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피어나는 전운 (2)
주석하는 유비연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와 적이 되려니 그 또한 마음이 좋을 리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더구나 그녀는 운중산에서 자하검존과 대립하기까지 했다. 화산을 떠날 때도 자하검존의 명을 어겼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힘든 시간을 이해한다.
유비연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싸우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무조건 정사가 양패구상하는 파국을 막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석하는 한 단계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정사대전 뒤에 불어 닥칠 마교의 침공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양패구상요?”
“저는 어떻게든 혼군을 설득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화산파에서 쳐들어오면 지난번에도 봤다시피 방법이 없겠죠. 그러니 화산파 수뇌부를 설득해주세요. 유 낭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알아요.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화산파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다. 지금은 예전보다 확 줄었다. 답답한 가운데 유비연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석하가 화산파를 향해 적대감을 내비치지 않으니. 어쨌든 그녀는 자하검존을 설득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혼천교에 검을 들이댈 것이다. 겪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수순이다.
“저기 화산 입구가 헤어질 지점이군요.”
“그래요.”
화산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두려워졌다.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다.
“생이별도 아닌데 둘이 뭐하냐?”
그들의 뒤에서 도수가 발에 채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투덜댔다.
“뭔 소리야?”
“난 녹 소저 볼 생각에 좋기만 한데.”
“어? 너 녹 소저 좋아하냐?”
“그 말괄량이를 내가 왜 좋아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주석하는 저만치 앞서가는 유비연을 뒤쫓았다.
세 사람이 쉬엄쉬엄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설매검화 아닙니까?”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한 사람이 아는 척하며 말을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주석하는 옆으로 비켜섰고 유비연은 상대를 살피며 기억을 떠올렸다.
“아! 종남일절?”
“기억하시네요.”
종남일절 하진건이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숙였다.
종남일절은 종남파가 낳은 절세기재다. 비록 그 명성이 중원사룡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는 구대문파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사문 때문이란 설이 있는 만큼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청년기협이었다.
종남파는 화산파와 같이 섬서성에 자리했기에 예전부터 교류가 잦았다. 당연히 유비연도 종남파 주요 인물을 만난 적이 있고 하진건과도 한 해에 한두 번은 대면한 기억이 있었다.
“유명한 분이신데 당연히 기억하지요.”
유비연의 칭찬에 하진건의 입매가 쓱 올라갔다.
“화산으로 돌아가는 중이십니까?”
“사천에 있었는데 소집 명령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소협은?”
“작전 중에 적으로 보이는 염탐꾼을 발견했거든요. 주막에서 쫓아왔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흑의에 검을 든 놈입니다.”
하진건이 유비연에게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객잔에서 화산파 합류 계획을 짜다가 염탐하는 자를 발견하고 녀석을 쫓아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제 비수가 녀석의 등에 꽂혔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녀석을 잡아야 하는데…….”
“전 보지 못했어요.”
“하하, 뛰어봐야 벼룩이죠. 저희도 화산으로 가는 중이니 동행해도 될까요?”
하진건이 주석하 쪽을 쓱 훑어보고는 유비연에게 대답을 구했다.
주석하는 하진건의 시선에서 명백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적의라니?
주석하는 하진건의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유비연이 주석하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주저했다.
어차피 남은 길이 얼마 되지 않기에 주석하는 대신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쓱 그를 훑어본 하진건이 환한 얼굴로 유비연 옆에 착 붙었다.
주석하는 녀석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었다.
‘유 낭자에게 관심이 있군.’
그가 유비연 옆에 있어 적대시한 모양이었다. 천상삼화라는 그녀의 명성을 고려하면 주변에 청년들이 모이는 장면이 이상하진 않다.
종남파 사람들은 도망친 흔적을 살피며 전진했다.
유비연이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주석하를 살피자 하진건이 기분 나쁜 듯 주석하와 도수에게 말을 걸었다.
“소협은 누구십니까? 인사나 합시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유비연이 대신 대답했다.
“주 소협이에요. 저쪽은 도 소협. 저랑 같이 화산으로 가는 중이었죠.”
“아, 그렇군요. 그럼 사문이?”
“두 분 모두 가전 무공을 익혔습니다.”
유비연이 적당히 무마했다. 이 자리에서 흑검문이라는 정체를 밝히면 자칫 종남파와 싸움이 붙을 가능성이 컸다. 흑검문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겠지만.
지금 하진건과 함께 온 종남파 제자들이 대략 이십여 명이다. 싸운다고 겁낼 주석하는 아니었지만 괜히 쓸데없는 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는 굳이 출신을 정정하지 않았다.
“아하, 그렇군요.”
하진건의 안면에서 무시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들이 평원을 지나 숲에 들어섰을 때였다.
“저기다! 잡아라!”
종남파 제자 한 사람이 다급하게 소리치고 수 명의 사람들이 숲속으로 뛰어갔다.
어수선한 가운데 주석하 일행이 머뭇거리고 있자니 하진건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염탐꾼 녀석을 발견했나 봅니다. 역시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아니겠습니까?”
하진건이 동료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성한 숲에 흑의를 입은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나무에 기대고 있었다. 흑의 중년인은 등이 피로 범벅되어 있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숨어 있었던 듯 주위가 피로 흥건했다. 흑의인은 이미 기력이 쇠하여 종남파 사람을 발견하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눈빛만은 여전히 예리했다.
“미꾸라지 같은 놈! 감히 나 종남일절 앞에서 재주를 부리다니! 네놈은 혼천교냐?”
하진건이 유비연을 힐끔거리면서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유비연을 의식한 행동이 다분했기에 주석하는 실소를 머금었다. 저런 허세에 넘어갈 여자가 있을까.
