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80화 (180/273)

180화 백화루주 (3)

얼떨떨한 상태로 문서를 받고 주석하는 방순 총관을 주시했다.

이것은 절대 공짜가 아니다. 세상에 이렇게 인심 좋은 사람은 없으니. 당연히 이 일은 뇌군과 그와의 약속이자 앞으로 해주어야 할 일의 대가다.

지금은 처음과 달리 뇌군의 인상이 꽤 바뀌긴 했으나 뇌군이 간계를 잘 쓰는 흑도 인물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쓸모가 없어지면 뇌군의 호의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필요 이상으로 감동할 필요는 없다.

역시 이어진 방순 총관의 말이 그의 경각심을 불러왔다.

“주군께서 이렇게 빨리 약속을 이행하신 이유를 아실 겁니다.”

“네, 알지요.”

“마지막 부탁이라 하셨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한번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탁이 무엇인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과연 다시 찾아갈 일이 있을까. 오라는 이유가 얼핏 눈에 보인다. 향후 무림이 마교의 침입으로 혼란스럽게 흘러간다면 도와달라는 부탁이겠지.

이제 삶의 목표였던 백화루주가 되었으니 덕양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 뇌군이 제 발로 찾아오면 만나주긴 하겠지만 일부러 찾아가진 않을 것이다. 귀찮은 일에 엮일 게 뻔하니까.

“저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말은 그렇게 했다. 언제 숭산 소림사를 찾아갈지 모르겠지만.

방순이 연신 고개를 주억이며 자리를 떴다.

방순이 사라지자 별채에는 주석하를 비롯하여 도수와 백화루 총관만 남았다.

한동안 주석하는 백화루 문서를 손에 쥐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의 목표를 이뤘다는 감격이 뒤늦게 뿌듯하게 전해졌다. 이것은 흑도팔군을 찾아 절세 무공을 배웠을 때보다 더한 감동이었다.

역시 이래서 인생은 살만하다. 이제는 꽃길만 걸어보자!

“어떻게 된 겁니까?”

주석하의 질문에 백화루 총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도 황당해서……. 방금 그분이 어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백화루주…… 아니 전주인을 찾아 협상했습니다. 가격이 워낙 파격적이라 전주인께서 고민할 일도 없었습니다. 바로 계약이 체결되고 오늘 급히 공자님을 부른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 충심을 다해 백화루를 관리하겠습니다.”총관이 머리를 숙였다.

대충 감이 왔다. 어쩌면 뇌군에게 이런 주루 하나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흑련을 주무르는 그의 자금력과 책략이라면 이런 주루를 인수하는 일은 별것 아니다. 그와 반야불존의 만남이 백화루보다 훨씬 중요하다면.

‘대체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거냐…….’

반야불존과는 한번 만났기에 특별한 기대는 없다. 다만 반야불존이 그의 회귀를 아는 듯한 기색을 비쳤기에 이번에 만나면 확실하게 확인할 생각이다.

문득 반야불존은 정파십존이고 뇌군과 협력할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뇌군은 반야불존을 통해 음모를 펼칠 수 없다는 뜻이다.

뇌군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상념에 잡힌 그를 도수가 깨웠다.

“어이! 백화루주!”

“으응?”“주인이면 아랫것들이 어떤지 확인해야지?”

이놈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당황하는 찰나 도수가 먼저 총관에게 요구했다.

“총관! 여기 일하는 사람을 쫙 불러오시오. 주인이 바뀌었다고 알려야 할 게 아니오?”

총관이 재빨리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일하는 사람들 전부 집합시키겠습니다.”

잠시 후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절반은 음식을 나르고 손님을 안내하는 점소이다. 나머지 절반은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숙수와 찬모였다.

“이분이 우리 백화루의 자랑인 왕 숙수입니다.”

주방을 총괄하는 왕 숙수는 사천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백화루 요리 맛이 괜찮다더니 역시 그럴 만했다. 푸짐하게 생긴 왕 숙수의 인사를 받은 후 점소이부터 잡일하는 잡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확인했다.

점소이 대다수는 당연히 주석하와 이미 잘 아는 사이였다. 그들의 분위기를 보니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듯했다. 평소 그들과 잘 지낸 덕을 봤다.

“이제 행수어멈이 올 겁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총관이 인사하고 점소이 등을 끌고 나갔다.

둘이 남게 되자 도수가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크크, 이제 기녀들이 인사하러 온다는 거지?”

“그런 것 같은데?”

주석하는 행수어멈을 본 적이 없었다. 기껏 눈에 익은 기녀라면 예전에 그 때문에 고생했던 명월이라는 기녀가 유일했다. 다른 기녀들은 그냥 오가면서 한번 봤을 정도라 눈에 익지도 않았다.

과연 몇 명이나 되려나?

‘근데 이 자식은 왜 좋아하는 거지?’

도수를 곁눈질하면서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연무장에서 약속한 일이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다니. 이 녀석 저잣거리에서 돗자리라도 깔 운명인가?

“흑검육식은 확실하게 손봐줄 거지?”

“당연하지.”

미덥지 않아 확실하게 다짐을 받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갑자기 좁은 별실이 북적북적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 나리, 제가 바로 행수어멈인 서 부인입니다.”

대략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우아한 여인이었다. 예전에 백화루에서 명성을 날리다가 나이가 든 지금은 기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서 부인이 주석하와 도수를 놓고 두리번거렸다.

“아, 내가 첫째 주인이고 여기가 둘째 주인이네.”

훗날 도수에게 백화루 관리를 맡기려고 도수를 띄워줬다. 도수는 그 흉계를 눈치 채지 못하고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럼 아이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서 부인이 기녀들을 쭉 옆으로 줄을 세웠다.

