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81화 (181/273)

181화 피어나는 전운 (1)

“밤늦게 웬일이야?”

주석하는 누이동생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를 향해 미소를 던진 주소은이 물끄러미 시선을 연못으로 돌렸다. 연못에는 환한 달이 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주소은의 태도에 주석하는 괜히 미안해졌다.

“나 때문에 실망했구나?”

백화루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라 짐작한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달랬다.

“아니. 그게 뭐 어때서? 오빠 꿈이랬잖아?”

과연 친동생은 그의 편이었다. 주소은은 그가 평소 백화루주라고 부르짖던 삶의 목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는 주색잡기에 능하지도 않잖아.”

역시 염려와 달리 주소은은 낮의 상황을 비교적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낮의 사건은 단순히 주인과 종업원 간의 인사자리였을 뿐이다. 절대 기녀를 불러놓고 대낮부터 술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

“크크, 너야말로 나를 잘 아는구나. 너밖에 없다!”

“오빠 동생이잖아.”

새삼스럽게 믿어주는 주소은이 고마웠다. 전생에서는 적혈방 침입 때 죽었던 그녀가 지금은 살아서 그에게 힘이 되어준다.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니 새삼 유비연에게서 받았을 충격이 떠올라 가여워졌다. 생각해보니 그날 이후 주소은은 유비연과 별달리 어울리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넘어간 듯하다.

“너…… 괜찮아?”

“뭐가?”

“유 낭자 말이야. 유 낭자가 속인 거.”

“속였다기보다 내가 속은 거지. 고의는 아니었을 거야. 괜히 나 혼자…… 관심 있나 해서 들떴으니까.”

사실 유비연이 특별히 주소은에게 치근덕거린 적은 없다. 주소은이 착각해서 들러붙었을 뿐. 생각해보면 그런 주소은 때문에 유비연이 오히려 마음고생 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을 테니.

“유 낭자 밉지 않아?”

“아니. 그런 일로 싫어질 리가 있겠어? 유 낭자는 바른 사람이야. 도덕적이고.”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잘 치유하고 있는 그녀가 참 대견해 보였다.

“말 만해. 내가 혼내줄 테니까.”

“아니라니까.”

피식 웃음을 머금고 주소은이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모습이 조금 처량해 보인다.

“뭐 보니?”

“달.”

연못에 비친 달이다.

“달에서 뭐 보는데?”

“그 사람.”

“누구?”

“그런 사람 있어.”

주석하는 금세 누구인지 깨달았다. 남궁천이다. 중간에 유비연 때문에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그녀는 남궁천을 계속 마음에 뒀었다. 생각해보면 바깥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남자라고는 접한 적이 사실상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남궁천은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아버지 주격도 외부 교류가 없어 마땅한 혼처를 알아보기 난감한 상황이다. 이제 슬슬 혼인할 나이에 접어드는 그녀이기에 이대로 두면 자칫 평생 홀로 늙을지도 모른다.

‘내가 꼭 남궁천 멱살 잡아서 끌고 올게.’

주석하는 주소은의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다리를 놓겠다고 다짐했다.

“오빠는…… 달 보면 누가 보이는데?”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허를 찔린 주석하는 당황했다.

공세로 전환한 주소은이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유비연 낭자인가? 아니면 남궁서란? 백화령?”

그녀의 입에서 천상삼화 세 사람의 이름이 줄줄 나왔다. 그들이 왜 나오지? 주석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흐음, 요즘 보면 유 낭자랑 오빠는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고…… 남궁서란은 사나워서…… 그나마 백 낭자가 제일 낫긴 한데…… 오빠도 관심 있어?”

“아니.”

그에게 백화령은 같은 사부를 둔 인연뿐이다. 그 덕에 더 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세 사람이…… 좀 많이 예쁘긴 한데 정작 오빠는 별로 관심 없어 보였어. 그럼 녹 낭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소은이 생각에 잠겼다.

주석하는 연못에 비친 달을 쳐다봤다.

