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백화루주 (2)
흑검소로 흑검육식을 펼쳐보며 주석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파조사인 흑풍검신은 무림사에 한 획을 그었던 무적고수였다. 별호에 검이 붙은 것으로 보아 검법에서 탁월한 경지를 개척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흑검문 유일의 독문 검법인 흑검육식은 어떤가. 강호 잡배라면 누구나 안다는 삼재검법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검법으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을 만큼 허접했다.
“하아!”
주석하는 흑검소를 든 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제는 대충 짐작한다. 왜 흑검육식이 불완전한 삼류검법으로 탄생했는지. 흑풍검신은 흑검문이 주목받기를 원치 않았다. 적어도 오십 년 동안은 자신의 절기를 전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흑풍검신의 절정 무공은 어디에 숨었단 말인가. 완전히 실전된 것일까.
주석하는 다시 흑검육식을 펼쳐봤다. 역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예전과 달리 고수가 되니 느껴진다. 초식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뚝뚝 끊어진다. 게다가 초식마저 날카롭지 않다. 평범한 검로를 이탈하여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다.
“뭐하냐?”
뒤를 돌아보니 도수가 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흑검육식 연구 중이야.”
“그거 어디에 쓰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주석하는 도수의 앞에서 흑검육식의 제 일 식을 느릿하게 펼쳐 보였다.
“정상인데? 삼재검법이랑 비슷하네.”
도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하긴 이 녀석이 흑검육식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니까.
사실 주석하는 검법에 그리 해박하지 않다. 배운 검법이라고는 흑검육식과 암군의 암천살검뿐이다. 그마저 흑검육식은 모두 여섯 개의 초식이 전부이고 암천살검은 살수에 특화된 다섯 초식이 전부다. 일반적인 유명 검법에 비하면 초식이 너무 적고 단순했다.
흑검소의 쓰임새를 극대화하려면 적절한 검법이 필요했다. 최후의 순간에 상대를 죽이는 암천살검만으로는 쓰임새가 너무 빈약했다.
사실 가끔 주석하가 과다하게 내공에 의존하는 이유도 적절한 검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넌 암군의 무공을 얼마나 익혔어?”
최근에 확인한 도수의 무공은 꽤 준수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정파십존에는 턱없이 부족할지라도 중원사룡은 능가하지 않을까.
“나? 암흑단 필수 무공은 대부분 익혔어. 살검회 검법 기초가 있어서 빨랐지. 암군 사부의 무공은…… 아직 미흡하지만 대충 절반 정도?”
그만하면 검법의 깊이가 꽤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 초식 다시 봐주라.”
주석하는 흑검육식을 천천히 펼쳤다. 아무래도 그보다 도수의 검법 지식이 해박하니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가 초식 시연을 끝냈을 때 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요구했다.
“다시 해봐.”
주석하는 흑검육식을 반복했다. 이미 지겹도록 펼쳐봤던 검법이다. 그만큼 연습했으면 매끄럽게 펼쳐져야 정상인데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끊어지는 느낌이다.
“다시!”
열심히 재차 반복했다.
“다시!”
“야! 나 똥개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도수의 표정이 어딘지 점점 심각해졌다.
“왜?”
“으음, 얼핏 보기엔 삼류초식인데…….”
“이 자식아! 아무리 허접해도 그렇지. 감히 남의 문파 독문 무공을 삼류라니!” 주석하는 웃으면서 질책했다. 솔직히 사실이 그런데 어떡하나.
“그런데 뭔가 이상해.”
“뭐가?”
“제 일식 말이야.”
도수가 검을 들어 가볍게 휙휙 저었다.
주석하가 보기에 그가 펼치는 것이나 도수가 펼치는 것이나 차이가 없었다. 검법에 숙달된 도수 역시 흑검육식이 매끄럽지 않았다.
“나랑 똑같네.”
“그런데 말이지…….”
도수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앞서 펼친 검법보다 상당히 복잡해졌다.
“어?”
주석하는 깜짝 놀라 눈을 떼지 못했다.
