달리 꽤 높았다.
사마세가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석하를 비롯하여 세 사람을 포위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거들먹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나는 사마세가의 소가주인 정의검 사마륜이다. 너희는 누구냐?”
주석하와 유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사마륜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정의검이라는 별호는 더욱 거슬렸다.
모닥불에 비친 유비연의 외모를 확인한 사마륜의 안면에 음탕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것들도 사파인가 보네.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