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무적멸사대 (2)
순간 장내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팽팽하게 접전을 이루던 전장이 순식간에 기울었다.
독에 직접 노출된 무적멸사대는 흩어지며 독을 경계했다. 이미 일부는 독에 중독되어 내공을 일으키기 힘든 상태였다. 당연히 주석하를 둘러쌌던 포위망도 망가졌다.
주석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독공은 그의 주무기가 아니다. 교착된 전선을 돌파하는 수단일 뿐이다.
주석하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이고 흑검소가 잔인하게 허공을 갈랐다. 독에 당황한 무적멸사대는 그의 공격을 견딜 상황이 아니었다.
서걱-
검강이 번뜩이면 사지가 잘려나갔다.
“놈을 막아라!”
함성과 함께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으나 주석하는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기회를 잡았으니 끝을 봐야 한다.
서걱-
하얀 검강이 빛이 되어 날아간다. 그 빛은 걸리는 것이라면 무조건 파괴한다.
그 끝에는 여지없이 피가 튀고 있었다. 처참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후우, 상대의 목을 노린다면 언제든 자신의 목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하는 법!”
주춤거리는 적을 향해 주석하는 일갈을 퍼부었다.
단 한 번의 독공과 이어진 흑검소의 검강에 복잡했던 전투가 막을 내렸다.
열여섯 가운데 무려 여덟이 사실상 전력 외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죽었고 나머지는 손발이 잘렸다.
당연히 멀쩡해 보이는 여덟 명의 전사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에 중독되어 내력 순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 잔인한 놈!”
무적멸사대의 반응이 나오든 말든 주석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향해 걸어갔다. 겁에 질려 한발 물러나는 적을 흑검소가 여지없이 꿰뚫었다.
푸욱-
“으아악!”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또 한 사람이 저승으로 떠났다.
주석하의 시선이 그 옆의 무적멸사대원에게 향했다. 그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경고가 머리를 스치자 시선을 받은 자는 뒤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무림맹주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도망칠 용기도 없었다.
푹!
흑검소의 검강이 녀석의 가슴을 후벼팠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저항하지 못하는 적의 목숨을 끊었다.
“대마두가 되리라던 만사지존의 장담이 정말이구나.”
무극천존의 표정도 질려 있었다. 무적멸사대가 이렇게 쉽게 붕괴할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었다. 지금까지 무림의 대소사를 관장하면서 무적멸사대는 이름 그대로 무적이었다. 그런 친위대가 의외로 쉽게 무너지다니.
사실상 무적멸사대의 숨통을 자른 주석하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내가 잔인하다고? 무적멸사대가 나를 죽였어도 잔인하다고 했을까? 여럿이 한 사람을 공격해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주석하의 조소에 무극천존은 곧바로 반박했다.
“네놈은 무림을 어지럽히는 악마다!”
“누가 악마인지 하늘에 가서 물어보아라!”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주석하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검은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놈은 악마다! 질린 표정의 무극천존을 보호하려고 두 호법이 막아섰다.
그때 유비연이 급히 중간으로 날아들었다.
“안돼요!”주석하는 유비연을 쓱 훑어봤을 뿐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주석하의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물씬 뿜어졌다. 이번에는 염군의 내공이 그의 전신을 채웠다. 지금 그의 모습은 화염을 동반한 거대한 악마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놈이구나!”
무극천존이 고개를 젓는 사이 위험을 감지한 불호와 도호가 주석하를 공격했다.
불호의 선장과 도호의 불진이 주석하의 요혈을 노리고 들어왔다.
순간 주석하는 선장을 흑검소로 튕겨내고 불진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어?”
도호가 놀라는 순간 주석하는 불진을 향해 내력 일부를 밀어 넣었다. 둘의 합공을 가장 쉽게 파훼하는 수단은 한쪽을 무력화하는 방법이다.
화르르르-
순간 뜨겁게 달구어진 불진에 불이 붙으면서 순식간에 도호의 손으로 번졌다.
“으악!”
놀란 도호가 재빨리 불진을 손에서 놓으려 했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불꽃이 도호의 팔을 타고 올랐다.
