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백화루주 (1)
퍼뜩 정신을 차린 우설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반야불존의 목을 취할 겁니다.”
“으하하, 그래야지. 마교칠왕이 사도를 데리고 중원을 휩쓸 때 너는 소림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반야불존을 제거하라. 반야불존은 명실상부한 중원의 최강고수! 하지만 네가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마치 암시하듯 천마가 우설금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우설금은 다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천마는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두 관여해 왔다. 그녀의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
그녀의 부모이자 사부였다. 그런 천마가 그녀의 복수를 최우선으로 허락해주었다. 당연히 감격할 수밖에.
그렇기에 우설금은 천마 앞에서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었다.
“흑검서생을 어찌해야 합니까?”
물어보면 불리하다고 직감하면서도 그녀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묘한 눈빛으로 천마가 우설금을 쓱 훑었다.
“왜 묻느냐?”
“그도 죽여야 합니까?”
“흐음, 그가 마교에 대항한다면 당연히 죽여야 한다. 하지만…….”
천마의 안면에 흥미로운 표정이 어렸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마교에 귀화한다면 죽일 이유가 없겠지.”
우설금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렸다.
마교에 귀화라……. 주석하가 마교에 입교할 수 있을까. 정파도 사파도 따지지 않는 그의 성향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남에게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어려울 듯싶었다.
하지만 주석하와 부딪히지 않을 작은 가능성을 얻어냈기에 우설금은 정말 기뻤다.
천마가 돌아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
전생에서 마교 총단이 자리한 십만대산 절벽에 떨어졌을 때 주석하가 얻은 내공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 이 내공은 단전에서 잠자다가 가끔 그가 위험에 빠지면 생명을 보호하려고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이 다섯 내공은 그가 제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서로 융합되거나 화합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따로 놀았다.
그러던 차 혼군의 혼천신공을 익히면서 혼군의 내공을 제 것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차례로 관련 무공을 익히면서 이제는 모든 내공을 전부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이 다섯 내력 가운데 가장 심후한 내력은 염군의 것이었다. 빙군과 염군의 내력은 전생에서 얻은 양에 현생에서 추가로 흡수한 양이 더해져서 다른 내력 대비 두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압도적으로 그 양이 많았다.
다만 빙군의 내력 일부를 북해빙궁에 갔을 때 구양상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이제는 염군의 것만 다른 내력 대비 월등했다.
현 무림에서 내공의 일인자는 반야불존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다음 순위로 무극천존이나 빙군을 놓았기에 현재의 주석하는 설사 반야불존과 내력 싸움을 벌이더라도 절대 밀리지 않으리란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아쉽다면 이 다섯 내력이 모두 독립적이라 그 위력이 한정되었다. 만일 이 다섯 내력을 융합한다면 진정한 고금제일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수시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면서 주석하는 유비연, 도수와 함께 덕양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 목적을 이뤘기에 매우 편안한 마음이었다.
“이젠 백화루다!”
흑검문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 주석하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백화루?”
“내 인생의 목표잖아.”
도수의 질문에 뿌듯한 기분으로 대답하면서 주석하는 유비연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잠시 인상 쓰던 유비연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넘어갔다.
주석하를 좋아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인생의 목표가 주루 주인에 기녀 백 명을 거느리는 것이라는 남자가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다.
주석하는 운중산에서 유비연과 다툼도 있었던 데다 딱히 그녀의 비위를 맞추겠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거리낌 없이 백화루를 언급했다.
“그럼 이제 안 나돌아 다닐 거야?”
“아직 갈 곳이 한 군데 남긴 했는데…… 바쁠 일 있어? 대충 놀다가 답답하면 그때 여행 겸해서 가면 되는 거지.”
주석하는 뇌군이 요구했던 반야불존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중원 전역에 비하면 하남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북해나 대막에 비하면 코앞에 닿을 거리였기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주석하의 너스레에 유비연은 다시 안면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화산파에서 매우 성실하게 살아왔었다. 자하검존을 사부로 두었기에 다른 화산파 문하생보다 더 부지런하게 무공을 연마했다.
최근에는 강호를 떠돌며 협을 행하느라 바빴고 지금도 얼핏 주석하와 함께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를 감시하는 일이니 논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면서, 또 사부의 명을 수행하면서 살아왔건만 주석하와 비교하면 자괴감마저 들었다. 놀랍게도 주석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져서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녀의 상념을 주석하가 깼다.
“이제 다 왔는데…… 도수 넌 어떻게 할 거야? 다시 암흑단으로 돌아갈 거야?”
“당연히 가야지! 단 지금 바로는 말고!”
도수가 대답한 후 두 사람의 시선이 유비연에게 쏠렸다.
순간 유비연은 흑검문에 있을지 화산으로 돌아갈지 고민했다. 주석하가 흑검문에서 조용히 지낸다면 굳이 그녀가 옆에서 감시할 이유가 없다. 화산으로 다시 돌아갈 때인가…….
“나도 화산으로 돌아가야겠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되어 그렇게 말했다. 과연 돌아가도 자리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흑검문이 눈에 들어왔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온 기분은 꽤 감동적이었다.
주석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한차례 포효했다.
“내가 돌아왔다!”그의 외침이 들렸을까. 정문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왔다.
문을 지키던 흑검문 문도와 그 뒤로 주소은과 명아까지.
주석하는 주소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째 그를 노려보는 주소은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들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흑검문 문도가 창으로 그들의 진입을 막아섰다.
