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무적멸사대 (3)
“천마는 제가 회귀자란 것을 알까요?”
“알겠지. 하지만 자네가 어떤 상태로 회귀했는지 모르는 게 확실해. 자네의 몸속에 다섯 기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몰라.”
뇌군의 이 말은 중요한 점을 시사했다.
주석하의 회귀를 비롯하여 이 모든 상황을 조율하는 천마도 놓친 부분이 있었다. 천마는 진정한 주석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 단지 뇌군이 선택한 회귀자란 사실만 알 뿐이다.
물론 주석하가 단순히 몸만 회귀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십만대산 아래에서 흑도팔군이 무공을 일부 전수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모든 내공을 때려 부은 전무후무한 내공임은 모를 것이다. 무림인이 자신의 내력을 전수한다는 것은 죽음과 같으니까. 보통의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제는 주석하도 안다. 그가 내력을 얻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보다 더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다. 비록 현재의 그들은 아닐지라도 주석하는 흑도팔군에게 많은, 중요한 것을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보통 사람들과 아주 달랐다.
이제 염군과 빙군은 죽고 없지만 다른 사람들, 혼군, 악군, 독군은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더불어 뇌군도. 아마 뇌군은 그때 자신의 내공을 모두 사용해서 그를 회귀시켰을 테니.
물론 이것이 그가 뇌군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정보를 집약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나는 천마에게 복수하려고 했을 거네. 그 복수를 자네가 성사해주기를 원한 거야.”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마가 누구인가? 마교의 교주이자 중원 무림인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자다.
현재의 주석하는 다섯 기운을 융합하지 못했기에 일순간 쓸 수 있는 단일 내공으로만 본다면 불존이나 천존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천마를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 없다는 듯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마교와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우설금 때문이기도 했고, 전생에서 겪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으며, 천마라는 괴물을 만나기 싫은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단지 그가 마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머지않은 미래에 세상은 마교 천하가 될 것이고 평화로운 덕양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으리란 예상 때문이다. 마교가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도 마교에 대적할 생각이 없다.
백화루주가 마교에 맞서서 뭘 하려고? 그런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물론 뇌군의 소원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원한을 해결하자고 목숨을 걸어야 하나?
주석하의 표정을 본 뇌군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네, 나도 알아. 자네도 당혹스럽다는 것을.”
“역시…… 그렇죠?”
“나도 자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네.”
주석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전 백화루주가 딱인데…….”“그래, 그래.”
뇌군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뇌군이 말을 이었다.
“사람에겐 주어진 사명이 있는 거야. 이를 천명(天命)이라 하지. 천명은 때로는 운명 또는 숙명이란 이름으로 사람을 얽어맨다네.”
당연히 주석하는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그런 것은 배가 불러야 생각나는 법이다. 어쩌면 백화루주가 된 후에 놀고먹다 보면 생각날지도?
“내가 장담하건대…… 자네는 새로운 길을 걸을 거야. 마교와 맞서는.”
“아니요, 절대로…….”
“그래, 그건 나중에 알게 될 일이고……. 내 예상은 틀린 적이 없거든. 어쨌든 자네는 앞으로 딱 하나만 해주게. 지금까지 자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주었으니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겠나?”뇌군에게 신세 진 일은 많다. 그도 사람의 도리를 따르니 무조건 거절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뇌군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다. 마지막 부탁이라니 못 들어줄 것도 없긴 하지만…….
“마교로 쳐들어가라는 부탁만 아니라면요.”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뇌군이 주석하를 응시했다.
주석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제는 예상 이상으로 성장한 그는 뇌군에게 매우 중요한 패가 됐다. 그가 없다면 사파는 바로 전멸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와의 관계를 망가트릴 제의는 뇌군이라도 하지 못한다.
“나의 마지막 목표는 자네를 무림 최강으로 키우는 일이야.”
“지금도…….”
대답하려다 주석하는 바로 입을 닫았다.
그는 강하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한가? 그렇지 않았다. 우설금만 해도 그는 승부를 자신할 수 없다. 지지 않으리란 믿음은 있지만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방금 겨룬 무극천존은? 현 무림 최강이라 칭송받는 반야불존은? 모두 껄끄러운 상대다. 거기에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천마도 있다.
그 순간 주석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몸속의 내공이 다섯 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 마지막 부탁은…… 반야불존을 찾아가게.”
“설마 불존을 죽이라고…….”
“아니, 단지 그를 만나보게.”
“예전에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와는 다를 걸세.”
뇌군의 내심을 짐작할 수 없었다.
주석하는 인자한 얼굴의 고승을 떠올렸다. 당시에 불존은 그에 대해 뭔가 아는 눈치이긴 했었는데…….
“괜히 만났다가 무극천존처럼 저를 죽이겠다고 하면 어쩌죠?”
주석하의 너스레에 뇌군이 피식 웃었다.
“그것도 자네의 운명이겠지.”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에요?”
“아니, 자네 좋을 대로.”
이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불존은 만나기 껄끄럽기에 주석하는 먼 훗날로 미룰 생각이었다. 죽기 전에 찾아가면 되겠지, 그때 불존이 이미 죽었다면 어쩔 수 없고.
주석하는 태평스럽게 생각하면서 뇌군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자네 왜 그러나?”