누가 떠오를까? 달을 배경으로 점차 한 여인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우설금이다.

이제는 우설금이 다른 여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경 쓰이는 사람이 됐다. 그때 만리안석으로 우설금을 우연히 본 후 이제는 그마저 보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미칠 듯이 보고 싶어졌다.

말없이 연못의 달에 집중하는 주석하의 태도에 주소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오빠의 마음속에 누군가 있다는 직감이 왔다.

“설마…….”

주소은은 예전에 본 그 이상한 여자를 떠올렸다. 가끔 붉은 옷을 입기도 했고 때로는 연노랑 옷을 입기도 했던 아름다운 여자.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던 특이한 여자.

“아니겠지…….”

주소은은 우설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설금이 천상삼화에 필적할 만큼 아름답긴 하지만 그녀는 남자에게 호감을 얻을 만큼 여성스러운 멋이 없다. 웃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고 나긋나긋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째 오빠의 반응이 이상했다.

“있구나…….”

“뭐가?”

“오빠도.”

대답하지 못하는 주석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주소은은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누구든 오빠는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게 될 거라고, 맞게 해 달라고 그녀는 달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

구구구구-

비둘기 떼가 모여 모이를 쪼고 있었다.

그 옆에서 명아가 열심히 비둘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지나가던 유비연은 명아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 보면 아직은 하는 행동이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다.

“명아야, 뭐해?”

“비둘기 세고 있어요.”

“비둘기는 왜?”

“여기랑 화산이랑…… 전서구 보내게요.”

화산에 있을 때 유독 주석하와 서신을 교환하고 싶다며 떼를 쓰던 명아였기에 유비연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때부터 전서구 어쩌고 하더니 기어이 이곳에 와서 비둘기를 키우고 있다.

“비둘기가 많네.”

유비연도 옆에 앉아 함께 비둘기를 셌다.

명아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비둘기가 열두 마리였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열세 마리로 늘었어요. 새끼를 낳았나?”

유비연은 다시 비둘기를 셌다. 열세 마리였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새끼 비둘기는 없었다.

“열세 마린데?”

“그러니까 이상하잖아요. 밤사이에 한 마리 태어났어요.”

“그럴 리가…….”

유비연은 명아가 비둘기 마릿수를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숫자를 제대로 못 세거나.

“이상해요. 저놈이 새로 태어난 놈이에요.”

명아가 어떤 한 비둘기를 가리켰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비둘기를 구별할 수 없다고 믿은 유비연은 명아의 말을 흘려들었다. 얘가 셈이 좀 약한가? 비둘기가 워낙 어지럽게 돌아다니니 착각할 가능성이 크긴 한데……. 모이를 쪼고 있는 커다란 비둘기가 밤사이에 태어난 놈일 리가. 그런데…….

“응?”

비둘기 다리에 묶인 작은 연통이 보였다. 이 비둘기는 이곳에서 키우는 놈이 아니라 타지에서 날아온 전서구다.

유비연은 비둘기를 잡아 다리에 묶인 연통을 뺐다.

“전서구야. 편지가 들었어.”

놀란 명아가 멍한 표정으로 비둘기와 편지를 번갈아 살폈다.

유비연은 돌돌 말린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흑검문 수신이라 여기고 무심코 열었던 그녀의 안색이 확 변했다.

- 정사대전 임박. 화산으로 돌아오기 바람. 화산파 장문.

화산파 장문인이 그녀에게 보낸 통지였다.

“뭔데요?”

“돌아오라네. 화산으로.”

“아!”

유비연은 고민에 잠겼다. 이곳에 머무르다 보니 중원 정세에 둔감해졌다. 운남에 갔을 때 중원 곳곳에서 무림맹 연합군이 사파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때는 대부분 지역에서 무림맹이 흑련을 밀어붙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운중산에 왔던 사부 자하검존은 화산파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부의 성격이라면…… 운중산에서의 실패를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겠지. 그 탈출구가 혼천교인가?

