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무극천존 (3)
지금까지도 정중하지 않았던 사마세가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그들은 주석하와 유비연을 사파인이라 확신한 듯 안하무인 태도로 빈정댔다.
“별호가 정의검이라고요?”
보다 못한 유비연이 안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흐흐, 내 별호를 듣더니 놀랐구나. 정의검이 중원에서 꽤 유명하기는 하지. 물론 내가 사파 놈들을 쥐잡듯이 잡아서 붙은 별호다!”
유비연은 사마세가와 정의검의 평판을 되새겼다. 무림에서 손꼽는 강자는 아니지만 제법 이름 있는 자였다.
“이게 정의로운 짓인가요?”
유비연의 항의는 곧바로 씹혔다.
“사파가 할 말은 아니지? 순순히 내 말을 따른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지금은 정파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다!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사마륜은 경고하며 연신 유비연의 자태를 훑었다.
유비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석하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주석하와 유비연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파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무뢰한 때문에 체면을 구긴 유비연과 그런 그녀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지켜보는 주석하였다.
그런 머뭇거림 때문에 사마륜은 이 두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사파라고 더욱 확신했다.
유비연의 뒤에 숨어 있던 악홍아도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미안해진 그녀는 난처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저 때문에 두 분이…….”
“아닙니다. 낭자는 잘못이 없어요.”
유비연은 악홍아를 위로한 후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때 저쪽에서 도수가 나타났다.
“이거 뭐야?”
도수는 평소처럼 거칠게 사마세가 사람들을 노려보며 장내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석하와 유비연이 말다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처리하겠다고 다짐한 상태였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사마륜이 가소롭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은 또 뭐야?”
“허허, 입이 험한데?”
“생긴 건 어떻고!”
번쩍!
입보다는 검이다! 자객 특유의 쾌속무비한 검법이 어둠을 갈랐다.
서걱-
“크윽!”
사마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베어져 피가 뭉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언제 공격받았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허어? 이 자식 초절정 하수였네? 그것도 못 막아?”
도수가 빈정거리며 검에 묻은 핏물을 툭툭 털었다.
“죽여라!”
사마륜이 가슴을 붙잡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와아!”
사마세가 사람들이 우르르 도수에게 몰려왔다. 그들은 숫자를 믿었기에 그 누구도 도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 도수가 방금 보여준 쾌검을 제대로 인지한 녀석도 없었다.
서걱-
녀석들의 검이 사방에서 몰려든 순간 도수의 검이 다시 빛을 발했다. 순식간에 팔다리가 떨어져 허공에 던져졌다.
“허억!”
사마륜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찰나에 벌어진 장면은 현실이 아니었다. 부하들이 어느 순간에 모두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사실상 사지가 절단되었기에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이 났다고 봐야 했다.
“으으으!”
“내 자비에 감사해라! 내 친구들은 나보다 더 독하거든.”
도수는 고민 없이 장난치듯 검을 휙휙 저었다.
장내에는 오직 사마륜만이 제정신으로 똑바로 서 있었다. 물론 그도 가슴의 부상 때문에 온몸이 피투성이이긴 했다.
“가, 감히 사마세가를 건드리다니!”
“사마세가가 뭐라고…….”
순식간에 도수가 정리해버리자 주석하는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면서도 씁쓸했다. 솔직히 유비연이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던 차였다. 물론 그녀라면 이런 식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세가 사람들을 잘 타일렀으려나? 그건 위선 아닌가.
주석하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유비연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고, 고맙습니다.”
엄청난 기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악홍아가 후다닥 뛰어나와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곧바로 동료 두 사람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혼이 나갔던 사마륜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든 목숨을 건지려면 빨리 도망쳐야 했다.
“네, 네놈들! 움직이지 말고 여기 딱 있어! 내가 엄청난 고수를 데려온다! 우리 사마세가가 어떤 곳인지 알아? 사돈에 팔촌까지 고수가 즐비하다고!”사마륜이 호언장담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물러났을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형제, 굳이 갈 필요 없네.”
사마륜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뒤에 나타난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생사가 판가름 나는 순간이었다.
어둠을 뚫고 한 도인이 나타났다. 나이가 대략 육십가량 되었을까. 반백의 하얀 머리와 긴 수염이 선풍도골의 풍모를 그려냈다. 연청색 도포가 모닥불에 비치는 모습은 실로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증명했다. 손에는 긴 장검을 쥐고 있어 무림인이 확실했다.
“다, 당신은…….”
사파가 아닌 정파 인물이라 확신한 사마륜의 안면이 그나마 풀렸다.
도인은 사마륜을 상대하지 않은 채 모닥불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실로 위압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이 기운은 그가 상상하기 힘든 반열의 고수임을 짐작하게 했다.
도인을 확인한 유비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 무극천존!”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장내의 모두가 경악했다.
무극천존! 바로 현 무림맹주가 아닌가. 난데없는 중원 변방의 산골짜기에 무려 중원을 지배하는 무림맹주가 등장하다니! 이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사마륜도 마찬가지로 얼이 빠졌다. 사돈 팔촌까지 뒤져 고수를 데려오려 했더니 갑자기 무림맹주가 도우러 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방금 그가 죽이려 했던 저 일남일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무림맹주가 노리는 걸까?
‘무림맹주? 내가 미쳤지…….’
일개 무명인 그가 감히 무림맹주와 만날 일이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있을까. 그런 무림맹주가 노리는 녀석을 건드리려 했다고?