“뭔가 부탁하셨으면 대가도 있는 것 아닙니까?”
뇌군이 입을 쩍 벌렸다.
“허어, 맹랑하긴…….”
“그게 세상의 법칙입니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는 법이죠.”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하는 게 뭔가?”
바로 이 말을 기다렸던 주석하는 한껏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제 인생의 목표가 뭔지 아십니까?”
갑자기 심각한 주제가 등장하자 뇌군이 피식 웃었다.
“백화루 주인 아닌가?”
“그렇죠! 백화루! 백화루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기녀인가?”
“그렇죠. 꽃다운 미녀가 백 명이 있는 주루인데요…….”
“허어, 돈이 부족한가 보군.”
인생사에 통달한 뇌군답게 금방 주석하의 의도를 꿰뚫었다.
“헉! 어째 아셨습니까? 제가 인수하고 싶은데 수중에 돈이…….”
무공이 강해 봐야 돈이 모이지 않더라고 주석하는 하소연했다. 오히려 강호를 쏘다니면서 굶고 지낸다고, 불쌍하지 않냐고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들들 볶인 뇌군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네, 알았어. 내 부탁을 들어주면 바로 백화루를 인수할 자금을 주겠네.”
고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되자 주석하는 무척 만족했다.
“두말하시기 없습니다.”
“당연하지.”
뇌군에게 그 정도의 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순박한 주석하의 마음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가보겠네. 내 말을 명심하게.”
주석하가 허리를 숙였다가 폈을 때 뇌군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뇌군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다시 되새겼다.
만일 그가 무극천존과 생사결을 벌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패배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당한 부상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다. 그와 흑검문을 괴롭히는 원흉이니까.
그런데도 뇌군이 급히 제지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교 때문이군…….”
무극천존은 정파의 대표자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중원 무림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지면 중원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진다. 마교가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는 좋지 않다.
뇌군은 정파의 약화보다 중원 무림의 약화를 더 걱정했다. 주석하는 그렇게 좋은 뜻으로 해석했다.
모닥불로 돌아왔을 때 도수와 유비연은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잠은?”
“옮겨야지.”
도수가 투덜대며 대답했다.
하긴 피가 튀고 시신이 널린 곳에서 노숙하기는 어렵다. 주석하도 짐을 챙기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뇌군이 뭐래?”
“크크, 백화루 사준다더라.”
“정말?”
“내가 백화루주가 되면…… 네 앞에 기녀 백 명 딱 세워줄 테니까 기대해라.”
주석하가 낄낄 웃으며 대답하는 순간 그의 옆구리로 유비연의 칼집이 쿡 들어왔다.
도끼 눈을 뜬 유비연의 눈총에 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터 슬슬 유비연의 눈치를 봤다. 유비연의 표정이 무척 복잡해 보인다. 자하검존에 이어 무림맹주인 무극천존의 태도를 본 때문이다. 그를 죽이려고 나타난 무극천존을 그녀가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지 궁금했다.
만일 그녀 또한 무극천존의 생각에 동조한다면 유비연도 그의 목숨을 노리게 될까.
주석하는 유비연의 고뇌에 찬 옆모습을 슬그머니 힐끔거렸다.
아마도 그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
마교 총단의 연무장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다.
마교를 구성하는 교도가 이처럼 한곳에 모인 행사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소집에 의문을 표했고 곧이어 교주를 대신한 금천마령의 설명이 이어지자 환호성을 발했다.
마교도들이 뿜어내는 마기가 십만대산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마교여 부흥하라!”
“하늘이 내린 기인, 천마시여!”
천마를 향한 온갖 구호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금천마령은 마교의 중원진격을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변방인 십만대산에 숨어 있다시피 하던 마교도 모두가 흥분했다. 이제야말로 마교의 위세를 떨칠 기회가 왔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들의 기세는 중원을 함락하고도 남을 만큼 천지를 울렸다.
단상에서 천마가 마교도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마의 기운과 마교도의 마기가 호응하자 한층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단상 앞에서 군중을 향해 지침을 하달하는 금천마령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마교수호사령은 천마의 뒤에 호위하듯 일렬로 서 있었다.
은천마령, 묵천마령, 단천마령, 그들이 상징하는 은빛 옷과, 검은 옷과, 붉은 옷이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중원 침공의 선봉이자 마교도를 실질적으로 이끌 마교칠왕이 단상 아래에서 마교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향후 중원은 마교칠왕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경동할 것이다.
연무장에 정렬한 마교도를 바라보며 단천마령 우설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려서 무공을 연마할 때부터 이날을 목 놓아 기다렸었다. 마교가 중원에 입성하는 그날 그녀는 부모님 복수를 위해 소림사로 달려갈 계획이었으니까.
현재 중원에서는 소규모의 정사대전이 일어났고 정파와 사파는 모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기회를 놓칠 천마가 아니었다. 오늘 천마는 전격적인 중원진격을 명령했고 승산은 충분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왔건만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다. 웬일인지 모르게 중원 입성이 달갑지만은 않다.
물론 그녀도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 안다. 지금 중원으로 가면 필연적으로 주석하와 부딪히게 되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석하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출정 행사는 금방 끝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천마가 그녀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천마령! 이제 원수를 갚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