검법이 달라졌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검법이 도수에게서 펼쳐졌다.
주석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 검로 사이에 기본적인 흐름만 몇 개 집어넣었어.”
도수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방금 보았던 달라진 검법이 재현됐다.
도수가 천천히 펼쳤기에 주석하도 무엇이 바뀌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흑검육식의 일식은 모두 열두 개의 기본 검초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검초 사이에 기본 검초 열두 개를 넣어 스물네 개로 구성하니 검법이 훨씬 자연스럽고 흐름이 매끄러워졌다.
“알다시피 흑검육식의 일식은 평범한 검법이잖아? 방금 내가 금방 해냈듯이 이 정도 수준의 검법을 창안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누가 창안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이 정도는 당연히 생각했을걸.”주석하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띵한 기분이었다.
‘조부 흑풍검신은 의도적으로 초식 일부를 생략했다!’
일대의 고수였던 흑풍검신이 도수도 쉽게 생각해내는 초식 보완책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흑풍검신의 말년 행적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그는 흑검문이 검법으로 이름을 날리기를 원치 않았다. 오십 년 규제를 묶은 것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흑풍검신도 자신의 절정검법이 완전히 실전되기를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훗날 검법의 천재가 나타나서 고의로 삭제했던 일부 검초를 되살려내기를 기대하면서 불완전한 검법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른 초식도 마찬가지야?”
주석하는 흑검육식의 제 이식을 펼쳐 보였다.
그가 몇 차례나 반복해서 보여준 다음에야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런 것 같네.”
도수의 손에서 흑검육식의 제 이식이 재탄생했다. 앞의 일식처럼 정확히 두 배가 길어졌다. 그 초식은 당연히 이번 초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려하고 강력했다. 보완 후에도 기초적인 검법처럼 보였던 일식과 달리 이식은 완벽하게 쓸 만한 검법이었다.
“아!”
주석하는 탄성을 터트리며 도수에게 다시 요청했다. 몇 번의 가르침 끝에 그도 똑같이 검법을 재현할 수 있었다. 과연 대단했다!
‘이 자식 완전 천재잖아?’
주석하가 더 놀란 상대는 도수였다. 그동안 흑검문에서는 흑검육식을 무려 오십 년간이나 열심히 익혔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원래의 흑검육식은 이가 빠진, 그들이 알던 흑검육식에 비해 월등한 검법이었다!
그것을 도수가 한눈에 파악했다. 물론 도수도 예전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데 암군의 제자가 된 후 검법에서 새로운 눈을 떴다. 흑검육식의 숨겨진 비밀을 깨닫다니!
과연 암군이 아무나 제자로 거둘 리 없다.
“삼식도 가능할까?”
주석하는 세 번째 초식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역시 흐름이 뚝뚝 끊어진다. 이런 검법을 익히느라 고생했을 흑검문도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차례 검식을 펼쳐보던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는 쉽지 않아. 그래도 시간 들여 연구하면 복원 가능할 것 같긴 한데?”‘진짜 천재다!’
주석하는 자신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해치우는 도수가 대단해 보였다.
한동안 주석하는 복원한 일식과 이식을 펼쳐보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진정한 흑검문의 무공을 되찾은 느낌이다. 사조인 흑풍검신의 진전을 이었다는 뿌듯한 기분도 들고.
“수! 그럼 흑검육식을 복원해주라. 응?”
새로운 사명을 깨달은 주석하는 도수를 채근했다.
도수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쪼금 천재잖아? 어렵지 않지.”
“재수 없는 놈!”
“그런데 생각해봐. 검법을 이런 식으로 불완전하게 전수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걸 우리가…… 어겨도 되나?”
문득 주석하도 고민에 빠졌다. 지금 내려오는 흑검육식은 확실히 고의다. 흑풍검신은 제대로 된 흑검육식을 전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벌써 오십 년이 지났잖아? 규제를 오십 년으로 걸었다는 것은 오십 년 후라면 검법 또한 복원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닐까.
“일단 해보는 거지.”