도수의 입이 확 벌어졌다. 그나마 침을 질질 흘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저렇게 좋을까. 아무래도 이 자식은 이게 삶의 꿈인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니 그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필이면 다루가 아니라 주루 주인인 것을 보면.

주석하는 재빨리 숫자를 셌다. 역시 백 명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모두 스물일곱. 아쉽지만 대단한 숫자이긴 하다.

“한 말씀 하시지요.”

서 부인의 채근에 주석하는 목을 가다듬었다.

“에…… 우리는 백화루 소속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백 명이 될 때까지 열심히…….”

얼떨결에 다음 목표가 설정됐다. 앞으로 진짜 백 명을 노려본다!

눈치를 살피던 서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는 아이가 있으십니까?”

“아, 저기…… 명월이라던가?”

주석하가 한 여인을 가리키자 그 여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소곳하게 절을 했다. 무려 주인과 친하다는 것은 큰 권력이기에 명월이 매우 반겼다.

“명월아, 앞으로 잘 모시거라.”

서 부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차례로 인사시켰다.

분을 많이 칠해서인지 주석하의 눈에는 여인들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그녀들 대부분이 미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천상삼화나 우설금에 견줄 미녀는 아니다. 이미 눈이 한껏 높아져 있는 주석하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오히려 도수를 살피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남자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던 놈인 것 같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이 풀려 있었다.

‘흐이그, 난리 났네.’

한숨을 내쉬며 옆구리를 쿡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쾅!

문이 확 열리며 한 인물이 씩씩대며 들어왔다.

“허억!”

주석하의 눈이 확 커졌다.

들어온 사람은 유비연이었다. 오늘은 남장을 해서 곱상하게 생긴 서생 모습이다. 이렇게 난감할 때가! 이 상황에서 만나면 안 될 여자가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유비연이 일렬로 도열 한 기녀들을 쭉 훑어보고는 주석하와 도수를 미친놈처럼 쳐다봤다.

“어, 어떻게 여길…….”

주석하의 입이 바로 닫혔다.

유비연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신호를 보내고는 곧바로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갔다.

도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일생일대의 즐거움을 방해받은 표정이다.

“쟤, 왜 저러냐?”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주석하는 아무래도 유비연을 달래야 할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마무리해라. 난 그만 가야겠다.”

주석하는 서 부인에게 대충 둘러대고는 급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마 도수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겠지?

별채 밖으로 나오니 유비연과 주소은이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비연은 별문제가 아닌데 주소은을 발견하니 갑자기 기가 팍 죽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빠! 뭐 하는 거예요?”

“그, 그게…….”

“이리로 와봐요!”

“으아악!”

주소은이 그의 귀를 잡고 백화루 밖으로 끌고 나갔다.

총관을 비롯하여 점소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난리였다. 역시 꽃길이 이렇게 쉽게 깔릴 리가 없다.

백화루 밖 거리까지 끌려 나온 다음에야 주소은이 잡았던 귀를 놓아주었다.

“오라버니! 아무리 영웅호색이라지만 벌건 대낮부터 기녀를 불러놓고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

“영웅은 무슨 얼어 죽을…….”

유비연이 싸늘한 기운을 푹푹 풍기며 맞장구를 쳤다.

“그, 그게…… 오늘 백화루를 인수해서…….”

“네?”

주소은과 유비연이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평소 주석하가 백화루 노래를 불렀지만 그게 실현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이 백화루가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니어서 주석하가 평생 벌어도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그들의 표정에 주석하는 재빨리 목을 빳빳하게 폈다.

“나 이제…… 갑부라고 갑부! 만석꾼이야 만석꾼!”

주소은의 안면이 더욱 찌푸려졌다. 게다가 유비연도 더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기대한 반응이 아닌데? 돈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반응이 이래? 주석하는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아직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다고 투덜댔다. 주소은이야 흑검문 안에서 호의호식했으니 돈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적이 없다. 유비연은 강호를 함께 다녀보니 돈을 많이 가지고 다녀 고생할 일이 없었다. 반면 그는 돈이 없어 굶거나 노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아!”

주소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석하는 주소은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왜 그러냐?”

“내가 그동안 여우들이 오빠 옆에서 알짱거리지 못하게 얼마나 고생했는데 대체 이게 뭐야? 무려 여우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는 소굴에 가 있으면 어떡해? 흥! 앞으로 여기 한 번만 더 오면 죽을 줄 알아!”

“응? 여기 내 껀데…….”

“어쨌든!”

주소은의 서슬 시퍼런 경고에 주석하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제 사람인 기녀가 동물인 여우로 변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주석하는 끌려가면서 연신 백화루를 돌아봤다. 도수는 나오지 않았다.

뭔가 시작부터 이상하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

밝은 보름달이 겨울 하늘에 떠올랐다.

주석하는 술병을 들고 눈 덮인 화원을 거닐었다.

최근 들어 갑자기 삶이 무기력해졌다.

십만대산에서 죽고 현생에 회귀한 이후 흑도팔군을 만나고 무공을 익히며 바쁘게 보냈다. 삶의 목표를 백화루주로 정하고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앞을 달렸다.

그러던 삶이 다섯 내공을 모두 제어할 수 있게 되고 백화루마저 소유하면서 갑자기 느슨해졌다. 삶의 동력이 일거에 소진된 기분이다.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걸까, 앞으로는 무엇을 할까.”

바쁘고 위험하게 살아왔고, 이룬 것도 적지 않은데 조금은 허탈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는 화원 중앙에 있는 연못에 도착했다. 연못에 비친 달이 일렁이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면 딱 좋다.

앉을 자리를 찾던 그는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은 한 인영을 발견했다. 주소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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