도호는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주석하는 마치 악마처럼 타오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화염이 주석하의 팔을 타고, 불진을 타고, 도호의 팔로 번졌다.
화르르르-
“크으윽, 무슨 무공이…….”
견디다 못한 도호는 스스로 한쪽 팔을 잘라냈다. 간신히 지혈까지 마친 도호가 휘청거리면서 무극천존 옆으로 돌아갔다. 처참한 패배였다.
그사이 주석하는 공격해 들어오는 불호의 선장을 몇 차례 추가로 막았다.
“극양염천신공! 정말 흑도팔군의 무공을 다 익힌 건가!”
무극천존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여러 정보를 통해 말을 많이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 한 사람이 모든 무공을 극성으로 연성할 수는 없다. 특히 염군과 빙군의 무공은 상극이다. 효율 면에서 따지더라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크크크,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싸움을 걸어왔으니…… 끝을 봐야지!”
주석하는 비웃음을 토했다.
비록 무적멸사대와 이대 호법을 상대하느라 내공을 쏟아부었다지만 주석하는 여전히 충분한 내력을 품고 있었다. 아직도 무극천존과 지구전을 펼친다면 지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당연히 주석하의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극천존은 마르지 않는 그의 내공에 두려움을 느꼈다. 알면 알수록 더 괴물 같은 존재였다.
무극천존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곳에서 주석하와 끝장을 볼 것인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것인가. 끊임없이 새로운 무공을 토해내는 주석하를 상대하기는 왠지 껄끄럽다. 그런데 내일이 되면 더 강해져서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지금 목숨을 걸고 녀석을 잡아야 할까. 무림맹주인 자신이 죽으면 무림은 대혼란에 빠지고 정파는 일거에 폭망한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도 그는 목숨을 버릴 수 없다. 무림맹주의 목을 이런 사파 녀석의 목과 비교할 수 있나.
무극천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 작전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무적멸사대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적어도 놈의 힘이라도 빼놓을 줄 알았는데 제대로 한 것이 없다.
“맹주? 꼬리가 말렸네?”
“이놈이!”
무극천존은 떠밀리듯 내력을 끌어올렸다.
무림맹주로서,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저런 도발을 참을 수 없다. 동귀어진하는 일이 있더라도 저놈을 죽여야 한다. 저자는 악마의 화신이니까.
으드드득-
무극천존과 주석하가 서로를 노려봤다.
양쪽 모두 상대를 잡아먹을 듯 한껏 내력을 부풀렸다. 무림사에 길이 남을 대결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무극천존이 이대 호법의 보호를 받으며 앞으로 내딛는 순간이었다.
“멈추게!”어둠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주석하는 그 인물을 확인한 순간 반색했다. 이곳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 무슨 일이지?
“뇌군? 자네는 어떻게…….”
무극천존이 눈을 찌푸렸다. 뇌군은 사파 인물이다. 지금 주석하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판에 뇌군마저 등장했으니 순식간에 균형이 확 기울었다.
뇌군의 무공이 대단치는 않지만 그래도 흑도팔군의 일인이다. 게다가 그는 진법 능력이 무척 뛰어나 쉽사리 상대하기 어렵다.
무극천존의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길보다 흉이 많다.
뇌군이 다가오자 주석하는 한껏 끌어올렸던 내력을 천천히 복귀시켰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장내에는 모닥불 타는 소리만 은은하게 들렸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주석하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뇌군은 무극천존에게 경고했다.
“이만 돌아가시오. 갈 수 있을 때.”
무극천존의 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우니 이성적이라면 뇌군의 제안을 따르는 게 옳다. 다만…….
주석하와 뇌군 사이에 오가는 친밀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무극천존은 주석하라는 괴물을 길러낸 사람이 바로 뇌군임을 깨달았다. 과연 흑련의 군사로서 뇌군은 정파 최대의 적이었다.
“가세.”
무극천존이 이대 호법에게 눈짓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도호와 불호도 어쩔 수 없이 무극천존을 따랐다. 그나마 멀쩡한 무적멸사대 대원은 둘뿐이었다.