주석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강호를 전전하면서 아무도 흑검문을 제대로 몰라봤다. 구주사은의 일인이었던 흑풍검신의 문파라고 하기엔 너무 보잘것없다. 게다가 현재 그가 익힌 무공 또한 흑도팔군의 무공이라 흑검문의 것이 아니고 흑검소를 완벽하게 활용할 무공 또한 없다.
이런 모든 점을 종합하니 완벽한 흑검육식이 절실했다.
“좋아! 누구 부탁인데! 내가 수시로 고민해보지.”
도수가 시원하게 응답했다.
연신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자니 도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맨입으로?”
“헉!”
이 자식이 언제부터 이렇게 따졌지? 이거 어째 뇌군에게 그가 했던 말인데? 당황한 주석하가 눈을 굴리고 있자니 도수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때 네 녀석이 뇌군과 이렇게 협상해서 무려 백화루를 날름 먹어치웠다지?”
그날 뇌군이 돌아간 후 도수에게 백화루 받기로 했다고 자랑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그게…….”
“어쨌든 조만간 백화루가 네 손에 들어오잖아?”
“그, 그렇긴 한데…….”
어째 도수의 말이 심상찮다.
“백화루가 왜 백화루라고?”
“그야…… 기녀 백 명이…….”
“그렇지!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인데 네가 백화루주가 되면 그 기녀 백 명을 내 앞에 쫙 세워줘. 지금까지 기루나 술집에 가면 여자들은 나를 보자마자 도망가더라고.”한이 맺힌 듯 도수가 씩씩댔다.
녀석의 중구난방 생긴 얼굴을 보니 여자 친구는커녕 기녀도 붙지 않을 얼굴이긴 한데…….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백 명을 일렬로 세워?
“실제로는 백 명 안 되는데…….”
“있는 만큼 부르면 되지. 해줘? 말아?”
이 자식 치사하게 무려 흑검육식을 놓고 그의 꿈인 백화루를 걸고넘어지다니. 하지만 흑검육식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해줘.”
“약속했다?”
“알았어.”
주석하는 입을 삐죽이며 피식 웃었다. 설마 정말로 뇌군이 백화루를 사주려고? 그게 얼마짜린데. 게다가 그가 소림에 갈 일도 당분간 없으니 먼 훗날의 일이 될 것이다.
“크크크크.”
도수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녀석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애잔했다. 얼른 장가부터 확 보내버려야지.
“아마 십 년은 기다려야 할 걸?”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고 흑검소를 집어넣고 있자니 낯익은 녀석이 부리나케 연무장으로 뛰어왔다.
“소문주님!”
“뭔데?”
“배, 백화루에서 소문주님을 찾으십니다.”
“백화루에서?”
얼핏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든다. 주석하는 도수를 돌아보며 인상을 구겼다.
**
백화루의 아담한 별채에서 주석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기어코 우겨서 따라온 도수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백화루를 관리하는 총관이 착석해 있었다. 그 옆에는 그를 당황하게 만든 장본인, 만진장의 방순 총관이 웃음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만진장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도무지 올 수 없는 사람이 떡 하니 눈앞에 있으니 주석하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곧바로 모두 마무리 지었습니다. 보시지요.”
방순 총관이 주석하에게 두툼한 서류를 넘겼다.
주석하는 어리벙벙한 상태로 문서를 펼쳤다. 백화루 경영과 소유권 문서다.
“오늘 모든 금액을 지불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백화루는…… 주 공자의 것입니다.”
방순 총관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럴 수가! 백화루주가 이렇게 쉽다니!
“현재 백화루에서는 매달 많은 은자 수익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돈을 가져가시면 되고…….”
방순 총관에 이어 백화루 총관이 열심히 백화루를 설명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주석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강호를 주유할 때 돈 몇 푼이 없어 굶고 노숙했었는데 이제 그런 금액은 돈처럼 보이지 않는다.
백화루를 순식간에 구입해서 그에게 안긴 뇌군의 어마어마한 자금력에 황당할 지경이다. 그 빠른 행동력은 더욱 감탄할 만하고. 한편으로는 뇌군이 그와 반야불존의 만남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