머릿속에서 그 상황이 그려졌다. 현재의 화산파는 매화검수마저 타격을 입어 정상이 아닌데 혼천교와 전쟁을 벌일 수 있나?

“가야겠어.”

유비연은 화산으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싸움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옆에서 그녀를 불안하게 쳐다보는 명아가 걱정됐다.

이제는 화산파 제자인 명아를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그녀가 돌아갈 때 다시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갈 곳은 전쟁터다. 화산파와 혼천교의 싸움이 벌어지면 명아는 무사하기 어렵다. 그런 곳으로 어린 그녀를 데려가야 할까.

이곳에 남겨두는 선택이 최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화산파의 사정을 설명해야 하고 이는 주석하의 참전을 불러온다.

혼천교에서 은혜를 입은 주석하는 혼천교의 위험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혼천교에 주석하가 가담하면 무게추가 혼천교로 기울어 화산파에 치명적이다.

사문인 화산파에 부담을 줄 행동을 그녀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아!”

유비연은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

중원 무림의 상황이 급변했다.

무림맹이 사파 척결을 외치고 나섰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하남과 호북 등지에서는 정파 연합군이 귀조궁 등을 멸문시킨 전력이 있다. 이제는 그 기류가 중원 전역으로 퍼진 것만 다를 뿐.

이런 가운데 화산파와 혼천교는 무림의 주목을 받았다.

일검신성의 죽음으로 빚어진 양측의 대립이 점차 고조되던 차였다. 양 문파에는 자하검존과 혼군이라는, 정과 사의 거인이 존재했기에 이들의 전면전은 그 의미가 상당했다.

특히 최근 들어 자하검존의 움직임은 매우 활발했다. 그는 만사지존과 함께 무림맹의 여론을 주도했고 사파를 압박했다. 상춘원이나 운중산 사건을 자하검존이 주도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강호인들은 자하검존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고 있었다.

최근 화산파에 인근 구대문파인 종남파와 공동파가 집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거에 소림과 무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사파 문파를 척결한 전력이 있기에 이들의 연합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왔다.

화산파가 위치한 섬서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멀리 화산이 보이는 평원에서 주석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옆에는 호기심 많은 도수가 그와 유비연을 관찰하고 있었다.

유비연도 긴장을 감추지 않았다.

“다 왔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화산은 절경입니다.”

주석하는 대자연의 숭고함을 새삼 느꼈다. 그가 처음 화산을 본 것은 혼군을 찾아 처음으로 덕양을 벗어났을 때였다. 그때 강호협객행 중인 유비연을 처음 만났었다.

그때도 이곳에서 멀리 솟은 화산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산은 묵묵히 그곳에서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유비연의 관계는 그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그는 그녀를 남자로 착각했고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기협으로 알았었다.

지금 그녀는 정과 사의 이념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평범한 문하 제자일 뿐이다.

“화산이 고향이죠?”

“네.”

유비연은 조용히 대답했다. 어디에서 태어났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화산파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녀의 고향은 이곳이다. 강호를 주유하더라도 언제든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화산이다.

문득 그녀는 명아를 떠올렸다. 전쟁터에 명아를 두고 갈 수 없기에 그녀는 주석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설사 주석하가 다툼에 참여하더라도 속일 수는 없어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흘러갔다. 명아를 흑검문에 남겼고 주석하는 그녀와 동행했다. 물론 그녀는 화산파에 힘을 보태려고 길을 떠났고 주석하는 혼천교를 도우려고 여정을 함께 하게 됐다.

도수도 암흑단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는 두 사람의 대립이 불안하다며 화산을 들렀다가 호북으로 움직이겠다고 우겼다.

이제 화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석하와 유비연은 서로 적이 되어 칼을 겨눠야 한다.

이미 운중산에서 비슷한 과정을 경험했기에 오히려 무덤덤했다.

“곧바로 혼천교로 갈 건가요?”

“바로 화산으로 갈 거죠?”

동시에 말을 꺼내고 나니 왠지 머쓱해졌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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