사마세가의 사마륜과 광천곡의 악홍아는 방금 목격한 상황에 입을 열지 못했다. 변방의 그저 그런 문파인 그들이 하늘처럼 우러르던 무림맹주가 물러서는 장면을 보다니!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기사였다.
“다, 다음에 보자!”
세 불리를 절감한 사마륜이 후다닥 사라졌고 악홍아를 비롯한 광천곡 사람들도 뇌군의 눈총에 주석하와 도수에게 감사를 표하고 사라졌다.
이제 장내에는 주석하와 뇌군을 비롯하여 유비연과 도수만이 남았다.
“잠시 이야기 좀 하세.”
뇌군이 주석하에게 눈짓했다.
주석하는 말없이 뇌군을 따라 한쪽으로 이동했다.
모닥불에서 꽤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뇌군이 입을 열었다.
“체내의 다섯 기운을 모두 운용할 수 있나?”
“그렇습니다.”
“성공하리라 생각지 않았는데 대단하군.”
주석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조용히 뇌군에게 주목했다. 축하하러 이 먼 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니.
“시간이 없어 요점만 말하겠네. 지금 무림에서는 정사대전이 국지적으로 벌어지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하북팽가의 흑검문 원정도 그런 맥락에서 전개된 사건이다. 물론 정사대전이 과거처럼 대규모로 발발하지는 않았다. 소규모 국지전 형식을 띠지만 어쨌든 정파와 사파가 칼을 들이대고 서로를 죽이는 국면이다.
“역사의 흐름은 네가 말했던 예전과 달라졌어. 하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일전에 주석하는 자신의 회귀 사실을 알리면서 죽기 전 오 년간 벌어졌던 주요 사건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는 전생에서 말단이었기에 핵심전인 정보를 알지 못해서 강호에서 벌어졌던 큰 맥락만 말해줄 수 있었다.
“그때처럼 정파가 압도하고 있죠.”
“그렇지. 비록 지금 정파가 끗발을 날리고 있다고 해도 그리 중요하지 않네.”
예상보다 뇌군은 여유로웠다. 흑련이 몰리고 있음에도 흑련의 군사는 전혀 다급한 표정이 아니었다. 물론 그 믿을 구석에 주석하라는 괴물이 있지만 정작 주석하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합니까?”
정파에는 무림맹이란 연합이 있고 무림맹주라는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존재한다. 덕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사파에는 흑련이란 연합이 있으나 흑련주는 없다. 흑련은 말 그대로 연합체일 뿐 상하 개념이 없다. 그래서 무림맹처럼 한 몸으로 움직이기 어렵다.
그렇기에 군사인 뇌군이 작전을 전하면 흑련 산하 문파들은 따르거나 말거나 제멋대로다. 통일성과 집중력이 부족하다.
“자네가 전생에서 내공을 얻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끊임없이 추측했네. 전생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흑도팔군 다섯을 설득하였다고 했잖나? 내가 왜 그곳에서 그런 계략을 꾸몄을까?”주석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도 짐작하는 바는 없다. 내력을 얻은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흑도팔군의 의지였고 굳이 따진다면 뇌군의 계략이었다. 그가 뇌군의 머릿속을 살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까.
“사람은 의외로 바뀌지 않네. 그때, 즉 지금보다 미래의 나는 현재와 큰 차이가 없었을 거야. 그때의 내가 그렇게 전략을 꾸몄다면, 지금의 나도 같은 여건이라면 그렇게 행동하겠지. 그래서 고민해봤네. 그때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나는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걸까.”뇌군의 말을 들으면서 주석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것은 그가 회귀한 이유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지금까지 짐작한 바는 배교의 무한회귀공 덕분이다. 아마도 무한회귀공을 뇌군에게 전한 자는 천마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천마는 그의 회귀를 알 것이다. 그런데도…….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분석했더니 하나로 귀결되더군.”
“그게 무엇입니까?”
특별한 내용이 튀어나오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설명해주는 이유가 언급됐다.
“나는 천마에게 복수하려 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