“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창을 손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나 흑검문 소문주야. 나를 왜 막아?”
그가 떠난 사이 하북팽가 같은 놈들이 또 쳐들어와서 흑검문을 점령했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주석하는 주소은을 바라봤다.
주소은이 허리에 손을 턱 올려놓고 눈썹을 쓱 올렸다.
급격히 싸늘해진 분위기에 주석하는 바로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굴렸다.
‘이건…… 흑검문에 변고가 생겼다는 건데? 소은이가 서슬 시퍼렇다는 것은…… 이건 십 년에 한 번 있을지 말지 한 사건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소은이 무엇 때문에 그를 경계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소은의 화난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오빠는 알았어? 몰랐어?”
“뭘?”
주소은이 유비연을 손으로 가리켰다.
불같이 화가 난 주소은의 표정을 접한 유비연은 자신의 남장이 들통 났음을 깨달았다. 눈을 마주친 명아가 재빨리 주소은의 등 뒤로 숨는 것으로 보아 범인이 명아임이 확실했다.
“유…… 소협이 왜?”
주석하가 말하는 순간 주소은이 주석하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으악!”
물론 다리는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철이 들고 처음으로 누이동생에게 맞은 주석하는 당황했다.
“나, 나도 몰랐어.”
주석하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모르긴 뭘 몰라? 얼굴 보니 다 알고 있었다는 반응인데. 그렇게 나를 놀리면 재밌어?”
재차 주소은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허억!. 유, 유 낭자! 낭자가 해명을 좀…… 으악!”
주소은이 주석하의 머리채를 붙잡고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주석하는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저 여우가 오빠를 홀리려고 따라다니는 거잖아? 나랑 말 좀 하자고!”
주소은이 거침없이 주석하를 데리고 안으로 사라졌다.
도수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우와! 무림맹주도 함부로 못 다루는 녀석을 한방에 휘어잡는 사람이 있었어!”
심기가 불편해진 유비연이 째려보자 도수는 바로 입을 닫았다.
어쨌든 유비연의 눈총을 견디느니 대신 해명하겠다는 생각에 도수도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문 앞에 남게 된 유비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문을 통과하려 했다.
“당신은 출입금지입니다.”
문지기 둘이 그녀의 진입을 막았다.
기가 막힌 유비연은 주석하가 사라진 곳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주소은이 화가 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주소은은 그녀에게 유달리 잘해주었다. 가끔 그녀를 남자로 착각하고 잘해주는 게 아닌지 의심하긴 했었지만 의심을 지웠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성의 사랑을 받아보거나 사랑한 적이 없어 그런 감정에 서툴렀다. 그래서 주소은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최근에야 그녀도 주석하를 만나면서 어떨 땐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을 경험하긴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아직은 미성숙한 상태였다.
남자였던 그녀가 난데없이 여자로 둔갑했으니 주소은의 충격이 작지 않았으리란 생각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사과해야겠어…….”
유비연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일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설사 그것이 주소은의 일방적인 착각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그런데 방금 주소은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혀 끌려가던 주석하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었다. 무림에 이처럼 흥미로운 집안이 또 있을까. 정파십존을 벌벌 떨게 하던 초강고수가 누이동생에게 붙잡혀 혼나는 모습이라니.
역시 흑검문은 문파가 아닌 가족이었다. 때 아닌 따스한 가족애를 만끽하며 유비연은 자신을 돌이켜봤다.
그녀도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어릴 때 고아가 됐고 화산파에 입문했다. 그 이후로는 사형제들과 엉켜 무공을 익히며 자랐다.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하검선의 제자가 되어 화산파의 주요 인물이 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는 화산파에서 가족의 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스승과 제자, 사형과 사매, 사저와 사제로 이어지는 딱딱한 생활. 지금까지 그게 최선이고 모든 것인 줄 알았다.
갑자기 주석하가 말도 못 할 만큼 부러워졌다.
그녀도 저렇게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늑대를 조심하라며 감싸주는 친오빠나, 여우를 조심하라며 충고하는 동생이 있다면…….
“하아!”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사부를 떠올렸다. 항상 사무적으로 대했던 자하검존이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고 그 엄격한 사제 관계가 더없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운중산에서 틀어진 사제 관계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유비연은 자신을 막고 선 문지기 두 사람을 쓱 쳐다봤다.
그들의 무공이야 별것 아니어서 뚫지 못할 일은 없지만, 함부로 무례를 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쫓겨나서 화산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정말 난감했다.
“아저씨, 저 언니 보내 주면 안 돼요?”
갑자기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그녀를 곤란에서 구했다.
명아였다.
어쩌다 명아에게까지 손을 벌리게 되었는지 황당한 유비연이었으나 지금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안 돼! 아가씨께서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문지기가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언니가 제 말 한마디면 꼼짝 못 하거든요?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그냥 보내줘요. 네?”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명아가 문지기에게 매달렸다.
‘저게 통하나?’
유비연이 고개를 젓는 순간 문지기가 뒤로 물러났다.
“알았다. 내가 혼나거나 임금 깎이면 잘 말해줘야 해?”
“당연하죠. 아저씨 고마워요!”
명아가 생글생글 웃고는 유비연의 손을 꽉 잡았다.
“언니, 얼른 가요. 소은 언니도 그렇게 화 많이 안 났어요. 소은 언니는 언니가 불여우라 우려해서 그래요.”
불여우? 유비연은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화산파에서는 절대 그렇게 불린 일이 없는데……. 역시 흑검문은 문파가 아니라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