흑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포위한 종남파 사람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순순히 항복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하진건이 다시 소리치자 흑의인이 검을 쥐고 간신히 몸을 세웠다. 그의 손도 피범벅이었다. 사실상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혼천교란 말에 주석하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아마도 흑의인은 혼천교에서 구대문파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보낸 정보원일 것이다. 종남파의 움직임을 엿듣다가 운 나쁘게도 종남일절에게 걸려 죽음의 위기를 맞은 것이겠지.
유비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석하를 돌아봤다.
주석하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혼천교 사람이 위험에 빠졌는데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 사이 종남파 제자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도수는 입가에 사이한 미소를 띠고 오른손으로 검병을 쓰다듬었다. 사고 칠 것 같다는 생각에 주석하가 먼저 나섰다.
“혼천교요?”
중년인의 시선이 주석하에게 옮겨졌다. 지금 주석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종남파와는 확연하게 구별됐다.
“당신은 누구요?”
흑의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기력이 빠진 목소리였다.
“나는…….”
무심코 입을 열던 주석하는 하진건의 흥미로운 시선을 발견했다. 어차피 무슨 상관인가.
“나는 소교주인 녹 소저의 친구요.”
“아!”
흑의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의 대답에 하진건을 비롯한 종남파 제자들이 주석하를 노려봤다.
“혼천교에 전해주시오. 종남파에서 모두 마흔여덟 명이 합류한다고 말이오. 주요 인물은…….”
“그만!”
하진건이 검으로 흑의인을 가리키며 제지했다. 그 순간 일부 종남파 제자들이 주석하마저 포위했다.
흑의인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져…….”
흑의인이 소생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하진건이 목표물을 주석하로 바꿨다.
“소협! 당신은 대체 누구요? 혼천교 사람이오? 그렇다면 당신을 놓아줄 수 없소!”
“하 소협!”유비연이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하진건이 유비연에게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반박했다.
“유 낭자, 우리는 정파 아니오? 게다가 혼천교와는 곧 전쟁을 치러야 하오. 낭자가 저 사람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지만, 저 사람이 사파인이라면 절대 그냥 둘 수 없소. 저 사람이 스스로 혼천교 소교주의 친구라 했으니 조사해봐야겠소!”하진건의 자신만만한 기세에 유비연은 당황했다.
“안 돼요!”
“흐흐, 유 낭자. 뭐가 두려운 거요? 저놈은 저 염탐꾼과 한패가 분명하오. 내가 저놈을 때려잡아 강호 정의를 세우겠소!”
하진건이 검을 겨눈 채 포위망을 좁히자 유비연이 다급하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된다니까요.”
“유 낭자? 이거 실망인데? 사파인을 좋아하나…….”
하진건이 비웃으며 그녀가 비킬 것을 요구했다.
유비연은 주석하에게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계속했다.
주석하는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간파했다. 그에게 종남파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종남파 제자 스무 명이라고 해봐야 별것 아니다. 게다가 한쪽에선 도수마저 비웃음을 띠고 검병을 슬슬 만지고 있으니.
사실 주석하도 이 자리에서 시비를 걸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을 놓아달라고 해요.”
“그러고 싶은데…….”
유비연이 주저하면서 다시 하진건에게 사정했다.
“하 소협, 이들을 놓아줘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유 낭자, 대체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저 사람에게 약점 잡힌 것 있소? 나만 믿으시오.”
오히려 하진건이 발끈하며 유비연의 옆을 돌아 주석하 앞으로 나섰다.
어쩔 수 없이 유비연이 소리쳤다.
“저 사람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라니까요!”
“푸하하! 농담은!”
하진건이 비웃음을 치면서 주석하에게 검을 겨눴다.
주석하가 기분 나쁜 눈빛으로 째려보자 하진건이 그의 목에 검을 대며 소리쳤다.
“이봐! 처음 볼 때부터 네놈 인상이 기분 나빴다! 감히 사파 주제에 천상삼화에게 수작을 걸어? 오늘 네놈을 붙잡아 그 죄를 묻겠다!”주석하가 변명할 틈도 없이 하진건의 검이 그의 목을 찔러왔다.
주석하는 백변환영보를 펼쳐 나무에 기댄 흑의인에게로 이동했다. 마치 이형환위를 펼친 것처럼 그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어?”
검이 허공을 찌르는 순간 하진건은 상대가 예상치 못한 고수임을 알아챘다. 놓친 상대는 어느새 혼천교 흑의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강호에서 종남일절로 위명이 자자한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 이곳엔 같은 편이 무려 스무 명이 넘는다. 상대가 아무리 강자여도 부상자까지 데리고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패배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이놈이! 유 낭자 얼굴을 봐서 봐주려 했더니 감히 나를 놀려!”
하진건은 동료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석하는 계속 고개를 젓는 유비연을 힐끔 본 후 하진건에게 경고했다.
“순순히 물러가라. 서로 못 본 것으로 하자.”
“뭔 소리냐?”
이럴 때 항상 공명심이 투철한 자가 존재한다. 주석하를 얕잡아본 한 녀석이 홀로 공격해 들어왔다.
주석하는 상체를 눕혀 검을 흘리면서 재차 소리쳤다.
“경고했다!”
“헛소리! 네놈 혓바닥부터 잘라주마!”
검이 빗나가면서 간신히 중심을 잡은 녀석이 검의 방향을 바꿨다. 재차 주석하의 가슴을 향해 검이 무자비하게 날아왔다.
종남파에서는 주석하의 가슴에 구멍이 뚫릴 것으로 여겼다.
유비연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지금 이곳에서 주석하의 분노를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휘익-
턱!
주석하의 손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검을 잡았다. 이거 오랜만에 해보네!