‘내가 미쳤지.’
사마륜은 현실을 직시하고 꼬리를 팍 내렸다.
무극천존이 온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짐작이 옳다면 그대 두 사람은…… 흑검서생과 설매검화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마륜의 턱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변방이라도 두 사람의 별호를 모를 수 없다.
“그렇습니다만 맹주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유비연이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마음이 선한 자는 오지 않는다. 즉 무극천존이 좋은 일로 왔을 리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저자는?”
무극천존의 시선이 한쪽 옆의 도수를 향했다.
“난 도수…… 아니, 암천살검이오.”
“암천살검? 그건 암군의 독문 무공 아닌가?”
“영광스럽게도 암군께서 친히 내게 암천살검이란 별호를 하사하셨소.”
“암군의 제자로군.”
무극천존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주석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는 피식 비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나도 이제 유명인사야!”
“그렇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무극천존의 말투는 고저의 변화가 없었다. 높낮이가 없는 묵직한 어조가 묘하게 가슴을 압박했다. 세상을 달관한 도인다웠다.
주석하는 머릿속으로 예전에 만났던 반야불존을 떠올렸다. 당시 반야불존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무극천존도 그에 못지않았다. 하긴 그런 사람이니 무림맹주가 되었겠지.
유비연이 급히 끼어들었다.
“맹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야밤에 오셔서 사람을 핍박하시다니요!”
“그대는 자하검존의 제자가 아니었나? 살인마에게 붙다니 창피한 줄 알거라!”
“대체 그게…….”“지금이라도 뉘우치고 석고대죄하라!”유비연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화산파라는 도가 문파에 속했고 무극천존 또한 무당파라는 도가 문파 소속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무극천존을 사문의 스승처럼 숭배했었다.
무극천존이 무림맹주를 맡았기에 지금의 정파가 수호된다고 생각했고 그의 탁월한 무림맹 운영을 존경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놈이 등장하면서 무림의 질서가 망가졌다. 저놈은 패존, 살존, 광존, 묵존을 죽였고 당문을 멸문했다. 그뿐인가? 이번에는 독군 암살을 방해했다. 모두 저놈이 한 짓이다. 저놈이 없었다면 정파는 이미 무림질서를 확보하고도 남았어!”무극천존의 입에서 주석하가 저질렀다고 짐작되는 모든 행동이 토해졌다. 단기간에 저만큼 많은 사건을 저지른 자가 무림사에 또 있었을까.
주석하는 기가 막혔지만 굳이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 사건들은 오히려 정파가 도발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주석하가 삐딱한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오늘 이 자리가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정파가 무림을 제패하려고?”
“이놈이!”
“오호! 능력은 있는지 모르겠네? 내 앞에서 맹주라고 우겨봐야 쓸모없는데.”
주석하는 건들거리면서 흑검소를 만지작거렸다.
상황이 급전직하로 치닫자 유비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려 무극천존과 주석하가 싸우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쪽도 다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맹주님! 이런 식으로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넌 이제 정파인이 아니다. 자하검존께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무극천존의 선언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과연 그랬던가. 정파에 협조하지 않으면 정파인이 아니었던가. 정의와 협의를 추구하는 자가 정파인이 아니라 무림맹에 협조하는 자가 정파인이었던가.
유비연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새삼 방금 주석하와의 말다툼이 생각났다. 사람을 죽인, 생명을 멋대로 죽인 주석하가 잘못했다고 믿었던 그녀가 바보였던가. 사부인 자하검존이 답답했었는데 무림맹주인 무극천존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이 무림맹주가 진정 협俠)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유비연은 새로운 숙제를 안게 됐다.
주석하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무극천존 옆에 두 사람이 유령처럼 등장했다.
무림맹주를 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암중 호법! 이들은 소림과 무당에서 한 사람씩 파견한 장로로 무림맹 이대 호법이라 불렸다. 무림맹에서는 이들을 불호佛護)와 도호道護)라 했다.
무극천존을 양쪽으로 호위한 이대 호법의 위용이 숨 막히게 했다.
‘대단하군!’
주석하는 정파십존의 새로운 진실을 깨달았다. 십존이라 하여 모두 같지 않다. 반야불존이 십존 가운데 최강이라는 평이 있었으나 모두 무공 수준이 비슷하다고 알려졌었다. 사실 십존이 서로 대결한 적이 없었기에 그 우열을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무극천존과 맞선 순간 주석하는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무극천존의 무공은 살존이나 패존과 동급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
지금 무림맹주 옆에 있는 이대 호법의 무공이 살존이나 패존과 엇비슷하게 느껴졌다.
정파십존과 흑도팔군. 그 차이는 컸다. 다른 사람들은 비슷할지 몰라도 적어도 반야불존과 무극천존만큼은 달랐다. 그들 두 사람은 다른 기인에 비해 한참 위에 존재하는 천외천이었다.
이제야 균형이 얼추 맞는 기분이었다.
우설금의 무공 수준이 흑도팔군이나 정파십존을 능가했음에도, 또 그런 수준의 무공을 지닌 자가 마교에 널려 있었음에도 마교가 쉽사리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이유를. 중원 정파의 세력은 예상외로 강했다.
굳어진 주석하의 표정을 본 무극천존이 묵직한 목소리로 재차 경고했다.
“이게 전부라면 섭섭하겠지.”
언제부터일까.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포위망을 형성한 그림자가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